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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 소년 외전-(9)화 (155/174)

외전 9화

늘 상냥하고 좋은 권태정의 누나와 함께 본가로 간 이겸은 아주 멋진 저녁 식사를 했다. 2주나 3주에 한 번씩은 만나지만, 그래도 매일 보는 건 아니니 볼 때마다 너무나 반갑고 좋은 어머님, 아버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알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요즘 태정이가 바빠서 우리 아가 혼자 집에 오래 있을 텐데 무섭지는 않아?”

“낮에는 괜찮은데 밤이나 새벽에는 조금 무서울 때가 있어요. 2층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고….”

“그럼 뭔지 알아. 나도 전에 유정이 아빠는 출장 가고, 애들은 다 일 있어서 늦게 들어올 때 조용한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더라구. 시계 소리도 크게 나는 것 같고, 창 흔들리는 소리도 꼭 누가 흔들어서 나는 소리 같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은 어머님이 이제는 손을 잡고 토닥여 주었다. 그 온기가 좋아 이겸이 생긋 웃음 지었다.

“아직 삐약이 나올 때는 안 됐지만, 그래도 혼자 두기 걱정돼. 태정이도 많이 걱정하더라. 중요한 일이라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 닷새만 참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저는 그래도 집에서 편히 공부도 하고, 밥도 잘 먹고 하는데 실장님께서는 종일 바쁘게 일하시면서 끼니도 못 챙기시는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에요.”

“우리 아가 착하기도 하지. 이러니까 태정이가 종일 이겸이가 눈에 밟혀서 걱정에 또 걱정이지.”

맛있는 복숭아 무스를 한 입 먹은 이겸이 저를 보는 아버님과 눈을 맞췄다. 권태정 못지않게 저를 잘 챙겨 주시고, 늘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해 주셔서 요즘 들어 권태정과 정말 닮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태정이 녀석 이번 일만 잘 끝내면 한동안은 시간 널널할 거야. 삐약이 태어나기 전에 바쁜 일 다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무리해서 저렇게 다 처리하는 거고.”

“아….”

“그 녀석 자리가 워낙 회사 내에서도 중요한 자리라 오래 쉬는 건 힘들지만, 우리 손주 태어나면 몇 달은 집에 붙어 있게 해 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에…. 감사합니다, 아버님.”

워낙 큰 회사라 당연히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권태정이 삐약이가 태어나기 전에 바쁜 일을 모두 끝내고 싶어 이렇게 무리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라 마음이 아플 만큼 꽉 조였다. 당장 권태정이 보고 싶어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아가, 이겸아.”

“네, 어머님.”

“삐약이 태어나면 몇 달이라도 여기 와 있는 게 어때? 아기 낳고 몇 달은 몸도 챙겨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일 도와주는 여사님들도 계시고, 늘 집에 사람들 있으니까 아기 보기도 더 쉬울 거고.”

“아…. 저야 너무 좋은데…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불편하긴. 우리 첫 손주인데 매일 보고 너무 좋지. 우리 이겸이 곁에서 챙겨 줄 수도 있고. 우리 이겸이 엄마, 아빠 막내잖아. 늘 챙겨 주고 싶은데 혹시 부담스러울까 봐 걱정이었거든.”

어머님의 말씀에 이겸은 얼른 들고 있던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제 손을 쥔 따뜻한 손 위를 감싸 쥐었다.

“아니에요, 부담은요…. 전 너무너무 좋아요. 부모님이랑 산 기억이 많이 없어서… 저는 늘 두 분이랑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더 자주 뵙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데….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릴까 봐 걱정이었어요.”

“어머,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착해서 우리 생각부터 하느라 그랬구나.”

이겸의 머리칼을 쓸어 준 어머님이 정말 막내아들을 품에 안 듯 이겸을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이겸도 가만히 팔을 둘러 안은 채 웃음 지었다.

“아이 낳고 혼자 있으면 속상해. 태정이가 같이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옆에서 몸 건강하게 회복했으면 좋겠어.”

“네에…. 전 너무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권유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와, 그럼 삐약이 태어나면 매일 볼 수 있는 거네요?”

“그렇지. 얼마나 예쁠까.”

“전 지금도 우리 조카 만날 날만 기다리잖아요. 진짜 얼마나 예쁠까. 이제 볼 날 정말 얼마 안 남았네요. 아, 기대된다.”

“유정이 넌 삐약이 태어나기도 전에 조카 바보 된 거야?”

“그러니까요. 미치겠어요. 초음파 사진만 봐도 예쁘다니까요.”

