소설리스트

미열 소년 외전-(24)화 (170/174)

외전 24화

“…….”

당장 그 ‘엄청난 섹스’를 했던 새벽을 떠올린 이겸이 이번에는 권태정의 뺨에 살짝 입 맞추곤 옆에 앉아 하루가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기야, 더워?”

“…네?”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아닌데…. 안 더워요….”

하루에게 밥을 떠서 숟가락을 다시 쥐여 준 권태정이 이겸을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야한 생각 했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이상하다. 좀 전에 여기 뽀뽀할 때 좀 느낌이 달랐는데.”

이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 뺨을 톡톡 두드린 권태정이 씩 웃었다. 권태정은 이제 이겸의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숨소리, 입 맞출 때의 느낌 만으로도 이겸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갑자기 떠올라서….”

“어, 더 빨개졌어.”

이젠 목덜미까지 빨개진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귀엽다는 듯 이겸의 말간 뺨을 톡 건드렸다.

“실장님이 자꾸 놀리시니까….”

“시짜!”

간지럽던 분위기 안으로 하루의 목소리가 울렸다. 말문이 트이기는 했지만, 몇 가지 단어 외에는 불분명하게 일부 글자를 따라만 말하던 하루가 처음으로 내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하루에게 닿았다. 발음은 불분명하지만, 뭘 따라 말한 건지는 모를 수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하루한테는 실장님 아니라 아빠. 태정이 아빠.”

“빠빠, 압빠!”

“응, 잘했어. 아빠.”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블루베리를 손에 들고 가만히 보면서 오물오물 먹는 사랑스러운 하루의 영상을 찍어 남긴 이겸이 그런 하루를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는 권태정의 사진도 남겼다. 늘 이런 눈으로 저와 하루를 보고 있는 사람과 함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이따 하루 자면 산책 갈까? 우리 이겸이 좋아하는 밀크티도 마시고.”

“네, 좋아요.”

당연하다는 듯 가까워진 두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붙었다가 떨어졌다. 양손에 블루베리를 하나씩 든 채 뽀뽀하는 권태정과 이겸을 보던 하루가 방싯 웃으며 좋다는 듯 팔다리를 바동바동 흔들었다.

그 귀여운 움직임에 다시 다이닝룸 안으로 웃음이 번졌다. 세 사람의 아주 완벽하게 행복한 웃음이.

태성그룹의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를 기획한 권태정은 시간에 맞춰 광고 촬영 현장을 찾았다.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 들어 이 정도는 그냥 맡겨도 되지만, 직접 처음부터 기획을 하고 발로 뛰며 함께 일한 만큼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서정원 씨는?”

“도착하셔서 준비 중이십니다. 곧 나오실 겁니다.”

하반기 최고 주력 프로젝트 상품의 모델은 배우 서정원이었다. 데뷔 이후 하는 작품마다 연이어 히트를 친 것은 물론이고, 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 성질은 더럽지만, 본업과 얼굴은 끝내주는 배우에서 사랑꾼으로 이미지가 바뀌며 더욱 전국민적으로 인기가 올라간 상태라 가장 먼저 떠올린 모델이었다. 서정원이 거절할 경우 그다음에 쓸 모델을 정하지도 않았을 만큼 서정원을 향한 염원이 강했다.

그렇다고 그리 저자세로 구걸하듯 러브콜을 보내지는 않았다. 서정원이 바보가 아닌 이상 태성그룹의 하반기 최고 주력 제품 단독 모델을 마다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권태정의 예상대로 서정원 측에서 어렵지 않게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이 기회를 잡는 게 서로에게 윈윈이라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괜한 곳에서 진을 빼지 않는 똑똑한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서정원도 마음에 들었다.

“직접 보니까 이 팀장님께서는 어떠셨어요? 우리 선택이 옳았습니까?”

“네, 아까 딱 들어오시는데 그것만으로도 그… 아우라라고 해야 할까요? 괜히 톱배우가 아니구나, 그 생각도 들고, 저희 플래그십 제품에 정말 이미지도 딱이라 전 너무 좋았습니다.”

“안목 높기로 유명하신 이 팀장님께서 이렇게 극찬하실 정도라니 저도 궁금하네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저기 나오시네요.”

이 팀장과 함께 스튜디오로 나온 서정원에게 다가간 권태정의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장착했다. 이겸과 하루에게 보여 주는 웃음과는 다른 결의 사무적인 웃음이었다.

“안녕하세요. 태성그룹 권태정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총책임자로 감사 인사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백 비서가 주는 명함을 받아 서정원에게 준 권태정이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 전체적으로 스캔하곤 다시 미소가 머문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서정원입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보통 알파들을 접하다가 간만에 가족 이외의 우성 알파와 마주하니 느껴지는 기운이 꽤 강했다. 권태정은 꼿꼿한 태도로 대놓고 단단한 벽을 세운 채 인사하는 서정원을 보며 웃음 지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꼭 배우님과 함께 하고 싶다고 어필했는데 직접 뵙고 보니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보여서 기쁩니다.”

“기대에 부응해서 좋은 결과 보여 드리겠습니다.”

