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46화 (146/174)

#146

결혼식 당일 기자들이 호텔 앞으로 몰려들었지만, 권태정은 그들에게 조금의 정보도 주지 않았다. 자극적으로 기사를 써 댈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제 와서 식 사진 하나만 제공해 달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이겸을 집에 가둬만 두지는 않을 테니 저와 같이 다니는 것을 앞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었다. 이겸과 함께 가고 싶은 것도 또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그런 과정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하지만, 포토라인을 두고 거기 나란히 서서 얼굴을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보기도 아까운 이겸의 얼굴을 남들에게 공개해야 하는지 단 하나의 이유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겸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얼굴과 머리를 만져 줄 사람과 예복 담당을 전부 호텔로 부른 덕분에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예식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권태정은 이겸의 옆에 앉아 스태프에게 머리를 맡긴 채 내내 거울로 이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전문가에게 화장을 받고, 헤어스타일링을 맡기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이겸은 무척 긴장이 되어 보였다. 허리를 쫙 펴고 두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모아 앉은 게 얼마나 귀여운지 그냥 보는 것뿐인데도 자꾸 의자가 이겸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피부가 어쩜 이렇게 좋으세요. 베이스를 바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얗고 잡티 하나가 없으세요. 결도 너무 좋고.”

"...아.... 감사합니다아..…."

"정말 얇게 한 겹만 바르고 색 있는 립밤 정도 톡톡하면 끝나겠어요.”

화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스태프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벌써 헤어스타일링까지 마치고 고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유려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잘생겨서 오늘도 역시 넋을 놓게 됐다.

"이겸아, 나 잘생겼어?"

"네…. 너무너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사랑스럽다는 듯 본 권태정이 아예 의자를 돌려 이겸의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이 예쁜 애가 두 시간 뒤에 완전히 저와 가족이 된다는 게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태어나 이렇게 긴 두 시간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우리 이겸이는 어떻게 매일 예뻐. 지금이라도 하객 다 없앨까? 이 예쁜 얼굴 나만 보고 싶은데."

농담으로 들었는지 이겸의 스타일을 봐 주던 직원이 두 분 너무 보기 좋다며 웃음 지었다. 권태정은 눈동자만 움직여 농담이 아닌데 농담처럼 만들어 버린 직원을 잠시 날카롭게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좋은 날이니 굳이 타인과 트러블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가족들 오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준비 다 하고 식장 보러 가자. 얼마나 예쁜지 궁금해."

"네에, 좋아요.”

예쁘게 만진 머리를 고정하는 동안 이겸은 옷을 갈아입었다. 권태정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옷 입는 걸 도와주는 건 또 처음이라 무척 어색했지만, 그래도 빨리 옷을 갈아입고 권태정과 함께 식장을 구경하러 갈 생각에 얌전히 서서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아…. 네. 없어요."

"혹시라도 식 시작 전에 불편한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아…"

친절한 직원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이겸이 저에게 다가오는 권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복을 이것저것 입어 보면서 고를 때도 느낀 거지만, 키가 무척 크고 비율이 좋은 데다가 골격까지 멋진 권태정은 슈트가 정말 잘 어울렸다.

"와아….”

"나 또 멋있어?"

"네에…. 너무너무 멋있어요…. 실장님."

“결혼하는 날인데 실장님이야?"

“…자기… 라고 부르면 실장님이.… 어... 그러신다고 해서요….”

자기라고 부르면 꼴린다는 말을 기억하고 어쩔 줄 모르는 이겸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권태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뭐라 그랬지?"

“..…어제… 입장 연습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제가 자기라고 하니까 실장님이..."

"응, 내가.”

“..…자기라는 말 들을 때마다… 그, 그러신다고… 해서 결혼식 끝나면 다시 부르기로 했는데에….”

어떻게든 권태정이 지난밤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려 열심히 설명한 이겸이 제발 알아 달라는 눈으로 간절히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어도 더는 칠 수가 없는 그런 눈이라 그만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 맞아. 그랬지. 하마터면 식 전에 꼴릴 뻔했네."

알아들어 다행이라는 듯 웃는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권태정은 당장이라도 이겸을 흐트러뜨리고 싶었지만, 오늘이 결혼식이라는 걸 애써 상기하며 알파의 본능을 짓눌렀다.