권유정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거실로 번졌다. 이겸도 웃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권태정이 보고 싶은 것만 빼면 정말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권태정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지 벌써 엿새째였다. 본가로 저를 데리러 온 날 집에 가기 전에 잠깐, 그리고 집에 가서 잠들기 전에 잠깐 보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얼굴을 본 시간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깨어 있으려 노력했지만, 권태정이 씻는 사이 잠이 들어 버렸고, 눈을 떴을 때는 또다시 아침이었다. 당연히 권태정은 출근을 하고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비슷한 패턴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새벽같이 나가 또다시 새벽에 들어오는 권태정의 얼굴을 편히 감상할 날이 없었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던 일이고 딱 일주일이라고 미리 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니 당연히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일주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이겸을 속상하게 했다. 이런 일에 속상하다는 걸 이해할 수 없고, 너무 어른스럽지 못한 감정이라 생각해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드디어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 결전의 날이랬으니 오늘 밤만 버티면 드디어 권태정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이겸은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보고 문제집을 덮었다. 오늘은 공부도 잘 집중이 되지 않아 더 붙잡고 있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양치질을 하고 침실로 간 이겸은 침대에 누워 권태정과 함께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참으면 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감정이 요동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해…. 너무 보고 싶어….

사진 속 웃고 있는 권태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참을 틈도 없이 눈물이 왈칵 넘쳤다. 이겸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니 더 감정이 밀려드는 것만 같아 휴대폰을 내린 이겸이 눈을 감았다. 얼른 잠이라도 들어 권태정이 없는 마지막 밤을 넘기고 싶었다.

“…….”

하지만 잠이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번 권태정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마음은 쉴 새 없이 이겸에게 권태정의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함께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몸을 붙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늘 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던 권태정을 떠올리니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머리를 쓰다듬고, 배를 만져 주면서 삐약이에게 이런저런 다정한 이야기를 전하던 것도 떠오르고 잠들기 직전까지 제 눈을 보며 사랑을 속삭여 주던 따뜻한 목소리도 떠올랐다. 이겸은 몸을 돌려 비어 있는 제 옆자리, 권태정의 자리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방에서 나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세탁실이었다. 세탁기 옆에 놓인 빨래 바구니에서 아직 빨지 않은 권태정의 티셔츠를 집어 든 이겸이 거기 배어 있는 그의 체향과 페로몬 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울렁이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

더, 더 권태정이 필요했다. 이겸은 권태정에게 갇히고 싶었다. 쏟아지는 그의 페로몬 안에서 잠들고 싶었다. 빨래 바구니 안에서 권태정이 아침에 쓰고 넣어 둔 것 같은 수건과 바지까지 집은 이겸이 품에 안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이것으로는 부족해 권태정이 바르는 스킨로션과 그가 쓰는 샤워 가운, 페로몬 향이 묻어 있는 홈웨어, 운동복까지 가지고 온 이겸이 침대 위에 권태정의 물건들을 잔뜩 올려 두었다. 그리고 옷장 안에 갇혀 있는 슈트와 재킷 같은 겉옷도 잔뜩 가지고 와 누울 자리 옆으로 놓았다.

“…또….”

마지막으로 권태정이 집에서 나가기 전에 한 번씩 뿌리는 향수를 가지고 와 제가 눕는 자리에 뿌린 이겸이 향수병까지 베개 옆에 놓은 채 물건들 가운데에 비어 있는 저의 자리로 올랐다.

권태정이 전해 주는 페로몬이나 체향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평소 권태정이 입고 쓰는 물건 사이에 있으니 불안함과 비슷한 마음의 울렁임이 조금 잦아들었다. 이겸은 오늘 아침 권태정이 벗어 둔 티셔츠를 잡아 입술을 묻었다.

“…….”

아침까지 입고 있었던 옷이어서 그런지 권태정의 체향이 가장 짙게 묻어 있어 좋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꼭 권태정이 곁에 있는 것처럼 안정감이 밀려들었다.

“하아….”

몸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체향에 떨리는 숨을 내쉰 이겸이 몸을 움츠렸다. 권태정이 쓰는 향수까지 뿌려 그런지 정말 그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권태정의 마른 장미향이 몸 안으로 퍼지고, 그가 쓰는 날카로우면서도 잔향에서 포근함이 느껴지는 향수 향까지 더해져 정말 권태정이 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쉬면 들이쉴수록 이겸이 묘한 흥분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꼬옥 감은 눈에서 눈물이 번졌다. 속눈썹을 축축하게 적신 눈물은 곧 묘하게 달아오른 이겸의 뺨을 톡 두드리며 떨어졌다. 다물린 허벅지에 괜히 더 힘이 들어가고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배를 숨기며 몸을 더 동그랗게 말았다. 이겸은 제가 느끼는 이 울렁임이 삐약이의 태동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태동이 주는 울렁임과 권태정이 주는 울렁임은 명백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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