본업도 잘하고 뭘 맡기든 최대치의 아웃풋을 뽑아내지만, 싸가지가 없고, 인성이 그리 좋지 않으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던 서정원 보고서를 떠올린 권태정이 팔짱을 낀 채 스튜디오에 앉은 서정원을 눈에 담았다.

보통 저를 보고 대하던 다른 사람들보다 꼿꼿하고 숙이지 않는 건 맞지만, 그건 우성 알파의 기본적인 성질이었다. 그리고 일대일로 계약을 맺어 서로에게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에서 딱히 과하게 수그리며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걸 권태정도 좋아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기에 군더더기가 없는 서정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싸가지 없단 말이 많아서 기대했는데 성격 깔끔한데? 난 저런 타입 좋아. 보자마자 허리 확 숙이고 머리 처박으면서 영광이니 은혜에 감사하니 이러는 게 더 별로야.”

“정말 문제가 있으면 업계에서 그렇게 오래 톱으로 못 살아 남죠. 실장님도 겪어 보셨지만, 옳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기 싫은 사람들은 그걸 왜곡해 퍼뜨리잖아요. 기사들 보면 서정원은 사실 피해자인 경우가 많아요. 유명하니 한 번 더 피해를 보는 거고.”

“아, 알지.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마스크도 좋고, 분위기도 어울리고….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태프들보다 뒤쪽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앉은 백 비서가 시간을 확인하고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회사로 다시 안 들어가고?”

“응. 이겸이가 스튜디오로 오기로 했어. 학교에서 별로 안 멀잖아. 내가 간다니까 일하다 나오지 말라고 해서 여기서 기다리려고. 우리 이겸이 너무 착하지.”

“이겸 씨야 뭐 늘 착하지. 하루는 요즘 어때? 못 본 지 꽤 됐네. 많이 컸겠다.”

“저번 주에 봤잖아. 주말에 산책하는데 조현준까지 나와서 우리 하루가 팬미팅한 걸로 기억하는데 뭐 못 본 지 꽤 돼.”

“애들은 원래 하루가 다르게 큰다잖아.”

백진우의 뻔뻔한 말에 웃은 권태정이 휴대폰을 꺼내 하루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요즘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하루 이야기를 묻고, 궁금해하기에 바빴다. 그중에서도 백진우와 조현준은 정도가 심했다.

하루가 너무 예뻐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느니 자려고 누우면 하루가 꼬물대는 게 생각나서 죽겠다느니 주접을 떨어 대는 통에 정말 살 수가 없었다. 물론 하루를 너무 예뻐해 주는 삼촌들이 생겨 좋기는 하지만, 가족 산책을 하는 데까지 와서 하루랑 노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는 게 권태정의 주된 감상이었다.

“내일 집에 와서 저녁 먹든가. 이겸이가 하루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했어. 조현준 시간 되려나.”

“나만 가면 되지, 걔는 왜.”

“나중에 알면 자기는 안 불렀다고 개지랄 떨 거 아냐. 그거 뒤끝 길어. 대충 물어보고 같이 와.”

우리 하루 또 삼촌들 보고 좋아서 잔뜩 웃고 땀에 머리 젖을 만큼 놀다가 쓰러져 자겠네. 생각만 해도 귀여워 침음한 권태정이 웃고 있는 백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애기가 예쁘면 너도 얼른 결혼해.”

“그게 쉬우면 진작 했지.”

“얼굴 괜찮고, 키도 크고, 연봉도 끝내주는데 뭐가 문제야? 하긴 너 같은 애 하나 또 있지. 조현준 그게 더 문제야. 걘 성격도 지랄나서 더 답이 없어.”

성격 얘기를 하며 고개를 젓는 권태정을 본 백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겸과 연애하고 결혼한 후에 성질이 많이 죽긴 했지만, 예전의 권태정 성격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다 오싹했다.

“연애나 결혼 생각 없으면 안 해도 상관 없다는 주의긴 한데 생각 있으면 얼른 해. 결혼하니까 진짜 좋아.”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다 좋아. 세상이 달라 보여. 이건 말로 표현 못 해.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그냥 태어날 때부터 결혼하고 태어날 걸 그랬단 생각도 들고.”

“…너만 태어나면 뭐해. 이겸 씨가 한참 뒤에 태어날 텐데.”

분위기를 깨는 백진우의 말에 권태정이 혀를 찼다. 왜 멀쩡하게 생겨서 연애를 못하는지 확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야, 진우야. 너 그래서 귀여움 받고 살겠어?”

“귀여움을 꼭 받아야 돼?”

“그럼. 우리 이겸이는 내가 너무 귀엽대.”

“…….”

“나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고 그래. 그러는 자기가 더 귀여우면서. 아, 우리 여보 보고 싶다.”

“……촬영 시작한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당도가 높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권태정을 보며 질렸단 듯 한숨을 내쉰 백진우가 시작되는 촬영에 앞을 바라보았다.

권태정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집중한 서정원에게 시선을 맞췄다. 달착지근한 사랑에 푹 빠져 있던 얼굴은 금세 사무적이고 냉철하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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