예쁜데 당장 예뻐할 수 없는 것과 사랑스러운데 당장 물고 빨 수 없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차라리 스물둘 철부지였다면 그냥 앞 뒤 생각 안 하고 달려들었을 텐데 저는 이 모든 상황을 아름답게 지켜 이겸에게 안겨 줘야 할 서른둘이었다. 그래서 서른둘의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자기야. 그리본은 뭐야? 전에 이건 못 본 것 같은데."

"아…. 이것까지 하는 게 더 예쁠 것 같다고 해 주셨어요."

"하…. 미치겠네.”

"이상하면 뺄까요?"

아주 약하게 핑크빛이 도는 부드러운 색의 예복을 입고, 목에 리본 장식까지 단 이겸은 권태정의 서른둘 인내심을 자꾸만 무력화했다. 그냥 예복만 입은 걸 봤을 때도 미치게 예뻤는데 거기에 리본 장식까지 달고 있으니 너무 좋아 자꾸만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권태정은 이제 정말 욕을 끊어야 할 때라 생각하며 좋은 말로 상황을 표현하려 애썼다.

“예쁜데 왜. 이상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물어본 거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예쁠 수가 있나 해서."

"잘 어울린다면 다행이에요."

"어울리는 정도가 아닌데. 미치겠다. 잠깐만... 이겸아. 못 참겠어."

이겸의 손을 잡고 준비실 안쪽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촉촉한 입술에 가볍게 쪽, 쪽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듯 머금고 빨아 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애가 탔다.

"혀 조금만 내밀어 봐."

권태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고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도 알기에 이겸은 달아오른 얼굴로 살짝 혀끝을 내밀었다. 곧 입술 바깥에서 열이 오른 혀끝이 살살 마주 문질렸다.

"...으응...."

“…하….”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더 애가 타고 이제 아랫배까지 저릿해지는 것에 권태정은 그 작은 혀끝을 쪼옥 빨며 뒤로 물러났다. 이겸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키스하고 싶어 미치겠어."

“...저도... 하고 싶어요...”

“식 끝나면 계속해 줄게. 이렇게 다 세팅해 줬는데 망치면 안 되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까치발을 들었다. 저에게 닿고파 올라오는 이겸을 보며 몸을 숙인 권태정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향긋함이 웃음 지었다. 이겸의 뽀뽀 하나로도 몇 시간은 꾹 참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나면…. 많이 많이 해주세요."

"진짜 내 기준으로 많이 많이 해도 돼?"

"네, 많이 많이."

아, 진짜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애가 나왔지. 새삼 감탄한 권태정이 이겸의 손을 잡고 어둑한 준비실 안쪽에서 벗어났다. 오늘 이겸은 이런 어두운 곳에 있으면 안 됐다. 가장 예쁜 빛이 쏟아지고, 또 가장 향긋한 곳에 있어야 했다.

“식장 어떻게 꾸며졌을지 궁금하지."

“네, 저번에 다른 결혼식 사진 보여 주신 것만 봐도 너무너무 예뻤는데…. 아….”

권태정과 식장 앞까지 간 이겸은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환하고 화사한 내부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초록색의 예쁜 나무와 꽃들로 꾸며진 길은 꼭 동화에 나올 것처럼 예뻤다. 태어나 이렇게 예쁜 곳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음에 들어?"

"...너무 너무너무 예뻐요."

식장 안에 있는 꽃과 나무에서 눈을 못 떼는 이겸을 보고 안도한 권태정이 그 뒤에 서서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푸릇하기도 하고 또 화사하기도 한 식장이 제 마음에도 쏙 들었다. 역시 최고의 식장에서 돈 따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최고로 우아하고 예쁘게 꾸며 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디자인을 보며 조율한 보람이 있었다.

“세상 제일 예쁜 날 만들어 줄 거야."

"......"

"언제 떠올려도 웃음 나고, 이겸이 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날.”

제 배 위로 단단히 놓인 권태정의 손을 쥔 이겸이 고개를 돌리며 웃음 지었다. 너무너무 행복한데 이 행복을 어떻게 권태정에게 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행복하다는 단순한 말로 표현하기에는 마음이 너무나도 컸다.

"이따 어제 연습한 대로 이 길 걷는 거야. 아, 생각만 해도 좋다.”

마음이 너무나 벅차올라 계속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권태정의 손을 더 꼬옥 힘주어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라 도 말을 꺼내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겸은 겨우 고개를 다시 돌려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꾹 참아야만 했다.

"신기해. 우리 자기 아무 말도 못 하는데 왜 난 다 대답이 들리지."

"......"

