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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 소년 외전-(17)화 (163/174)

외전 17화

아침에 저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면서 권태정이 했던 걱정 묻은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술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몸 회복에 공부까지 하느라 그걸 못해 걱정이라며 내내 취할 것 같으면 연락하라는 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그… 개강총회는 거의 다 참석하지? 뭐 진짜 못 갈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가지?’

안 갔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권태정은 웃으면서 친구도 만들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말해 주었다. 차에서 내려 가는 저를 끝까지 보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던 권태정의 얼굴이 술잔 안에 아른거렸다.

“…….”

실장님 보고 싶다…. 어제도 봤고, 오늘 아침에도 내내 봤는데 벌써 권태정이 잔뜩 보고 싶었다. 권태정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또 하루까지 떠올린 이겸이 작게 미소 지었다.

아마 지금쯤 퇴근한 권태정이 하루와 놀아 주고 있을 것이었다. 요즘 권태정은 퇴근을 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자기 직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저와 하루랑 함께 보냈다.

또 하루랑 얼마나 잘 놀아 주는지 권태정이 퇴근할 시간이 되어 문소리가 나면 하루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아장아장 걸어가 아빠, 아빠를 애타게 외칠 정도였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고 권태정이 들어오면 활짝 웃으며 안겨 들어 한참이나 애틋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형, 한 잔은 얼른 비우세요. 너무 느리게 마시면 괜히 시비 건다고 하더라구요. 저기 저 선배 성격 별로래요.”

“아….”

신해수가 가리키는 쪽을 본 이겸이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비를 걸고 다니는 선배를 보며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일렁이는 권태정과 하루를 마주하며 쌉싸름한 맥주를 삼켰다. 부디 얼른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권태정을 얼른 볼 수 있기를 바라며.

* * *

커다란 침대에 앉아 소리가 나는 동화책을 누르며 보고 있는 하루를 본 채 누운 권태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책을 꾹 누를 때마다 갖가지 동물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루야. 이겸이 아빠 술자리 갔어. 개강총회래.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런 티 안 내고 보내 줬어. 아빠 잘했지?”

통통한 볼이 아래로 눌리는 것도 잊은 채 집중해 책을 보던 하루가 고개를 들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자래?”

“정말? 아빠 잘한 거 맞아?”

“빠빠, 자래!”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이렇게 쓰담쓰담.”

하루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은 권태정이 곧 작은 손을 뻗어 조금 전 제가 한 것처럼 제 머리를 쓰다듬는 하루를 보며 웃음 지었다.

“아빠 보고 싶다, 그치.”

“아부! 압빠빠.”

“응, 우리 하루도 이겸이 아빠 보고 싶어?”

“압…빠, 까까.”

“까까 먹고 싶어? 까까 먹을까?”

“까까, 까까!”

손가락 크기 만한 아기용 딸기 맛 과자를 주자 좋은지 박수를 짝짝 친 하루가 오물오물 과자를 녹여 먹으며 방싯 웃었다.

“이겸이 보고 싶다….”

“뽀오.”

“아빠 뽀뽀해 줄 거야?”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내밀어 누운 권태정의 얼굴에 댔다가 뗀 하루가 다시 과자를 입에 넣었다.

“이겸이 아빠 술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하루 날 잡아서 술부터 제대로 알려 주는 건데. 남들 앞에서 취하면 어쩌지. 전에 고양이랑 술 마시고 취했을 때도 진짜 예쁘고 귀엽고 혼자 다 했는데…. 오늘도 취해서 막 다른 놈 보고 웃으면 어쩌지. 아니, 당연히 웃겠지. 우리 이겸이는 착하니까. 마음도 따뜻하고 다정하니까 누가 재미 더럽게 없는 농담 하나만 해도 웃어 주겠지.

“…….”

씨발. 왜 남이 우리 이겸이 예쁜 걸 다 알아야 하지. 내 건데.

“…하.”

“하?”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것까지 따라 하는 하루의 목소리에 놀란 권태정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하루 해 봐. 하, 루.”

“하우.”

“하, 루.”

“하…우.”

“잘했어, 우리 하루. 까까 먹어. 아빠 한숨 안 쉴게.”

다시 먹는 것에 집중하는 하루의 등을 쓰다듬던 권태정이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몸을 확 일으켜 앉았다.

“…하루야, 아빠다.”

화면에 뜬 ‘자기♥’라는 이름에 흥분한 권태정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자기야.”

-실장니임….

목소리만 들어도 이겸이 꽤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권태정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대충 걸칠 겉옷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리고 과자와 손가락까지 입에 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하루를 내려다보았다.

-저 좀 뒤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들 취해서어….

“이겸아, 지금 갈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아까 거기 우라노스랬지? 밤이라 안 막혀서 30분이면 가.

-네에…. 보고 싶어요, 실장니임….

