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온실 구경 잘 했어?”
“네…. 너무 예뻤어요.”
“좋았으면 다행이야. 우리도 이제 집에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단단히 쥔 권태정이 남은 가족을 따라 룸을 나섰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차에 이겸을 태웠다.
“…실장님, 혹시 아까 그 전화 때문에 아버님이랑 누나분 먼저 가신 거예요? 사채업자 아저씨가… 뭐라고 하세요?”
운전석에 오른 권태정은 시동을 걸기 전 조수석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걱정과 불안이 맺혀 흔들리는 눈 위로 가볍게 입 맞췄다.
“사람 쉽게 안 변하잖아. 딱 구대범이나 할 만한 그런 개소리 내뱉다가 아빠가 들은 거 알고 놀라서 찌그러졌어. 아마 지금쯤 제정신 아닐 거야.”
“…….”
“아빠랑 누나, 형 다 화난 건 당연한 거고. 그거 이제 다신 그런 전화 못 할 거야.”
“…왜 갑자기 전화하신 거예요? 이제 더는 관계도 없는데….”
“내 결혼 기사 보고 배 아팠나 봐. 걘 알잖아.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아마 이겸이 네가 행복해지는 게 싫었을 거야.”
이겸은 여태까지 꽤 긴 시간 동안 마주했던 구대범을 떠올려 보았다. 너무나 괴로워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전혀 떠올리지 않아 그런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조각조각 떠오르는 장면에도 마음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까 전화번호를 봤을 땐 진짜 심장이 확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제가 아직도 그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무섭고…. 이제 아무 연관도 없는데 왜 또 전화를 하신 건지도 모르겠고….”
“…….”
“그래서 어머님이랑 같이 시간 보내면서도 자꾸 걱정이 됐어요. 그 전화 때문에… 이 시간이, 좋은 시간이 다 깨지면 어떡하나 무섭기도 하고, 숨고 싶기도 했어요.”
“…….”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이제 안 무서워요. 숨고 싶지도, 피하고 싶지도 않아요…. 예전에 어땠었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이제 잘… 기억이 안 나요.”
이겸의 말에 안도한 권태정이 완전히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가만히 제 사랑의 형체를 품에 끌어안았다. 지킬 수만 있다면,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 삶의 유일한 온기를.
“…이제 걱정 안 할래요. 걱정 안 해도 되게 실장님이 해 주셨는데…. 그런 사람 때문에 불안해하고, 속상해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요.”
다행이다, 기특하다, 장하다, 고맙다. 여러 말이 떠오르지만 그 어떤 것도 쉽게 소리가 맺히지 못했다. 권태정은 이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속눈썹이 축축이 젖는 것을 느꼈다. 늘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 행복이 정말 이겸에게 잔뜩 닿은 것 같아 기뻤다.
“응, 이제 그런 시간은 다 흘러갔어. 이제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돼.”
“…실장님.”
떨리는 목소리에 놀란 이겸이 몸을 살짝 떼고 눈물에 축축한 권태정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울지 마세요….”
“속상해서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이겸이 이제 진짜 행복해 보여서, 좋아서 그래.”
권태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 눈물을 문질러 닦아 준 이겸이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댔다. 그리고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권태정만이 오롯이 제 말을 머금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기만 할 거예요.”
“…….”
“자, 자기랑… 같이 있을 거니까아….”
부끄러워 더듬는 것까지 입술에 전부 닿아 무척이나 간지러웠다. 입술을 마주한 채 웃은 권태정이 쪽, 쪽 입 맞추다가 조금 깊게 입술을 머금으며 파고들었다. 금세 뒤섞인 온기가 혀끝에서 번졌다.
그리고 그 온기 안에는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을 사랑이 빛을 밝혔다. 두 사람이 향할 행복만이 가득한 앞을 비추며.
* * *
이겸은 맞은편에 앉아 눈이 휘둥그레진 강지훈과 유재민을 바라보았다.
“…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권태정이랑 결혼하는 거야? 대박.”
