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9화 (139/174)

#139

오후 내내 꽤 잘 아는 사람, 적당히 아는 사람, 대충 아는 사람, 그리고 기자들에게까지 시달린 권태정은 겨우 회사를 빠져나가 집으로 향했다. 속도위반이니 뭐니 다들 떠들어도 결혼 발표 후 하나 좋은 게 있다면 하루 종일 아주 많은 축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축하를 이겸과 함께 들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타인에게 이겸을 다 공개할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겸아!”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이겸을 찾아 방으로 들어간 권태정은 비어 있는 침대를 확인하고 놀라 다시 방을 나섰다.

“실장님, 오셨어요? 저 옷 갈아입고 있었어요.”

권태정은 드레스룸에서 나오는 이겸을 향해 서둘러 다가가 아프지 않게 몸을 끌어안았다.

“다시 실장님 된 거야? 또 자기라고 해 줘.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아….”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소리 낸 것도 무척 부끄러웠는데 얼굴을 보면서 말하는 것도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겸은 저를 향해 몸을 숙이고 눈을 맞춘 권태정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자, 자기….”

“아, 진짜 너무 예쁘다. 우리 자기 예뻐서 어떡해, 정말. 자기라고 부르고 싶었어?”

“네…. 실장님도 저한테 자기라고… 자주 불러 주시잖아요. 들을 때마다… 좋아서…. 저도 그렇게 부르면 실장님께서 좋아해 주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좋아, 너무 좋아.”

이겸을 다시 가득 안았다가 놓은 권태정이 예쁘게 골라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단정히 밝은색의 셔츠를 입은 게 지나치게 예뻤다.

“아, 예쁘다. 잘 어울려.”

잘 어울린다는 말에 안도하며 웃은 이겸이 드레스룸에 있는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만졌다. 권태정은 그러는 내내 뒤에서 이겸의 허리를 안고 어깨 쪽으로 몸을 구부린 채 이겸의 뺨과 귓가에 뽀뽀를 퍼부었다.

“얼른 가자. 배고프겠다.”

씩 웃은 권태정이 구부리고 있던 커다란 몸을 펴고 이겸의 손을 잡았다. 종일 그리던 이겸의 온기가 마주 물린 손가락을 타고 올랐다. 권태정은 집에서 나가 주차장에 내려가는 동안, 그리고 운전을 하고 호텔에 가는 동안에도 내내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내내 그립던 온기가 가득한 이겸의 손을.

* * *

호텔 로비에서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권유정과 권기정을 만난 권태정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올랐다. 안내를 받아 룸으로 가자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이 웃으며 반겼다.

“엄마, 아빠 빨리 오셨네요?”

“길이 막힐 줄 알았는데 안 막혀서 일찍 도착했어. 이겸아, 왔어? 저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 괜찮아서 다행이다.”

웃으며 부모님께 인사드린 이겸이 권태정의 어머니가 손짓하는 곳으로 가서 옆에 앉았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을 따라가 옆으로 앉아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제 어머니와 이겸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오늘 결혼 기사 난 거 축하도 하고, 또 우리 아가 요즘 입덧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싶어서 나오라고 했어. 몸은 괜찮아?”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요즘은 정말 많이 괜찮아졌어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

“괜찮다니 다행이야.”

다정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울리고, 미리 주문해 둔 음식들이 나와 각자의 앞에 놓였다. 권태정이 미리 부모님과 상의를 해 두어 이겸이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하나도 없는 아주 깔끔한 코스였다. 권태정의 배려 덕분에 이겸은 아주 맛있고 편안히 식사할 수 있었다.

내내 즐겁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족들을 보며 이겸은 새삼 제가 이 가족 안에 속해 있다는 게 너무 좋아 내내 그들을 따라 웃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불편했던 적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잘 먹네, 우리 이겸이.”

“다 너무 맛있어요. 디저트도 맛있고….”

“요새 그래도 잘 먹게 돼서 너무 좋아.”

