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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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다. 너무 좋아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여기가 어딘지 입술이 맞붙은지 얼마나 지났는지 그런 것도 알 수 없을 만큼.
그저 사랑이 너무나 간절했다. 머금고 또 머금으며 목 뒤로 삼켜도,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깊게 눈을 맞춰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그래서 점점 커지기만 하는 그 사랑이 조금이라도 서로를 더욱 물들일 수 있도록 애틋함과 뜨거움을 나누고 또 나눴다. 으슥한 골목 안으로 긴 노을이 번져 들어와 감은 두 눈 위를 발갛게 물들일 때까지.
* * *
“하루야, 아빠들 왔네.”
“압빠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링 끼우기 놀이를 하던 하루의 고개가 움직였다. 이겸과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권태정을 눈에 담은 하루가 동그란 나무 링을 손에 든 채 바동대다가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급히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하루야! 아빠 왔어.”
“빠빠!”
애지중지 들고 있던 빨간 링을 바닥에 버린 하루가 제법 빨라진 걸음을 옮겨 아장아장 이겸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완전히 쪼그리고 앉은 이겸이 그 자리에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웃는 이겸의 얼굴을 본 하루가 헤헤 웃으며 다가가 따뜻한 품에 폭 안겼다.
“우리 하루 잘 놀고 있었어요?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보고, 빠빠.”
“응, 우리 하루도 아빠 보고 싶었어?”
“보…시뻐.”
“너무 예뻐, 우리 하루.”
이겸과 하루의 귀여운 재회를 뒤에서 보던 권태정도 기다란 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그리고 이겸의 어깨 위에 놓인 작고 통통한 손을 잡아 흔들었다.
“하루야, 태정이 아빠도 왔는데.”
“빠빠!”
“응, 아빠도 안아 줘.”
이겸에게 안긴 채 권태정을 빤히 보던 하루가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권태정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 혹시라도 작은 몸이 아플까 두려워 최대한 살살 하루를 끌어안은 권태정이 예뻐 죽겠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하루야, 아빠가 까까 사 왔어. 우리 하루가 좋아하는 거.”
“까까!”
“응, 까까.”
이겸을 데리러 가기 전 시간이 조금 남아 백화점에 들러 하루에게 먹이는 것들을 엄선해서 산 권태정이 봉투를 흔들어 보여 주다가 하루가 좋아하는 딸기 맛 과자를 꺼내 안겨 주었다. 이제 봉지만 봐도 제가 좋아하는 과자인 걸 아는 하루가 봉지를 들고 까르륵 웃으며 흔들다가 다시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응, 뜯어 줄게.”
“까까, 까까!”
“까까 고맙습니다.”
봉지 위를 열어 과자 하나를 꺼내 손에 주자 두 손으로 과자를 받은 하루가 ‘고맙습니다.’ 말을 듣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과자를 받거나 원하는 걸 받을 땐 고맙습니다, 인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결과였다.
“우리 하루 인사도 잘하네. 잘했어.”
“자애!”
“응, 너무너무 잘했어.”
“뽀오.”
“아빠 뽀뽀.”
볼을 내어 주자 입술을 꾹 누른 하루가 저를 보고 있는 이겸에게도 다가가 똑같이 볼에 입술을 눌렀다.
“이겸아, 우리 하루 귀여워서 어떡하지.”
“실장님 닮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애교 있는 성격이 아닌데 실장님께서는 다정한 말씀도 잘하시고 부드러우시니까….”
“그럼 나도 귀여워?”
바닥에 버렸던 빨간 링을 엉거주춤 다리를 구부려 앉아 다시 주운 하루가 아장아장 소파로 가는 것을 보다가 이겸에게 시선을 돌린 권태정이 애교 부리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권태정이 정말 너무 귀여워 웃은 이겸이 권태정의 얼굴을 양손으로 누른 채 살살 문질렀다.
“그럼요. 너무 귀여워요.”
“그런데 우리 이겸이도 취하니까 애교 많던데.”
“…그, 그건 저 아니에요….”
“그럼 누구야? 이겸이 아니라 우리 여보가 애교가 많은가.”
“…저는 취했을 때 잠깐 그런 거지만… 실장님께서는 자주 귀여우시니까….”
권태정을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아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진심으로 한 이겸이 귀가 빨개진 채 몸을 일으켰다.
“부끄러워서 도망간다, 우리 자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손 씻으러 가는 거예요….”
“그런데 왜 혼자 가. 같이 가야지. 내 얼굴 봐 줘, 얼른. 어, 왜 눈 안 마주쳐 줘.”
뒤에서 안고 욕실로 가며 쪽, 쪽 귓가에 입 맞추는 권태정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린 이겸이 함께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앉아 노는 하루와 함께 저녁 먹기 전까지 실컷 놀아 주었다.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떼 한 번 쓰지 않고 이것저것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거실을 누비고 다니는 하루를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 오늘 강의 끝나고 카페에 갔었는데요. 개강총회 끝나고 실장님께서 데리러 오셨을 때 해수랑 몇 명 동기들이 실장님을 본 모양이에요.”
이겸의 말에 권태정은 그날 저와 눈이 마주쳤던 몇 명을 떠올렸다. 이겸이 취해서 다른 새끼한테 기대고 있는 걸 보자마자 질투가 치솟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모두에게 보이고 싶었다. 이겸의 옆엔 제가 있으니 넘볼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말라고 일종의 경고를 날린 셈이었다.
