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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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다 같이 퇴근한 거예요? 유정이랑 기정이는 요즘 안 바빠? 그동안은 일하느라 그렇게 바쁘더니.”
“바쁘죠. 바쁜데 우리 삐약이 얼굴이 막 아른거려서 회사에서 일 못하겠어요. 이따 집에서도 좀 하고, 내일 일찍 가서 하려구요.”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을 보고도 울지 않고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 구경하는 삐약이를 보며 권유정이 앓는 소리를 길게 냈다. 권기정도 들어온 순간부터 삐약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미 삐약이를 안을 수 있게 손을 씻으러 들어가신 뒤였다.
“이겸 씨, 태정이는?”
“직접 참석해야 하는 미팅이 있으셔서 서재에 계세요.”
“아, 맞다. 오늘 화상으로 뭐 한 댔지.”
“네에, 아까 곧 끝날 것 같다고 톡 주셨어요. 곧 나오실 거예요.”
“우리 삐약이 보고 싶어서 회의는 어떻게 하나 몰라.”
방긋 웃는 삐약이를 보며 입으로 어르는 소리를 낸 권유정이 활짝 웃었다.
“아, 아버지가 삐약이 이름 지어 오셨다던데.”
“드디어 우리 손자 이름 생기는 거야? 삐약이도 너무 귀여운데.”
둥실둥실 살살 팔을 움직여 주자 삐약이가 또 배냇웃음을 지었다. 이겸은 보들보들한 삐약이의 볼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행복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마음을 잔뜩 느꼈다. 삐약이가 모두에게 잔뜩 사랑받는 걸 보고 느낄 때마다 정말 더 바랄 게 없이 행복해지곤 했다.
“얼른 옷 갈아입고 손 씻고 올게. 우리 조카 얼른 안고 싶어. 기정아, 너도 빨리 씻고 나와. 안 그러면 아버지한테 삐약이 뺏겨서 안아 보지도 못해.”
권기정의 어깨를 두드린 권유정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권기정도 얼른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평소의 여유가 가득한 모습과는 달리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이겸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많은 가족과의 삶은 이겸의 상상보다도 훨씬 더 따뜻하고 즐거웠다. 이렇게 하루 종일 웃음 속에 파묻힐 만큼.
아버지가 아주 유명한 작명가에게 받아 온 이름은 ‘하루’였다. 크게 이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을 듣기 전에도 이겸은 하루라는 이름이 무척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겸아, 넌 이름 어때?”
“전 마음에 들어요. 하루…. 권하루. 너무 흔한 이름도 아니고, 또 의미도 좋고…. 우리 삐약이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실장님은 어떠세요?”
“나도 마음에 들어. 하루. 그럼 하루로 할까?”
“네, 좋아요.”
아빠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하루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겸은 가족의 품에서 울지도 않고 또랑또랑한 눈을 한 채 노는 하루를 보며 권태정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난 안아 볼 틈이 없네. 우리 삐약이…. 아니, 우리 하루 벌써 저렇게 인기 많아서 어쩌지.”
“아버지 힘드실 것 같아요. 가벼워도 오래 안고 계시면 팔 아프실 텐데….”
“자기야, 난 우리 아빠 저렇게 계속 웃고만 계신 거 진짜 오랜만에 봐. 팔 아픈 건 느끼지도 못하실걸.”
하루에게 향해 있는 여러 개의 다정한 시선이 이겸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겸은 하루를 보다가 완전히 저를 향해 시선과 몸을 다 돌려 바라보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난 우리 애기 봐야지. 아까 강의는 잘 들었어? 요즘 매일 몇 개씩 듣던데 힘들진 않아?”
“처음에는 조금 어렵기도 하고 했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저 아까 모의고사 풀어 봤는데 별로 안 틀려서… 기분 너무 좋았어요.”
“우리 자기는 어떻게 공부도 잘해? 세상 너무 혼자 사는 거 아냐? 얼굴 예뻐, 성격 천사야. 거기다가….”
손을 꼽아 말하던 권태정이 하루에게 빠져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 가족들을 흘끗 보곤 더 은밀하게 이겸에게 소곤댔다.
“몸도 야하게 타고났지, 페로몬 향도 복숭아 향에 또 나오는 물까지 다 맛있고, 또….”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왜, 진짠데.”
혹시라도 가족이 들었을까 싶어 하얗게 질려 눈치를 살핀 이겸이 다시 권태정을 보며 어깨를 아프지 않게 밀었다.
“억울해, 진짠데.”
“…지, 진짜여도… 그런 건… 좀….”
“둘이 있을 땐 해도 돼?”
“…진짜 둘이 있을 때만요…. 하루도 없이 실장님이랑 저랑 정말 둘만 있을 때….”
“하루가 있는데 잘 때는?”
곰곰 생각하던 이겸이 된다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허락해 줄 일도 아니지만, 권태정이 꽤 진지해서 이겸도 덩달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뽀뽀.”
권태정의 입술이 살짝 앞으로 나와 이겸의 뽀뽀를 기다렸다. 이겸은 그런 귀여운 발음의 말은 절대 안 하게 생긴 얼굴로 간지러운 말을 참 잘하는 권태정이 좋았다. 그래서 권태정이 뽀뽀를 해 달라거나 안아 달라고 팔을 벌릴 때면 늘 홀린 듯 다가가 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너무 좋아서 그냥 다 해 주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뽀뽀.”