뺨에 쪽 입 맞추는 권태정을 보고 웃은 이겸이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휴대폰 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이겸은 번호만 보고도 대번에 그 번호를 알아보며 사색이 되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몇 년 동안 내내 저를 위협하며 닿았던 번호를. 전화번호도 바뀌었는데 도대체 제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을까 싶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제 번호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겸아, 왜 그래?”

“…사채업자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사채…. 구대범?”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권태정에게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도대체 애를 얼마나 오랫동안 괴롭혔으면 번호만 보고도 이렇게 사색이 되나 싶어 머릿속으로 확 열이 올랐다. 권태정은 저에게 집중된 시선들을 보며 순간 머리를 굴렸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구대범은 정말 재수가 없다 못해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태성의 회장, 사장, 부사장이 다 모인 자리에서 명을 재촉할 전화를 건 것을 보면. 권태정은 얼른 저에게 닿은 시선들 중 엄마를 찾아 눈을 맞췄다.

“엄마, 여기 레스토랑 안에 온실 있잖아요. 이겸이랑 잠깐 다녀오실래요? 좀 지저분한 전화가 왔는데 엄마도 안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상황 설명 드릴게요.”

“응, 그래. 알았어. 이겸아, 엄마랑 같이 꽃 보고 오자.”

눈치가 빠른 엄마가 이겸을 데리고 룸을 나서는 것을 보며 권태정은 아버지와 누나, 형에게 구대진의 사촌인 구대범에게 온 전화이며 이겸의 할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던 사채업자라는 기본 정보를 빠르게 알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용을 녹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길게 말하면 제가 이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기에 최대한 짧게 대단한 권태정은 곧바로 터져 나오는 구대범의 목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썼다.

-야, 이겸아. 오랜만이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받네? 하긴 뭐 이제 재벌가 입성하는데 뭐 무서운 게 있겠어? 전화 못 받을 것도 없지.

“…….”

-오늘 기사 터졌더라? 권태정 결혼한다며.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우리가 본 세월이 있는데 축하는 해 줘야지.

비꼼이 가득한 말투에 권유정과 권기정도 인상을 찌푸렸다. 권태정은 스스로 지옥 불구덩이에 발을 담그는 구대범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아, 진짜 인생 역전이다, 이겸아. 안 그래? 인생은 너처럼 살아야 되는데. 네 할아범이 손자가 권태정한테 몸 팔아 팔자 고치는 걸 알고 뒈졌으면 좋았을걸. 그럼 편안히 눈 감았을 텐데.

천지 분간도 못 하고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 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대응하려는 권태정을 보며 회장이 손을 들었다. 계속 더 들어 보자는 제스처였다. 권태정은 당장이라도 구대범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픈 마음을 잠시 누르며 한숨지었다.

-네가 거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 년? 이 년? 반반한 얼굴로 몸 파는 것도 오래 못 갈걸. 수준이 밑바닥 철거촌인데 그 집에서 널 얼마나 참아 줄 것 같아? 회장님 여러 번 기절하셨겠네. 그렇게 아끼는 막내가 데려온 게 고작 철거촌 고아야. 씨팔. 웃겨 죽겠네.

“…….”

-네가 그 집안 수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나나 되니까 이런 말 현실적으로 해 주는 건 줄이나 알아. 원래 이런 장사는 한 탕 제대로 했으면 판을 떠야지 너처럼 주제 파악 못 하면 끝이 안 좋거든.

딱 거기까지 들었을 때 권태정의 아버지가 테이블을 주먹 쥔 손으로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대범의 배설도 뚝 끊겼다.

“뱉어 낸다고 다 말인 줄 알아? 네 놈이 지금 쏟아 낸 말 어떤 식으로든 책임져야 할 거다.”

-뭐? 누구….

이겸이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당황했는지 버벅이는 구대범을 비웃은 권태정이 제 쪽으로 휴대폰을 당겼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아빠지. 가족 식사 중이었거든. 태성 회장, 사장, 부사장이 다 들어 버렸네. 어떡할래, 이제? 그리고 하나 더 알려 주자면…. 우리 엄마, 아빠 막내는 이제 내가 아니라 이겸이거든? 너 어쩔래, 진짜. 인생 한번 좆같다, 그치.”

