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6화 (136/174)

#136

이겸은 커다란 회사 로비를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다. 살면서 이렇게 큰 회사 건물에 와 보는 게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자꾸만 여기저기로 시선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또 신기한 것은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권태정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권태정을 알아본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또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복귀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직원도 권태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겸은 평소 저를 보던 다정한 얼굴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뭐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저를 볼 때처럼 마냥 온기가 스며 있는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실장님, 갑자기 댁에는 왜…. 어, 이겸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좋은 소식 있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실장실이라 적힌 곳 안으로 들어서자 백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을 반겼다. 이겸은 꾸벅 고개를 숙여 오랜만에 보는 백 비서에게 인사했다. 철거하는 날 잠깐 보고 보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 소식도 들었는데 그것도 정말 축하드려요. 축하할 일이 많아서 저도 너무 좋아요.”

“비서님께서 늘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백 비서에게 다시 한번 인사한 이겸이 다른 남자랑 너무 오래 눈 맞추면 슬프다는 권태정에게 반쯤 안긴 채 실장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따라 들어간 백 비서가 서류 하나를 책상 위로 놓았다.

“제품기획 2팀 서 실장님께서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메모 남겨 두셨습니다. 아침에 보고 드렸던 것처럼 이번에 1팀이랑 신제품을 놓고 갈등이 생겼는데요. 그 건으로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아, 한 시간 안에 올라오시라고 하세요. 골치 아픈 일은 우리 이겸이로 꽉 차 있을 때 빨리 해결해야지. 안 그러면 이겸이 안고 일해야 돼.”

“…진심이세요?”

“전 한다면 해요. 아시면서. 보여 드릴까요?”

“…아닙니다. 한 시간 안에 꼭 오시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말을 나눈 권태정이 실장실을 나가는 백 비서에게서 시선을 떼고 신기하다는 듯 저를 보고 있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여기가 내 방이야, 이겸아. 꽤 괜찮지?”

“아…. 네, 너무 좋아요.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누구 안 올 때는 소파에 편히 있으면 돼. 그리고 좀 전에 들은 것처럼 팀장님 한 분이 오실 건데 그땐 이 안에 있으면 되거든. 가 보자.”

권태정은 이겸의 손을 잡고 실장실 소파 옆으로 있는 커다란 책장 뒤쪽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있는 문을 열자 호텔처럼 쉴 수 있는 방이 나타났다. 방은 꼭 호텔처럼 아주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와아…. 늦게까지 일하실 때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응. 최대한 집에 가려고 하긴 했는데 진짜 너무 피곤하다, 운전 못 하겠다 싶으면 잠깐 여기서 쉬어. 뭐 이제 쓸 일 없겠지만.”

뒤에서 이겸의 허리를 안고 몸을 숙인 권태정이 목덜미에 코끝을 댄 채 문질렀다.

“결혼하면 이제 아무리 늦어도 우리 이겸이 있는 집으로 무조건 갈 거니까.”

백 비서나 다른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의 목소리와 반응이었다. 이겸은 고개를 돌려 어깨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눈을 맞춘 채 가볍게 혀를 섞었다. 셔츠 안으로 들어와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이 좋아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니다, 쓸 일, 하…. 아직 있을지도 모르겠네. 자기 회사 올 때마다 같이 쓰면 되겠다. 그치.”

몸을 돌려 완전히 시선을 마주한 채 다시 입술이 마주한 순간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겸의 혀를 느릿하게 빨며 입술을 뗀 권태정이 불만스럽게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빨리도 오셨네. 금방 끝낼게. 쉬고 있어.”

“네….”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방 바깥으로 나가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바깥에서 백 비서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조금 전 제가 들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로 말하는 권태정의 목소리에 홀린 듯 나가 책장 뒤쪽에서 몰래 소파에 앉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서 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는지 여쭙고 싶은데 잘 못 지내신 걸 알아서 그런 인사도 못 드리겠네요.”

