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7화 (137/174)

#137

“퇴근하십니까, 실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강 팀장님. 내일 회의 때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닿아 오는 인사에 이겸은 권태정에게 인사하는 사람을 보다가 또 인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 이제 들어가십니까?”

뭔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왜 그런 건지 곰곰 생각하던 이겸은 주차장에서 만난 직원이 권태정을 ‘실장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왜 기분이 이상했는지 깨달았다. 사무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을 저도 너무나 당연하게 쓰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묘한 괴리감을 이제야 느낀 것이었다.

실장이라는 것은 권태정의 직함이니 회사 사람들이 그를 실장님이라 부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도 권태정을 실장님이라 부르는 게 잘못됐다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결혼도 할 거고, 삐약이도 태어날 텐데 언제까지나 계속 실장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도 배 속에 있는 삐약이에게 말을 할 때마다 권태정을 실장님이라 칭해서 어쩌면 지금도 삐약이가 그를 아빠가 아니라 실장님으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아빠라고 안 하고 삐약이도 나중에 실장님이라고 하면 어떡해….

“이겸아, 이겸아? 자기야.”

작게 들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확 닿은 순간 이겸이 놀란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저를 보고 있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디 안 좋아?”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더니….”

“무슨 생각?”

“…실장님을 계속 실장님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어서요.”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내비게이션에 찍힌 ‘하우스 오브 김밥’이라는 글자를 흘끗 본 권태정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겸을 흘끗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아…. 회사에서 같이 일하시는 분들께서 실장님이라고 부르시는 걸 들으니까…. 제가 너무 딱딱하게 부르는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제가 실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입에 너무 익어서…. 삐약이랑 얘기할 때도 저도 모르게 실장님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삐약이가 실장님을 아빠가 아니라 실장님이라고 알면 안 되잖아요.”

조곤조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진짜 너무 귀여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으로 넘어가 물고 빨고 싶은 마음을 짓누른 권태정이 빨간색으로 변하는 신호를 보며 얼른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맞아. 삐약이가 날 실장님으로 알면 안 되긴 하지. 아빤데.”

이겸이 과연 저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 줄지 궁금해 그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이어지는 이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삐약이한테 말할 때는 태정이 아빠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아, 태정이 아빠래. 이런 말을 듣고 지금 어떻게 살아 있지. 인간의 목숨이 참 질기다고 생각한 권태정이 겨우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신호가 길어 참 감사했다.

“삐약이한테 말할 때만 그럼 그렇게 부르고, 평소에는 실장님이라고 할까요?”

“바꾸려면 다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완전히 다 바꾸는 거 아니고 처음에는 섞어 쓰더라도 다른 호칭 연습해 보면 좋잖아.”

평소 실장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다른 호칭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생각하니 이대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생각을 해 보고 있는데…. 어, 실장님. 신호 바뀌었어요.”

“어? 아, 그러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봐.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네….”

퇴근길이라 꽤 붐비는 도로 위로 느릿하게 차를 몰며 권태정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이겸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입술을 꾹꾹 깨물기도 하고, 볼을 부풀렸다가 숨을 작게 내쉬기도 하는 게 너무 귀여워 숨이 다 막혔다. 미치겠다, 그냥 집으로 가서 우리 이겸이 먹으면 안 되나.

하지만 이겸이 전에 갔던 그 분식집의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한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권태정은 가끔씩 조수석에서 흐르는 고민 가득한 숨소리에 발기하지 않으려 애쓰며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니까.

‘하우스 오브 김밥’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권태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겸과 동기화가 되어 그런지 예전에 왔을 때와는 좀 마음이 달랐다. 굶으면 굶었지 절대 평소라면 먹지 않을 그 돈가스가 신기하게도 꽤 끌렸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학생, 오랜만에 왔네? 이제 이쪽에서 일 안 해?”

“아…. 네. 일 그만뒀어요.”