"응, 나도 사랑해."

씩 웃고 이겸을 안은 권태정이 귓가에 입술을 댄 채 한참이나 더 행복을 속삭였다. 벅차오른 행복이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번져 이겸의 입술을 물들일 때까지.

***

이겸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식장처럼 예쁘게 꽃으로 꾸며진 대기실에 앉아 저를 보러 온 형들을 맞았다. 늘 편안한 옷을 입고 일하던 것만 보다가 멀끔히 차려입은 강지훈과 유재민을 보니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야, 이겸아. 너 진짜 존나 성공했다. 인생역전 개쩔어.”

"야, 넌 지금 결혼하는 애한테 그게 할 말이냐?"

"아, 내가 뭐 욕한 것도 아닌데 지랄이야."

"그게 욕이야. 야, 이겸아. 쟤 말은 무시해."

티격태격하던 강지훈과 유재민은 대기실 안으로 울리는 다른 발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권태정을 멍하니 올려다 보며 놀라 입을 벌렸다.

"어, 개랑 고양이 왔네."

"아,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선 강지훈과 유재민이 권태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의 평소 모습을 아는 권태정은 됐다는 듯 가볍게 두 사람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인사는 됐고, 이겸이 축하하러 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죠! 이겸이랑 같이 알바도 오래 했고, 또 이럴 때 돕는 거잖아요!"

"그동안 이겸이한테 잘해줘서 고마워. 잊지 않고 기억할게. 음, 뭐 이제 바를 같이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잘해 줘. 너희한텐 내가 잘할 테니까. 물론 너희가 좋아하는 물질적으로"

"와…. 형님, 진짜 개멋있어요."

딱 그 또래 애들이나 할 만한 말에 웃은 권태정이 이겸의 옆에 서라며 손짓 했다. 이겸을 위해 여기까지 축하하러 온 사람들과의 순간도 남겨 주고 싶은 이유였다. 권태정은 현장 사진을 담으러 온 포토그래퍼 옆에서 휴대폰으로 이겸과 친구들의 모습을 담았다.

"태정아, 엄마 왔어."

강지훈과 유재민이 나가자 대기실 안으로 권태정의 가족이 들어왔다. 권태정은 아주 고운 한복을 입고 온 엄마와 가볍게 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아들 오늘 너무 멋있다. 결혼 축하해, 태정아. 엄마 너무 기뻐. 이겸이랑 또 우리 삐약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 알았지? 엄마 바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어."

"우리 엄마 소원은 내가 다 이뤄 주지.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니까."

“응, 우리 태정이 믿어. 잘할 거야."

다시 한번 막내를 안고 등을 두드린 권태정의 어머니가 이번에는 이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예쁜 이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겸아, 너무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뻐.”

"어머님이 더 고우세요. 한복 너무너무 잘 어울리시고….”

“우리 아가는 말도 참 예쁘게 하지."

두 팔을 벌려 이겸을 안은 권태정의 어머니가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이겸도 좋은 향이 나고, 따뜻한 어머님의 등을 마주 안고 웃음 지었다.

"이겸아, 우리 태정이 사랑해 줘서 너무 고마워. 그리고 우리 가족한테 와 준 것도 너무 고맙고, 우리가 다 이겸이 사랑하는 거 알지?"

다정하고 따뜻한 말은 이겸의 말랑한 마음을 너무나 쉽게 다시 녹였다. 이겸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제가, 제가 더 감사해요. 받아 주시고, 또 실장님이랑 같이 있을 수 있게 도 해 주시고.… 또.… 사랑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사랑할 수밖에 없지. 이겸아.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할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 우리 아가한테는 이제 든든한 태정이도 있고, 엄마, 아빠에 누나, 형까지 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알았지?"

"네….'

터져 나오려는 눈물 대신 웃음을 지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아버님과도 가볍게 끌어안고 다정한 인사를 나누었다.

"태정이 녀석이 조금이라도 속 썩이면 언제든 말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기어이 저를 골칫덩이로 만드는 아버지를 어이없단 듯 바라보던 권태정이 권유정, 권기정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다가왔다.

“아, 아빠. 제가 이겸이 속을 왜 썩여요. 저 안 그래요."

"권태정, 결혼한다는 건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너와 이겸이의 인생이 달라지는 중차대한 일이라는 거 절대 잊지 말고, 말할 때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고, 욱해서 행동하고 싶을 때도 이겸이랑 삐약이 얼굴 한 번 더 떠올리고 행동하는 거 잊지 마. 알았어?"