“애들이 실장님 맞는지 물어서 맞다고 했어요.”
“잘했어. 그랬더니 뭐래? 놀랐겠네.”
“네…. 많이 놀라고 정말 결혼한 거냐고 묻기도 하고, 하루 있는 것도 알아서 하루 사진도 몇 장 보여 줬어요.”
통통한 볼이 눌린 채 집중해 커다란 판에 자석 퍼즐을 붙이던 하루가 제 이름이 나오는 것에 고개를 돌려 이겸을 바라보았다.
“하루 까꿍.”
그림책을 들어 얼굴을 가린 이겸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반만 보이게 나타나자 그게 재밌는지 하루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없어졌네.”
“빠아!”
“까꿍.”
다시 얼굴을 가렸다가 옆으로 내밀자 또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얼마나 웃는 소리가 크고 귀여운지 식사 준비를 하던 여사님들도 나와 하루를 보며 같이 웃으실 정도였다.
“그럼 벌써 학교에 소문 쫙 났겠네. 나랑 결혼한 거.”
“애들이 비밀로 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 왜?”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런 소문 돌면 학교 다니기 피곤할 거라고… 자기들이 소문 낼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 줘서 고마웠어요.”
“의외네. 입 싸게 생겼던데. 뭐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학교 다니면서 괜히 그것 때문에 지나치게 관심 받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는 권태정을 물끄러미 보던 하루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하루의 앞으로 머리를 대 주었다. 작고 통통한 하루의 손이 조금 전 권태정이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처럼 권태정의 머리를 쓸었다.
“요즘 우리가 하는 거 다 따라 해. 내가 물 마시면 하루도 물 마시고, 내가 스트레칭하면 옆에 서서 몸 흔들흔들하고.”
“말이랑 행동 더 조심해야겠어요.”
“응, 나도 그 생각했어. 음, 이것도 따라 하나 볼까.”
하루가 보는 앞에서 이겸의 얼굴을 잡아 입술에 쪽 뽀뽀한 권태정이 자기도 하겠다고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하루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루도 뽀뽀할까?”
“뽀오.”
얼굴을 다시 대 주자 입을 조금 벌린 하루가 그대로 권태정의 뺨에 입을 꾹 눌렀다.
이겸은 침이 묻어 반들반들한 권태정의 얼굴을 웃으며 닦아 주고 그 위로 쪽 다시 뽀뽀해 주었다. 그렇게 조금 더 놀고 있자 하루의 저녁밥이 준비되어 아기 식탁에 놓였다.
“자, 하루 밥 먹자.”
“맘마!”
“응, 맘마 먹자.”
하루를 안아 아기 식탁에 앉힌 권태정이 턱받이를 해 주고 작은 식판을 가져와 앞에 놓았다. 오늘은 소고기 야채 볶음밥과 닭고기 소시지, 가지무침, 블루베리가 저녁 식단이었다. 권태정은 손잡이가 분홍색 토끼 모양으로 된 숟가락을 하루의 손에 쥐여 주었다.
“브루! 브루우.”
블루베리를 보자마자 그것부터 먹겠다고 손을 붕붕 젓는 하루에게 다른 숟가락으로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먹인 권태정이 눈을 맞춘 채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블루베리는 밥 다 먹고 먹자. 하루 배고프잖아.”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던 하루가 숟가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아기 소시지를 하나 들어 조금 베어 물었다. 그리고 약하게 간이 된 가지무침도 들어 입에 넣었다.
권태정은 밥을 다시 한 숟가락 떠서 그 숟가락을 하루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이번에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은 하루가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또 팔을 붕붕 흔들었다.
“우리 하루 밥 잘 먹네. 맛있어?”
“맘마, 맘마!”
“응, 맘마 맛있어. 천천히 먹자.”
아기 식탁 앞에 앉아 천천히 또 아주 다정하게 하루의 밥을 먹이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다가가 그 머리칼 위로 쪽 입을 맞췄다. 참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고 있던 그 이상으로 권태정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다정히 대하는 건 당연한 거라 말할 수도 있지만, 그 당연한 것조차 잘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기에 이겸은 권태정의 이 지치지 않는 다정한 표현이 참 좋았다. 그래서 저도 권태정처럼 마음 안에 잔뜩 있는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하려 애쓰게 되었다. 혼자 생각만 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보여 상대에게 전하는 게 더 좋다는 걸 권태정을 통해 알게 된 이유였다.
그래서 요즘 이겸은 사랑한다는 말도 더 자주 하게 되었고, 자잘한 애정 표현도 더 많이 하게 됐다. 이렇게 볼 때마다 뺨이나 입술,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거나 가볍게 몸을 끌어안는다거나. 그런 자잘한 스킨십이 늘어나니 권태정과 정말 수시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기분이 들어 너무나 좋았다.
꼭 엄청난 섹스가 아니어도 늘 달뜬 사랑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섹스 횟수가 줄거나 흥미가 떨어진 건 당연히 아니었다. 몸의 모든 곳이 달아오르며 서로를 느끼는 섹스는 여전히 이겸을 설레게 하고 들뜨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