“실장님, 복귀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좋은 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지만…. 정말 실장님 아니시면 이 일을 해결해 줄 분이 안 계셔서 염치 불고하고 왔습니다.”

“왜 뒤에 붙은 숫자만 다른 팀끼리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기 싸움을 하고 그러세요. 제가 그런 싸움까지 중재해야 합니까?”

싸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는 그 어떤 따뜻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말에 꼭 각이 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다정함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겸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조금의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고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권태정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양보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발전을 위해 적절한 경쟁도 좋지만, 이런 경우에는 또 결과를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훌륭한 다른 기획도 다 해 두시고, 왜 굳이 겹치는 아이템으로 의미 없는 분쟁을 하시는지 솔직히 전 이해가 안 갑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권태정은 아주 단단해 보이고 모서리가 뾰족해 보이는 말로 응수했다. 이겸은 아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상대를 보며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울 것 같은 눈으로 집에 와서 저를 끌어안던 권태정과는 아주,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라 심장이 쿵쿵 요란히도 뛰었다.

“…….”

어떡해…. 실장님 일하시는 거 너무 멋있어…. 이겸의 눈동자가 멍해지며 책장을 쥐고 있는 손끝에 살짝 더 힘이 들어갔다. 감정이 결여되어 보이는 권태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저렇게 단호한 사람이 저에게는 조금도 단호하지 않고, 늘 따뜻한 웃음만 보인다는 게 너무나 설레고, 좋아서 쿵쿵 뛰던 마음은 이제 줄줄 녹아 흐르고 있었다.

“이미 손을 떠난 일은 잊으세요. 2팀 기획안 봤는데 아주 좋던데요. 팀장님께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시간 부족하다고 매일 야근하실 거면서 이런 일에 왜 소모전을 하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실장님. 못난 모습이나 보여 드리고….”

“아닙니다. 그만큼 저도 거는 기대가 커서 이 상황이 안타까워 드린 말씀이니 팀장님께서 늘 보여 주시는 저력 다시 보여 주세요.”

회사에 있는 ‘실장 권태정’은 굉장히 단단해 보였다. 누구에게도 또 어떤 상황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겸은 권태정을 철거촌에서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권태정은 아주 당당하고 단단해 보였다. 이렇게 크고 좋은 회사와 사무실에 비해 험지라 할 수 있는 다람동으로 오게 됐는데도 전혀 괴로워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자신을 흔들 수 없다는 듯 꼿꼿하고 여유로웠다.

“복귀하신 첫날부터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뵐게요.”

“내려가 보겠습니다.”

“네.”

소파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권태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서늘해 보이는 얼굴은 머금은 감정의 온도에 비해 훨씬 더 차가워 보였다.

이겸은 어쩐지 긴장되어 꽉 조이는 마음을 붙든 채 얼른 원래 제가 있어야 할 책장 뒤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꼭 몰래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 아주 빠르게 뛰었다.

“이겸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겸은 저를 부르며 들어오는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이런 목소리나 웃음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권태정이 아주 다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어떡해…. 눈만 봐도 부끄러워…. 요란히 뛰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겸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제가 시선을 떨어뜨린 쪽으로 몸을 구부리고, 또 고개를 기울이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왜 나 안 보고 피해.”

“…피, 피한 거 아니에요….”

“방금 보다가 피했잖아. 나 보기 싫어? 기껏 데려오더니 혼자 둬서 화났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이겸이 시선을 마주하는 건 역시 부끄러워 권태정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응, 그런 게 아니라?”

여기저기 쪽, 쪽 입을 맞추는 것에 온 정신을 쏟던 권태정이 고개를 겨우 들어 눈을 맞췄다.

“…실장님 일하시는 게 너무 멋있어서요….”

“내가 일하는 게? 나 그냥 팀장님이랑 얘기만 했는데.”

“실장님 표정이나 말씀하시는 게… 평소랑 달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또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아, 그랬어? 우리 자기 좀 딱딱하게 대하는 거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대할까? 이름도 성 붙여서 부르고?”