“내가 맞다고 했잖아. 그때 얘 술 마셨을 때 데려갔던 것만 봐도 빼박이라고.”
“야, 넌 그게 그렇게 쉽게 믿어지냐? 우리랑 같이 인형 알바나 하던 애가 지금 재벌이랑 결혼한다는데?”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청첩장을 여러 번 확인한 강지훈이 ‘권태정, 연이겸’ 위아래 같이 적힌 이름을 뚫어질 만큼 보고 난 다음에야 이겸을 바라보았다.
“와…. 야, 진짜 대박이다. 축하해. 야, 근데 너 베타 아냐? 그 집안 우성 집안인데 베타랑도 결혼 허락을 해 줘?”
“아…. 그게 얘기가 좀 길어요. 제가 원래 오메가인데…. 몸에 문제가 좀 생겨서 몇 년 동안 베타처럼 지냈었어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다시 오메가로 돌아왔어요….”
“헐, 진짜 대박이다. 이겸아, 너 진짜 될놈될의 표본 아냐?”
계속 대박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강지훈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유재민이 의자를 앞으로 확 당기며 청첩장을 흔들었다.
“우리도 진짜 가도 돼? 나 하객 알바만 존나 해 봤지 이런 결혼식은 처음 가 봐.”
“형들도 아시다시피 제가 초대할 사람들이 별로 없잖아요. 형들 시간 되시면 꼭…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너무 잘해 주시고 챙겨도 주시고 너무 감사해서 꼭 초대하고 싶었어요.”
“권태정도…. 아니, 아니…. 그, 형님도 우리 부르는 거 알아? 갔다가 욕먹으면 어떡해. 그 형님 존나 무서워.”
권태정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에 웃은 이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세요. 실장님께서 형들 초대하자고 먼저 말씀해 주셨어요.”
“정말? 와…. 대박. 우리 존나 출세했다. 재벌 결혼식에 다 가고.”
초대해 줘서 고맙다며 계속 청첩장을 보는 강지훈과 유재민을 보며 이겸은 웃음 지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제가 청첩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 너 하객 채우기 힘들면 우리가 좀 부를까? 우리가 하객 알바 짬이 얼만데. 자연스러운 애들로 채워 줄게.”
“야, 씨발. 돌았냐? 애 앞길 망칠 일 있어? 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
“아,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태클 존나 거네.”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고.”
“아오, 야, 이겸아. 유재민 부르지 마. 청첩장 뺏어!”
“야, 나 말고 이 새끼 거 뺏어. 도움이 안 돼. 강지, 너 결혼할 때나 하객 알바로 다 채워라.”
언제 봐도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이겸이 싸우면서도 손에 꼭 들고 있는 저와 권태정의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아주 예쁘게 나온 청첩장을 보니 비로소 결혼식이 가까이 다가온 게 실감이 났다.
“…….”
어떡해, 너무 떨려….
결혼식까지는 이제 단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 * *
“와…. 권태정이 진짜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진짜 사람 일 모른다더니.”
청첩장을 받고 계속 놀랍다는 말만 계속하는 조현준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권태정이 그 옆에서 조용히 청첩장을 읽는 백진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돌팔이와 저의 유능한 비서는 이 성스러운 청첩장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랐다.
“그런데 무슨 청첩장을 일주일 전에 줘? 내가 일정 있으면 어쩌려고.”
“없잖아.”
“…와씨, 진짜 없는 게 왜 이렇게 짜증 나냐. 확 그냥 만들고 안 갈까 보다.”
“어차피 올 거면서 기운 빼지 마.”
조현준은 억울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초밥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따뜻한 차만 마시고 있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넌 진짜 왜 점심 안 먹어? 너 여기 우니 초밥이랑 감태말이 좋아하잖아.”
말만 들어도 역하다는 얼굴을 한 권태정이 조현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천천히 심호흡했다.
“태정이 입덧하잖아.”
“…야, 너 아직도 그래? 저번에 센터에서 봤을 때보다 심해진 거 같은데?”
“요즘 이겸 씨가 좋아하는 거 외엔 거의 뭐 못 먹어.”