모두가 하루를 보는 사이 권태정의 얼굴을 잡고 살짝 입 맞춘 이겸이 다시 확 다가와 깊게 입술을 마주 무는 권태정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제 여기서 더 하는 건 안 된다고 말을 하려는데 다시 다가오는 권태정의 얼굴 옆으로 권유정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둘이 막 뽀뽀해요.”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저은 이겸이 옆에서 웃기만 하는 권태정의 팔을 흔들었다. 얼른 아니라고 도와도 모자랄 상황에 권태정은 괜찮다며 다시 이겸의 뺨에 깊게 입 맞췄다.
“저희 잠깐 산책 다녀올게요. 삐약이는 들어와서 저희가 씻겨 재울게요.”
“아빠 다녀오세요, 해야지.”
하루의 작은 손을 잡아 인사하는 것처럼 흔든 권태정의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같이 들리는 크고 작은 웃음소리 사이로 권태정이 여전히 새빨간 이겸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내가 겉에 걸칠 거 가져올게. 아직 밤엔 쌀쌀해.”
삐약이와 함께 지내는 1층 안쪽 커다란 방으로 들어간 권태정이 곧 이겸이 걸칠 도톰한 겉옷을 가지고 나와 입혀 주었다.
“아, 예쁘다.”
권태정은 이제야 붉은 기가 가라앉은 이겸의 얼굴을 보며 웃음 짓곤 손을 꼭 쥐었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춥지 않아?”
얼굴에 닿는 공기가 마냥 따뜻하진 않지만, 그래도 적당히 서늘한 3월의 공기가 좋았다. 이겸은 고개를 저으며 권태정의 팔을 끌어안았다.
“안 춥고 딱 좋아요.”
“내년 이맘때쯤엔 우리 이겸이 대학 다니고 있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성적도 잘 나오잖아. 그때 그 선생이랑 좀 더 해 볼래? 따로 봐 줄 수 있다던데.”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럼. 내가 내일 스케줄 물어볼게.”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집 안에 있는 정원을 지나 대문 바깥으로 나서며 권태정의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내년 3월에는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고 챙겨 주는 권태정을 위해서라도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루도 무사히 만났고, 모두가 저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이젠 정말 저만 더 잘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그런데 좀 걱정이 되긴 해. 대학 갔는데 너무 재밌어서 나보다 친구랑 노는 게 더 재밌어지면 어떡해.”
“절대 안 그래요.”
“생각해 보면 그럴 나이잖아. 이십 대 초반에는 딱 그때만 재밌는 게 많기도 하고.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음, 웃기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별걱정을 사서 다 하고.”
말을 하고도 좀 부끄러운지 괜히 뱉은 소리를 없애듯 흐트러뜨리는 권태정의 팔을 더 꼭 끌어안은 이겸이 작게 입을 열었다.
“재밌는 게 아무리 많이 생겨도 저한테는 언제나 실장님이 제일 먼저예요. 그건 절대 안 변해요. 제일 중요하고, 또 좋아하고…. 또오….”
“…….”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전 실장님이랑 있는 게 제일 재밌고 좋아요.”
“그럼 뽀뽀.”
아무도 없는 골목을 확인한 뒤 이겸은 저를 향해 내려오는 권태정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어둡지만, 가로등 불빛으로 반짝이는 골목 안으로 간지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원 옆에 있는 카페 가서 따뜻한 거 마실까?”
“네에…. 밀크티 마시고 싶어요.”
“난 핫초코. 갑자기 우리 자기가 만들어 줬던 게 생각나네. 누가 만들어 주든 그것보단 맛 없겠지만.”
“제가 내일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그럼 오늘은 나도 밀크티 마셔야겠다.”
따뜻하게 입혔는데도 혹시 추울까 싶어 이겸의 어깨를 감싼 권태정이 팔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게 참 따뜻하고 좋아 품으로 안기듯 더욱 기댄 이겸이 권태정을 안은 채 함께 걸음을 옮겼다. 달콤하고 따뜻한 사람과 달콤하고 따뜻한 곳을 향해.
이겸의 대학 합격 발표가 나던 날, 권태정은 반차를 쓰고 오전 10시를 기다렸다. 수능을 잘 봤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기에 합격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그 기쁜 순간을 이겸과 함께하고 싶어 출근도 미룬 채 초조한 얼굴로 방을 돌아다녔다.
아기 침대에서 애착 병아리 인형을 안은 채 권태정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하루가 재밌는지 방긋 웃음 지었다.
“빠빠.”
“하루야. 이겸이 아빠 대학 발표 곧 나는데 너무 떨려. 어떡하지.”
저를 보고 웃는 하루에게 다가간 권태정이 하루를 안아 침대 바깥으로 내려 주었다. 통통한 다리로 선 하루가 병아리 인형을 안은 채 아장아장 방을 걸어다녔다.
“당연히 합격할 거 아는데 왜 이렇게 떨리지…. 우리 하루는 안 떨려? 하루야. 이리 와서 아빠 안아 주세요.”
이름을 부르는 것에 권태정을 돌아본 하루가 방향을 바꿔 다시 아장아장 걸었다. 중간에 한 번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병아리 인형까지 주워 안고 다시 권태정에게 다가왔다. 요즘 하루는 말귀를 제법 알아듣기도 하고, 종일 옹알이를 하며 대화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