몸을 더 밀착하자 권태정의 페로몬 향이 확 더 짙게 끼쳤다. 이겸은 제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와 속삭이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연이겸 씨, 나 일하는 거 몰래 보면서 또 무슨 생각했어요?”

“흣….”

갑자기 귓속으로 깊게 파고드는 목소리가 무척 낮았다. 이겸은 권태정의 목소리에 노출된 채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회사에서 신음하면 곤란한데….”

“시, 실장님….”

“연이겸 씨가 사무적인 태도를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그렇게 해 줬을 텐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그런 거….”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평소보다 더 딱딱한 말투로 성을 붙여 이름까지 부르는 권태정에게 그 어떤 말도 잘 나오지가 않았다. 이겸은 일렁이는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한 채 겨우 권태정을 조금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연이겸 씨 또 나 피하네.”

“…그게….”

“나 좋아해요, 연이겸 씨? 자꾸 눈도 못 보고, 응? 말도 못 하고. 난 사내연애는 취향 아닌데.”

제가 말을 할 때마다 움찔대는 어깨나 흔들리는 눈동자 같은 게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권태정은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귓가에 살짝 입 맞추고는 허리를 부드럽게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그래도 연이겸 씨라면 취향 바꿔 볼 생각도 있어요.”

그새 빨개진 귓가에 다시 입술을 붙인 권태정이 부드럽게 턱을 잡아 돌려 눈을 맞췄다. 부끄러워 그런 건 알지만, 아까부터 저를 제대로 봐 주지 않는 게 애가 타서 이제 장난이라도 더 오래 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진짜야. 난 사내연애는 절대 안 해야 한다는 주의인데 만약 이겸이 널 회사에서 만났으면 바로 생각 달라졌을 거야.”

“…정말요?”

“그럼. 우리 이겸이가 있는 곳이 내가 사랑할 곳이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권태정을 만난 곳이 어디였든 그를 좋아하게 됐을 것이었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겸은 지금도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긴 다리를 펴고 앉아 있던 권태정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저에게 잘 자라 말하던 순간의 공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

그리고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만약 권태정의 말대로 회사에서 만났다면, 제가 조금이라도 더 상황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근처에라도 올 수 있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아쉬움이었다.

“실장님…. 저도 열심히 하면 이렇게 좋은 회사… 다녀 볼 수 있을까요?”

“회사? 그럼, 당연하지. 우리 이겸이 뭐든 다 할 수 있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빚을 갚는 게 유일한 목표였어서…. 다른 건 생각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생각을 해 봐도 잘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

“…열심히 해서 실장님이랑 같은 회사에… 다녀 보고 싶어요.”

“그럼 우리 사내 부부 되는 거네.”

사내 부부라는 말에 심장이 쿵쿵 다시 빠르게 뛰었다. 권태정과 함께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얼굴을 보고, 또 된다면 퇴근을 같이 하기도 하는 그런 순간들을 상상만 해도 너무나 기뻤다.

“나중에 삐약이 조금이라도 크고 나면…. 그때 해 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요.”

“이겸아, 하고 싶으면 오늘부터 당장 해도 돼. 삐약이도 중요하지만, 난 우리 이겸이의 오늘이 더 중요해. 애기 때문에 이겸이 네가 하고 싶은 걸 뒤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

“하고 싶은 게 생겼으니까 같이 더 얘기해 보자. 난 우리 이겸이가 하고 싶은 게 생겨서 너무 좋아. 그게 뭐든 다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알았지?”

권태정의 말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머뭇댐도 없었다. 할 수 있다고, 그게 무엇이든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이제 진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응, 우리 애기 뭐든 다 할 수 있어.”

입술을 마주 대자 이겸이 미소 지었다. 권태정은 제 입술 위로 번지는 이겸의 웃음을 느끼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아니,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았다. 지금 이 행복을 시작으로 더, 더, 행복해지기만 할 거니까.

권태정은 알고 있었다. 이 행복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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