“이겸 씨가 좋아하는 게 뭔데?”
인상을 쓰고 앉은 권태정 대신 열심히 대답하던 백진우가 며칠 동안 권태정이 회사에서 겨우 먹은 것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펼쳤다.
“초콜릿 맛 시리얼, 설탕 코팅 된 도넛, 밀크셰이크….”
“권태정 너 진짜 제대로구나. 평생 그런 거 입에 대는 걸 못 봤는데….”
겨우 조금 가라앉은 속에 한숨을 쉰 권태정이 다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조현준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현준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뭐 난 좋게 생각해. 내가 그동안 쭉 봐 왔잖아. 확실히 알파가 오메가한테 유난이다 싶을 정도로 잘하고 둘이 각인 동기화가 확실하게 돼야 오래 잘 살더라. 태정이 너 진짜 잘 살 거야. 여태까지 내가 본 알파들 중에 네가 진짜 최고야.”
한 손은 엄지를 치켜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성게알 초밥을 먹는 조현준을 보며 다시 비위가 상한 권태정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하고 갈 테니까 천천히 먹고 가. 진우 너도 마저 먹고 회사로 오고. 나 따라 나올 거 없어.”
“남 먹는 거 봐도 역할 정도야? 어떡하냐, 진짜. 그럴 땐 서로 페로몬 섞는 게 좋아. 정서적 안정뿐만 아니라 여러 증상들도 분명히 완화시켜 주니까. 너한테도 좋지만, 이겸 씨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페로몬 교합 지주 해 줘.”
비위가 상해 금세 창백해진 얼굴로 룸을 나가려던 권태정이 조현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겸이 다치면.”
“다치기는 왜 다쳐. 페로몬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땐데.”
“내가 우성이라 페로몬이 너무 강해서 이겸이가 벅차할 때가 있어.”
“부정적인 감정에서 터지는 페로몬 아니면 괜찮아. 지금은 네가 최대치로 쏟아부어도 이겸 씨가 전부 받아들일걸. 그만큼 알파 페로몬이 필요할 때야. 너도 이겸 씨 페로몬이 필요하고. 이제 몸 너무 심하게 안 사려도 된다고 했잖아. 너무 자제하다가 나중에 터지면 그게 더 힘들어.”
이번에는 두툼한 회가 올라간 초밥을 입에 넣는 조현준을 보다가 정말 토할 것 같아 룸을 나선 권태정이 아예 가게를 나온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참 좋아해서 자주 찾던 곳인데 갑자기 이렇게 모든 게 비리게 느껴지고, 역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
페로몬 교합…. 이겸과 페로몬 교합을 하라는 조현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단순히 페로몬만 뒤섞는 게 아니라 몸을 깊게 마주하라는 의미라는 걸 권태정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달려들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너무 자제하다가 나중에 터지면 그게 더 힘들어.’
오늘따라 돌팔이가 맞는 말만 해 댄 탓에 자꾸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결국은 제가 이겸을 생각해 자제하며 섹스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잘 될까 싶었다.
“…….”
솔직히 이겸과 섹스했던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배가 저릿하고 손끝이 찌릿했다. 제가 깊게 키스를 하기만 해도 구멍이 잔뜩 젖어 녹진해져 매달리는데 진짜 미칠 것 같았다.
“하….”
미치겠네, 진짜. 아, 이겸이 만지고 싶어. 안고 싶어, 빨고 싶어. 깊게 몸이 맞물리도록 섹스하지 않아 그런지 요즘 이겸은 제가 조금만 만져도 금세 녹아 품으로 잔뜩 안겨들었다. 권태정은 지난밤 깊게 키스하다가 안겨들어 헐떡이며 저를 보던 이겸을 떠올렸다.
‘…실장님…. 키스… 더 하고 싶어요….’
반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와 달아올라 더 말랑해진 입술이 예뻐 그 말 하나에도 자제하지 못하고 거의 섹스하듯 키스했던 걸 떠올린 권태정이 생각만으로도 열이 오른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적당히 선을 넘어야 할 것 같았다. 이겸을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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