“그래서 안 보였구나. 그럼 오늘 밥 먹으려고 일부러 여기 온 거야?”

“네, 전에 먹었던 돈가스가 생각나서요.”

“그게 그렇다니까. 우리 집 돈가스도 그렇고 김밥도 그렇고 한 번 먹으면 잊질 못해.”

능청스럽게 말한 주인이 이번에는 권태정을 반갑다는 듯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대외용 미소를 장착한 채 적당히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오늘은 저희 가게에 맛있는 거 많으니까 같이 드셔 보세요. 저번에는 안 드셨잖아.”

아니, 기억력도 좋네, 진짜. 식당도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 권태정이 싱긋 웃으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메뉴를 눈으로 쭉 훑었다.

“이겸아, 돈가스랑 또 뭐 먹고 싶어? 다 골라. 다 먹자.”

“음…. 돈가스랑 오므라이스?”

“오므라이스? 응, 그래. 그리고 또?”

“냉면도 맛있을 것 같아요.”

“아니, 여기 냉면도 있어?”

우리 집 냉면이 또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주인에게 억지로 웃음 지은 권태정이 펜을 들어 수제 돈가스, 오므라이스, 냉면 옆에 선을 대충 찍찍 그었다.

“이렇게 주세요.”

“네! 맛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우동 국물부터 드릴게요. 그리고 김밥은 서비스!”

주방에 주문 들어온 것을 말하는 주인을 흘끗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정이 얼른 물 두 잔을 따라와 이겸과 제 앞에 놓았다. 그리고 힘들게 수저를 놓으려는 이겸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수저도 대신 놓았다. 밑에 휴지를 한 장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먹고 싶은 게 있어서 다행이야.”

“갑자기 이게 생각났어요. 전에 실장님이 사 주셨을 때 진짜 너무너무 맛있었거든요.”

“그때 나한테 돈가스 먹여 줬잖아. 솔직히 억지로 먹은 건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어. 아까 이겸이 네가 돈가스 얘기하는데 나도 바로 생각나더라고.”

“오늘은 같이 드실 거죠?”

“응, 솔직히 지금 좀 기대까지 돼. 웃기지.”

씩 웃는 권태정을 보며 예쁘게 웃은 이겸이 앞에 놓인 우동 국물을 한 번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다행히 조금도 역하지 않고 너무나 맛있었다.

“입에 맞아?”

“네, 너무 맛있어요. 실장님도 드셔 보세요.”

“어…. 그럴까?”

솔직히 이 분식집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겸을 최대한 마음 편히 먹게 해 주고 싶어 숟가락을 든 권태정이 우동 국물을 조금 입에 넣었다. 찝찌름하니 우동 국물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짭짤한 국물은 입맛을 돋우며 권태정을 끌어당겼다.

“실장님도 괜찮으세요?”

“응, 맛있어.”

“다행이에요.”

제가 우동 국물 좀 잘 먹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맞은편이 아니라 옆으로 가서 쓰다듬고, 볼을 빨고 뽀뽀하고 싶은 걸 참아야 하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주문하신 냉면이랑 오므라이스 먼저 나왔습니다. 돈가스도 곧 나올 거예요.”

“고맙습니다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므라이스와 아주 시원해 보이는 냉면을 번갈아 본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실장님, 드세요.”

“응, 우리 이겸이도 맛있게 먹어.”

“네에.”

오므라이스 끄트머리를 한 숟가락 떠서 호 불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는 이겸을 본 뒤에야 권태정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여기서 파는 음식이 전부 다 맛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오므라이스도 꽤 맛있었다.

냉면도 무척 맛있는지 냠냠 잘도 먹는 이겸을 기특하다는 듯 보던 권태정이 옆으로 놓이는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한 조각을 집어 호 불어 이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전에는 이겸이가 나 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줄래.”