마지막으로 단속을 하면서도 눈빛은 한없이 따뜻한 아버지를 보며 권태정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늘 단단하고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네, 아빠, 아빠가 평생 엄마한테 하신 거, 그리고 누나랑 형, 저한테 해 주신 거 그대로만 할게요."

"그럼 완벽하지. 축하한다, 우리 막내."

"아빠, 사랑해."

"징그러워, 이 녀석아."

"좋으면서 또 그러신다. 우리 아빠.”

대기실 안으로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겸은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너무 막연해 알 수 없었던 엄마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어머님의 웃음, 그리고 늘 달콤하고 맛있는 것들을 저에게 건네는 누나와 형의 웃음, 엄해 보이기도 하시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아버님의 웃음.

그리고….

사랑으로 저의 온 세상을 물들인 권태정의 웃음을.

"......"

이겸의 입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감정만 머금은 채로 이겸도 권태정을, 그리고 가족을 따라 웃음 지었다. 귓가에 닿는 여러 웃음 소리와 말소리가 너무 좋아 자꾸만 시선이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그리고 결국 그 시선은 이겸의 유일한 단 한 사람, 권태정에게로 닿았다. 이겸은 저에게 다가와 등을 가로지르며 한쪽 팔로 몸을 끌어안는 권태정을 올려다 보았다.

"할아버님께서 우리 이겸이 결혼하는 거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네.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먼 곳에서 아무 걱정도 없이 계실 수 있게 내가 더 잘할게. 신혼여행 갔다 와서 할아버님 계신 곳에도 같이 인사 가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살짝 권태정의 뺨을 매만졌다. 할아버지 생각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 주어 정말 너무나 고맙고, 또 감동이었다.

"감사해요, 실장님…. 할아버지 생각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해야지. 우리 이겸이 가족이 내 가족인데. 그리고 우리 자기 너무 예뻐하셨잖아."

기울어져 내려오는 얼굴을 보다가 눈을 감고 쪽, 쪽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대자 마주한 입술 위로 웃음이 번졌다. 이겸은 마주 닿아 번지는 권태정의 웃음을 머금으며 환히 웃었다.

결혼식이 시작하기 오 분 전,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아주 예쁘게 장식된 길 시작점에 오른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곧 권태정과 함께 이 길을 걷게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떨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겸아, 떨려?"

마주 닿은 팔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져 바라본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이겸의 머리칼 위로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귓가에도 입술을 댄 채 간지러운 소리를 묻혔다.

"지금은 떨려도 같이 걷기 시작하면 좋기만 할 거야. 내가 다 맞출 거니까 편하게 걷기만 하면 돼. 네 걸음 속도도 보폭도, 발을 맞추는 것도 다 내가 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겸이는 행복하기만 해 주면 돼.”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겸의 손을 아프지 않게 단단히 쥐며 권태정이 속삭였다. 이제 식장 안에서는 오늘 결혼식 사회를 맡은 백진우의 인사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권태정 군과 연이겸 군의 결혼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객석의 불이 조금 더 어두워지며 두 사람이 걸을 푸릇하고 화사한 길로 빛이 모여들었다. 권태정은 이겸에게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조금 장난스러운 말을 소곤댔다.

"그런데 사실 나도 걱정이 하나 있긴 해."

"...걱정이요?"

"응. 입장길이 내 생각보다 좀 긴데…. 가다가 뽀뽀하고 싶으면 어쩌지. 저기 중간쯤 갔을 때 한 번 하고 갈까?"

긴장을 풀어 주려는 권태정의 농담에 그제야 이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권태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떨림이 잦아든 이겸의 손을 더욱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 어떤 경우에도 풀어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권태정 군과 연이겸 군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중한 자리에 함께해 주신 만큼 새로운 시작을 하는 두 사람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조명이 길 시작점으로 몰려들었다. 이겸은 저와 권태정의 발끝까지 다가온 찬연한 빛과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보며 심호흡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벅차오르는 마음에 차마 소리로 맺히지 않았던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그 말을.

“세상 제일… 예쁜 날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언제 떠올려도… 웃음이 나고, 마음이 가득 차는... 그런 날.”

“응. 우리 이겸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절대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얽힌 손을 들어 올린 이겸이 권태정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웃음 지었다.

"실장님이랑 같이 있는 모든 날이… 저한테는 다 그래요."