제 가족들이 모두 다 들어 버렸으니 이제 구대범의 미래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다. 제 아버지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가족을 건드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고, 또 절대 용서하지 않는 분이니까.

-야, 태정아…. 아, 저 회장님, 그게….

“책임질 수 있으니까 그딴 것도 말이라고 내뱉었겠지? 꼭 책임져. 아, 아빠 지금 대국물산 가시는 거 모셔다드려야 해서 끊을게.”

전화를 끊은 권태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구대범이 아주 제대로 밟힐 거라는 걸 생각하면 잘된 일이지만, 제가 없는 곳에서 혹시라도 이겸이 이런 전화를 받아 이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확 망가졌다.

다 같이 있을 때 전화가 와서 다행이고, 이겸이 이딴 오물을 마주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아버지, 이건 저희도 좌시할 문제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저도 누나 생각이랑 같아요. 이겸 씨 이제 우리 가족이잖아요. 이건 우리 가족 전체를 모욕한 거랑 똑같아요.”

잔뜩 화가 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버지를 번갈아 보던 권태정이 슬쩍 말을 꺼냈다.

“아빠, 저 로열 캐피털 날릴게요. 사실 전부터 이 지랄, 아니…. 난리라 본때를 보여 주려고 준비 중이거든요. 겉보기에나 그럴싸하지 좀만 파 봐도 아주 속이 엉망이라 허락만 해 주시면 바로 날릴 수 있어요. 사실 허락 안 받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구 회장님이랑 아는 사이시니까 혹시나 해서요.”

“네 마음대로 해라. 대부업체 도산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난 당장 구 회장 만나야겠다. 집안 단속 하나 못해서 내 가족이 이딴 소리를 듣게 해? 대국 쪽이랑 관련된 거 전부 끊을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유정이, 기정이 미리 대비해 두고.”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를 따라 권유정과 권기정도 일어나 가방과 옷을 챙겼다. 잔뜩 화가 나 오히려 지나치게 차가워진 얼굴들을 보며 권태정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유정이는 나 따라오고 기정이는 엄마 책임지고 집까지 안전히 모셔. 태정이 넌 이겸이가 절대 통화내용 모르게 하고. 평생 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겸이를 지키고 보호하고, 상처받지 않게 하는 일인 거 늘 명심해.”

“네, 아빠.”

룸을 나서는 아버지와 누나에게 일어나 인사한 권태정이 자리에 앉아 이겸의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구대범의 목소리가 담긴 파일을 저와 권기정 휴대폰으로 각각 옮긴 뒤, 이겸의 휴대폰에서 삭제했다.

“이겸 씨가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더 볼 일 없는 지금도 이렇게 나오는데 전엔 어땠을 거야. 안 봐도 눈에 선해.”

“심심하면 전화하고, 찾아와서 시비 걸고 온갖 협박, 지랄 다 했지. 내가 볼 때마다 밟았는데도 이게 학습 능력이 없어서 아직도 이래. 진짜 뒈지기 직전에 정신 차리려나.”

“괜히 우리 손에 피 묻힐 필요 없어. 아버지가 대국 회장 만나시기만 해도 대국 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야. 화나겠지만, 준비한 걸로 그 대부업체 날리는 정도만 해. 거기서 더 나가면 괜히 태정이 너까지 또 시끄러워져.”

“응. 그럴게, 형. 나 이제 뉴스 안 타고 조용히 살 거야. 우리 이겸이랑 행복하게.”

당연히 그럴 거라고 권태정의 등을 두드린 권기정이 문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들어오는 엄마와 이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버지랑 유정이는?”

“아,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셨어요. 엄마는 저랑 가세요.”

권태정은 저에게 다가오는 이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이겸의 허리를 안은 채 품에 얼굴을 비볐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따뜻하고 다정한 이겸이 그 더럽고 말 같지도 않은 배설을 마주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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