이겸은 제 맞은편에 앉은 권태정을 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꼰 채 이곳에 있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권태정이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

사실 그때도 권태정이 싫지 않았다. 아니, 정말 싫어했던 적이 있긴 했을까. 좋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라는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는 한 번도 권태정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이겸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입을 벌렸다.

“너무 맛있어요.”

“우리 이겸이 잘 먹으니까 너무 좋아. 진짜 먹는 것만 봐도 행복해.”

“저도 행복해요. 실장님이랑 같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권태정이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며 이겸도 웃었다. 소소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두 사람 만의 행복이 한여름 밤, 작은 분식집 안으로 고여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권태정은 아이스 초코 빨대를 입에 물고 고민에 빠진 이겸을 보며 웃었다. 아무래도 호칭에 대한 고민을 이어서 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뭐라고 부를지 못 정했어?”

“아…. 네…. 조금 고민이에요. 괜찮을 것 같은 말이 있기는 한데 제가 그렇게 부를 자신이 아직은… 없어서….”

“진짜 급한 건 아니니까 그걸로 스트레스받지는 마, 알았지?”

“네…. 그럴게요. 혹시…. 실장님은 제가 불렀으면 하는 호칭 있으세요?”

“음, 난 다 좋은데. 자기, 여보, 형…. 아, 형은 좀 양심 없나. 열두 살 많은 형은 좀 그렇긴 하네. 솔직히 난 이름 불러도 좋아.”

권태정은 이겸이 제 이름 부르는 것을 상상했다. 사실 제가 열두 살이나 많다 보니 이겸이 제 이름을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 태정아, 부를 일도 없고, 권태정이라고 성까지 붙여 부를 일 또한 없었다.

“이름 부르는 거 듣고 싶어.”

“…그, 그건 안 돼요. 너무 예의 없는 거잖아요.”

“그럼 나중에 내가 해 달라고 할 때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언제요?”

“음, 우리 자기 정신없어서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때.”

그게 언제냐는 듯 보는 이겸을 흘끗 보며 웃은 권태정이 둘밖에 없는데도 꼭 누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목소리를 죽여 은밀하게 소곤댔다.

“이겸이 물놀이할 때.”

권태정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이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겸은 아이스 초코 빨대를 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초코 음료가 빨대를 타고 올라와 열이 잔뜩 오른 이겸의 혀를 건드렸다가 내려갔다.

“그, 그래도…. 실장님 이름만 부르는 건 조금….”

“그때도 이런 생각 들면 안 해도 돼. 하고 싶으면 하고. 아, 난 왜 이렇게 우리 자기가 불러 줄 것 같지. 태정아, 빨리, 더 깊게 쑤셔 줘.”

‘태정아.’부터 ‘쑤셔 줘.’까지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는 말에 너무 놀란 이겸이 또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거니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좋아서 정신이 나가면 저런 말을 하나 싶었다.

“…정말 제가… 그, 그런 말도… 해요?”

“쑤셔 달라고 말은 안 하는데 얼굴만 봐도 뭐 해 달라는 건지 난 다 알지.”

그래도 그런 말을 직접 소리 낸 건 아니란 말에 안도한 이겸이 긴 숨을 내쉬었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을 보며 쾌감에 잔뜩 취해 말랑해져 저에게 안기고 또 매달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노골적인 말을 하든 안 하든 지나치게 야하다는 걸 아마 이겸은 모를 것이었다. 본 적이 없으니까. 언제 기회가 된다면 거울이 있는 곳에서 하며 쾌감에 휩싸인 얼굴을 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말 안 해도 야해, 우리 자기.”

차가운 음료를 잡고 있어 차가워진 손끝을 문지르다가 잡자 이내 제 손을 마주 쥐는 약한 힘이 사랑스러웠다. 권태정은 그 손을 당겨 쪽, 쪽 입 맞췄다. 그게 간지러운지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권태정을 숨 쉬게 하는 행복의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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