“응, 나도 보고 싶어. 지금 얼른 갈게. 사랑해.”

길게 늘어지는 대답을 듣자마자 침대에 있는 하루를 안아 든 권태정이 방을 나섰다.

“하루야, 아빠 이겸이 아빠 데리러 가야 하니까 우리 거실에 가 보자.”

다행히 거실에는 권기정과 아버지가 차를 마시며 장기를 두고 있었다. 권태정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품에 하루를 앉혔다.

“아빠 저 이겸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하루 좀 봐주세요.”

“아, 오늘 이겸이 학교 모임이랬지. 조심히 데려와. 운전 조심하고.”

“네, 다녀올게요.”

급히 현관으로 가려던 권태정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차키를 놓고 왔다는 걸 알고 얼른 다시 방으로 들어가 키를 챙겼다.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이러다가 일이라도 칠 것 같아 심호흡을 하며 다시 거실로 나가는데 할아버지를 보며 까르륵 웃는 하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하루 오늘은 할아버지랑 놀다가 잘까요?”

“하부, 하부.”

“어이구, 예뻐라. 응, 할아버지, 여기 있어요.”

자식들에게 늘 다정하고 좋은 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어 당황스러우면서도 제 아들을 저렇게 사랑해 주는 아버지가 참 고맙고 좋았다. 권태정은 방싯방싯 잘도 웃는 하루와 아버지를 눈에 담다가 얼른 차고로 가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그토록 보고 싶었고, 여전히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저의 이겸을 향해.

한국대학교 앞 우라노스라는 가게를 찾은 권태정은 길에 차를 대고 가게로 다가가며 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분명히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되지 않는 것에 불안감이 차오를 때쯤 가게 안에서 몇몇이 뭉쳐 나오는 게 보였다. 무감각한 눈으로 얼굴을 살피던 권태정은 가게 안쪽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뭔가를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겸아.”

혼자 서 있는 게 힘든지 누군가가 이겸을 부축하고 있었다. 권태정은 조금의 머뭇댐도 없이 그 누군가에게서 이겸을 빼앗았다. 빼앗았다는 말이 아니면 설명할 게 없는 행동이었다.

“누구…. 어…!”

갑자기 이겸을 빼앗기고 놀란 누군가와 눈을 맞춘 권태정이 저를 알아라도 보는 건지 눈이 커지는 상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겸이 데리러 왔는데.”

“아…. 아는 사이…세요?”

“네.”

가족이고 부부고 남편이라고 말하려던 권태정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저의 등장으로 지금 이 상황을 본 몇몇은 제가 이겸과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었다. 굳이 제가 떠들지 않아도 소문이 날 거라는 말이었다. 그 소문이 이겸에게 나쁘게 작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관계를 대놓고 드러낸 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데려가도 될까요.”

“아, 네! 네, 그럼요. 아, 안녕히 가세요….”

“네. 그럼.”

인사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겸이 볼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해 성질을 누르고 고개를 숙여 점잖게 인사한 권태정이 단단히 이겸을 품에 기대게 한 채 가게를 나섰다.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그딴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혼 이후 관계를 숨기려 한 적도 없고 늘 이겸과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며 데이트를 해 왔었다. 결혼한 게 죄도 아니고, 사랑하는 걸 드러내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늘 당당했다. 그건 이겸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사람들이 알게 됐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자기이?”

품에 얼굴을 비비던 이겸의 고개가 들렸다. 권태정은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에게 시선을 다정히 떨어뜨렸다. 저를 자기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취해서 이렇게 귀엽게 부르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심장이 사정없이 떨렸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그럼요…. 우리 실장니임…. 자기….”

더 깊게 안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겸에게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이겸을 데리고 차로 가 조수석에 태웠다. 안전벨트를 채워 주고, 가는 동안 편하게 의자를 뒤로 조금 눕혀 주는 동안에도 이겸은 자꾸만 권태정을 불렀다.

“자기야, 술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나?”

겨우 운전석으로 오른 권태정은 또 제가 말할 때면 얌전히 이야기를 듣는 이겸의 얼굴에서 하루를 발견했다. 딸기 맛 과자를 먹으면서 커다란 눈으로 제가 하는 말을 듣던 얼굴과 겹쳐져 너무 귀여웠다.

“많이…. 음, 너무 빨리 마셔서….”

“어떤 새끼가 우리 자기한테 술을 그렇게 빨리 많이 줬어? 이름 말해 봐. 학교 그만 다니게 할 테니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데 장난으로 들은 건지 또 말갛게 웃는 얼굴이 마음 아플 만큼 예뻤다. 권태정은 술기운이 묻어 분홍빛이 된 이겸의 눈가와 뺨을 살살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은 본가로 가지 않고 둘이 살던 집에 가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내일이 주말이기도 하니 이겸을 푹 쉬게 한 다음에 집에 가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베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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