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오래간만에 출근해 직원들의 환영과 인사를 넘치게 받은 권태정이 백 비서와 함께 실장실로 들어갔다. 한동안 휴가 아닌 휴가를 받아 잘 쉰 백 비서의 얼굴은 몹시 좋아 보였다.
“백 비서님, 간만에 다시 태성으로 출근한 기분이 어떠세요?”
“너무 좋습니다. 돌아오신 거 정말 환영합니다, 실장님.”
“회사로 돌아온 건 좋긴 한데…. 우리 애기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고….”
“…애기? 아, 연이겸 씨요?”
“네. 삐약이랑 둘이 잘 있을 수 있을까.”
백 비서는 태명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르는 권태정을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안 그러지만, 가족들에게는 워낙 살갑고 유들유들한 성격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서 삐약거리는 걸 들으니 솔직히 좀 놀라웠다.
“아, 진우야. 나 결혼한다.”
“네? 결혼 날짜 잡으셨어요?”
“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데 편하게 해.”
“…결혼 날짜 잡았어? 언제 결혼하는데?”
“한 3주 남았어.”
석 달도 아니고 3주가 남았다는 말에 더 놀란 백 비서가 권태정이 앉은 소파 맞은편으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빨리?”
“그게 빠른 거야? 난 시간 안 가서 죽겠는데. 아, 그리고 넌 나랑 이겸이 공통 지인이라 식 올 수 있어. 축하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하객은 나랑 이겸이 둘 다 아는 사람만 부르기로 했거든.”
싱긋 웃은 권태정이 앞에 앉아 저와 이겸이 둘 다 아는 사람들을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세는 백 비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올 사람이 많이 없지 않아? 회장님, 사모님…. 사장님, 부사장님…. 나, 조현준…. 또 누가 있지?”
“거기에 이겸이 알바 같이한 애들 알지? 그 개, 고양이, 곰. 그 정도?”
“아, 그럼 스몰 웨딩인가. 그거 하는 거야?”
“아니? 우리 호텔에서 초호화로 할 거야. 청첩장은 나오면 줄게.”
“어? 어…. 어, 고마워. 내가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기다란 다리를 꼰 권태정이 뭔가 고민이 있다는 듯 백 비서와 눈을 맞췄다.
“진우야. 내가 고민이 하나 있거든?”
“응, 뭔데?”
“결혼을 비공개로 할 건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결혼하면 분명히 말이 퍼질 거란 말이지. 누구랑 하는지 어떻게든 알아내서 퍼뜨리려고 난리가 날 거 아냐.”
“음, 아무래도 그렇지. 보통 재벌가도 아니고, 또…. 언론을 좀 타기도 했었고.”
백 비서의 말대로 제가 언론을 꽤 시끄럽게 장식했었고, 또 떠들기 좋은 위치에 있는 집안의 사람인만큼 분명 이겸에 대한 이야기도 이리저리 떠돌게 될 게 분명했다. 알아내려고 하면 제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좀 먼저 보도 자료를 뿌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거든. 태성그룹 삼남, 권태정 일반인과 비공개 결혼식 올릴 예정. 이 정도로 뿌리고 추측성 보도 낼 경우 법적 조치한다고 미리 싹 돌리면 뭐 알아서 조심하지 않겠어?”
“아, 그것도 좋을 것 같아. 안 알리고 조용히 해도 어떻게든 소문은 날 거야. 정식 기사로 알려지는 거랑 찌라시로 퍼지는 건 말의 수준도 다르고. 차라리 정식 보도 자료로 먼저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이드라인 주는 대로만 보도하라고 하면 되고, 어기면 법적 조치 세게 가면 되고.”
“이겸이한테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해야겠다. 나는 무슨 소릴 들어도 괜찮은데 이겸이가 걱정이야. 아, 아빠가 좀 평범한 직장인이면 얼마나 좋아. 그럼 이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
한숨을 쉬며 소파 뒤로 고개를 젖히고 있던 권태정이 이내 머릿속에 맺히는 이겸을 떠올리며 침음했다.