"......"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하고, 또 웃음도 나고... 너무너무 예쁘기만 해요."

"......"

"행복할게요. 실장님과 함께."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입장하라는 소리와 함께 찬란한 빛이 쏟아져 아울러 발을 맞춰 걸어갈 두 사람의 앞을 비추었다. 그 어떤 어둠도 드리울 수 없을 만큼 아주 환한 빛이었다. 권태정은 행복에 축축이 젖은 눈동자로 이겸을 보며 웃었다.

"행복하러 가자, 이겸아."

두 발이 동시에 움직여 빛 속으로 완전히 담긴 순간,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두 사람의 위로 오롯이 사랑만이 가득한 빛이 쏟아졌다.

권태정은 빛보다도 반짝이는 저의 이겸을 두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았다. 웃음 지을 때마다 약한 복숭아 향이 나고, 제가 닿는 모든 곳에 기분 좋은 미열이 오르는 저의 영원한 사랑을.

<미열 소년> 마침.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에필로그

이겸아, 안녕, 딱 인사까지만 썼는데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엄청 고민이 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지금 우리는 결혼식을 하고 있겠지? 이제 절반쯤 지났을 텐데 기분이 어때? 긴장은 많이 풀렸어? 어제 자려고 일찍 누웠다가 너무 떨려 잠도 못 자고 같이 일어나 입장 연습했던 게 떠올라. 남들이 보기엔 그냥 손잡고 발만 옮기면 되는데 그걸 뭐 연습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한텐 참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어. 그치?

네 손을 잡고, 네 보폭과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기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 예전에 나였다면 평소보다 느리게 걷는 게 참 답답했을 거고, 굳이 그런것까지 맞춰야 하나 생각했을 텐데 어제는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내가 이겸이 너와 같이 걸을 수 있다는 게 참 좋기만 했어.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우린 다시 침대였지.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걱정하는 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삐약이랑도 얘기하고, 또 장난도 치고, 오늘이 결혼식이라는 걸 잠시 잊고, 늘 마주하는 우리의 편안한 밤에 머물게 됐을 때 잠이 드는 널 보면서 얼마나 행복 했는지 몰라. 사실 난 어제 한숨도 못 잤다? 널 보다 보니까 밤이 너무 빨리 가 버렸어.

밤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순간까지 천천히 전부 떠올려 봤어. 행복한 순간도 있고, 아픈 순간도 있고, 또 후회되는 순간도 있었어. 그래도 어제 그 모든 걸 떠올린 내 새벽의 감정은 결국 사랑이었어. 사랑이 묻지 않은 순간이 없더라. 이겸이 너도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가끔은 차가운 바람이 불기도 하는 3월에 만나 조금의 찬 기운도 없는 8월이 됐어. 우리 같이 벚꽃 구경했었잖아. 그날 정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처럼 좋았는데 그때 난 이미 예상했던 것 같아. 앞으로 평생 동안 내가 맞을 봄은 너와 함께일 것 같다고, 내 생애 그렇게 예쁜 봄은 없었어.

아, 그리고 또 이렇게 예쁜 여름도 처음이야. 우리 같이 맞을 가을과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분명히 내가 겪었던 계절들과는 다를 거야. 널 닮아 예쁘겠지? 내 계절을 특별하게 만들어 줘서 고마워.

요즘 날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참 많이 달라졌다고 해. 내가 이렇게 요란 하게 연애할 줄은 몰랐다면서 혀를 차기도 하고, 또 고개를 젓기도 해. 그래서 나도 생각을 해 봤거든. 내 모습이 어떻길래 사람들이 이러나 하고.

그런데 내 생각은 잘 안 나고, 이겸이 네 생각만 나는 거야. 그때 알았지. 아, 내가 널 아주 많이 묻히고 다니는구나. 나라는 사람은 이제 나보다 네가 더 커진 거구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이겸아. 난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좋아. 이겸이 너를 사랑하며 좋은 쪽으로, 너를 닮은 모습으로 변해 가는 내 모습이.

네가 나의 일부로 시작해 전부가 되는 동안 난 처음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이라는 걸 해 봤어. 그동안은 어떻게 하면 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노력하고, 더 좋은 삶,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키려 노력했다면, 요즘의 나는 어떻게 해야 우리 이겸이한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내 안에 가득 찬 네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편히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될게.

그 모든 시간을 나와 함께해 줘.

사랑해. 내 옆에서 잠든 너를.

그리고 지금 눈앞의 너를.

-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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