“…진우야. 어떡해.”
“왜? 또 무슨 일 있어?”
“이겸이가 너무 보고 싶어.”
“…아…. 그래. 출근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재택근무하면 안 되나.”
“회장님 눈 밖에 나고 싶으면 말씀드려 보고.”
냉정하게 말하는 백 비서를 불만스럽게 바라본 권태정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 앉았다. 복귀 첫날인데도 책상에는 그동안 검토하지 못한 일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럼 저도 나가서 일 보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실장님.”
“네, 백 비서님.”
다시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눈 권태정이 서른 개는 족히 넘게 쌓인 파일 가장 위에 있는 것을 들어 펼쳤다. 부디 이 서류들을 모두 보고 덮었을 땐 이겸을 볼 수 있는 저녁이 되어 있기를 바라며.
* * *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정은 차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어디 가는지 묻는 백 비서에게 집에 간다고 말하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원래 이겸과 떨어져 있으면 늘 보고 싶고, 생각이 나니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침에 그렇게 페로몬을 잔뜩 묻혀 주고, 또 저도 들이마시고 왔는데도 이겸을 당장 보지 않으면, 끌어안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권태정은 서둘러 시동을 걸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급한 마음 끄트머리에 매달린 안전이라는 단어를 상기하며 속도를 높였다.
집에 도착해 개인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권태정은 미친 듯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연타를 한다고 해서 더 빠르게 올라가는 게 아닌데도 계속해서 불이 켜진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얼마나 마음이 급하고 미칠 것 같은지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 가만히 서 있는 게 전부인데 숨이 가빠졌다. 머릿속도 마구 흔들리고, 손발이 다 차갑게 식는 느낌이 났다.
권태정이 원하는 층에 당도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을 때 권태정은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꼭 산소가 모자란 사람 같았다. 겨우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려 어지러워 마구 흔들리는 눈앞을 똑바로 보려 애쓰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끼치는 복숭아 향에 권태정은 이제 거의 울 것만 같았다.
구두를 어떻게 벗었는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이겸이 있는 곳을 찾아 거침없이 걷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이겸이 나타났다.
“…실장님.”
갑자기 집에 온 저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이겸을 본 순간 울컥 감정이 전부 쏟아졌다. 권태정은 쏟아지는 저의 감정들과 함께 이겸을 뒤덮으며 끌어안았다.
“보고 싶어서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낮게 가라앉아 떨리는 권태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겸은 울먹이며 권태정을 가득 품에 안았다.
“저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실장님….”
“어떡해, 이겸아…. 너 없으니까 숨도 잘 안 쉬어져.”
안쓰럽다는 듯 권태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이겸이 얼른 손을 잡아 침대로 이끌어 앉혔다. 늘 따뜻하기만 하던 손이 드물게 차가운 것에 놀라 이겸은 권태정의 옆에 앉아 내내 냉기가 도는 손을 만져 주었다.
“아침엔 그래도 일하면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지날수록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 기억도 안 나….”
젖은 눈동자를 보며 울먹인 이겸이 아침보다 핏기가 없어 보이는 권태정의 뺨을 매만졌다. 제 손에 얼굴을 비비고 입 맞추는 권태정이 안쓰러우면서도 너무나 좋았다.
“저도 실장님 너무 보고 싶어서… 베개 계속 안고 있었어요.”
“베개?”
제 베개가 이겸의 자리 쪽에 있는 것을 본 권태정이 그제야 작게 웃었다. 이제 숨도 잘 쉬어지고 웃음까지 나오는 걸 보니 역시 아까는 이겸과 떨어져 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베개 말고 나 다시 안아 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다시 두 팔을 벌리며 권태정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토록 서로 원하던 몸을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이제야 깊은 안정이 찾아들었다.
이겸과 마주 닿은 곳부터 온기가 번져 따뜻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이윽고 손끝까지 그 온기가 번졌을 때 권태정의 숨도 안정을 찾아 고르게 흘렀다.
“어, 실장님 손 이제 따뜻해졌어요.”
제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조물거리는 이겸을 가만히 보던 권태정이 다른 손으로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입술을 머금었다. 놀라서 어깨를 움찔대면서도 스르르 감기는 눈이나 벌어지는 입술, 그리고 뒤섞이는 숨과 혀,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으음…. 응….”
혀끝을 애가 닳을 만큼 약하게 빨다가 핥아 올리면 이겸의 목에서 아주 연약한 소리가 울렸다. 권태정은 그 약한 신음이 좋아 자꾸만 이겸의 애를 태웠다. 이겸의 몸이 기울고, 두 손으로 권태정의 목을 먼저 가득 끌어안을 때까지.
저에게 완전히 기울어진 이겸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다리 위로 올린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더 깊게 마주 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이겸의 반응이 귀여워 애를 태웠지만, 이젠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아…. 으응, 흣….”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깊게 입술을 맞물린 채 이겸의 숨과 타액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었다. 숨이 찰 텐데도 저를 밀어내지 않고 당기기만 하는 이겸이 좋아 머릿속에 겨우 아직 붙어 있는 이성이 자꾸만 뭉그러졌다. 저는 사람이 맞는데 그냥 사람인 걸 포기하고 멋대로 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러다 정말 섹스까지 해야 끝나겠다 싶을 때쯤 겨우 입술을 뗀 권태정이 이겸의 가느다랗고 하얀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혀끝이 열이 오른 목덜미를 핥으며 지나자 가쁜 숨을 내쉬던 이겸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하…. 너무 좋아, 이겸아. 떨어지기 싫어.”
“하아…. 하으, 저도… 저도, 하아…. 좋아요.”
쏟아지는 숨 사이로 흐트러지는 듣기 좋은 목소리도 지나치게 좋아 침음한 권태정이 발그레 달아오른 눈가에 가만히 입 맞췄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겸과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점심 먹고 회사 같이 가자.”
“회사에요?”
“응. 오늘은 진짜 두고 못 가겠어.”
“저도… 회사에 가도 돼요?”
“그럼. 되지. 실장실 크거든. 안에 쉬는 데도 있어. 오늘은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 내일부터는 진짜 잘 참아 볼게.”
애원하듯 말하는 권태정의 말을 이겸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회사에 가서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걱정도 들지만…. 그래도 권태정이 괜찮다고 했으니 함께 가서 오후 내내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고 싶었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온기도 없고, 저를 보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베개를 안고 권태정만 그리워하며 울고 싶지 않았다. 또 그가 일하는 곳을 한 번쯤은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실장님 괜찮으시면….”
“나야 당연히 괜찮지. 오늘은 누구 들어올 일도 많이 없어. 오후 회의도 없고. 인사도 아침에 다 해서 오후엔 조용할 거야. 같이 있다가 퇴근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좋아요.”
이겸의 허락이 완전히 떨어지자 그제야 원래대로 씩 웃은 권태정이 이겸을 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점심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머릿속으로 이겸이 자주 먹던 링 모양의 초콜릿 시리얼이 떠올랐다. 전에 한 입 먹었을 때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달아서 제가 찾아 먹을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바로 그 시리얼이었다. 권태정은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진 게 웃겨 실소를 터뜨렸다.
“저… 시리얼 먹고 싶어요. 초코 시리얼.”
그리고 저와 같은 생각을 말하는 이겸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정말 조현준이 말한 그 ‘동기화’가 아주 제대로 된 모양이었다. 아, 이대로 안 풀렸으면 좋겠다, 진짜. 그럼 이겸이가 하는 생각 전부 다 알 수 있을 텐데.
“나도 지금 그 생각했는데.”
“실장님 그 시리얼 달아서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나 이제 이겸이 입맛이랑 똑같아질 건가 봐. 애기 입맛.”
이겸을 식탁 의자에 내려놓으며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권태정이 커다란 시리얼 박스를 들어 식탁 위로 놓았다.
그리고 시리얼끼리 부딪치며 달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둘만의 소소하고 달착지근한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