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결혼식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건 서로 따질 거 따지면서 과한 절차 밟을 때 그런 거고, 솔직히 저희는 그럴 거 없잖아요. 지금 저 사는 집에서 살 거니까 집도 됐고, 가구도 뭐 다 있고, 식장도 된다 그러고…. 음, 반지랑 예복만 맞추면 되는데 시간 충분하지 않을까요?”
권태정의 말을 듣던 권유정이 뭔가 생각난 듯 초콜릿을 먹다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태정아, 웨딩 촬영은 안 할 거야?”
“아, 결혼사진. 이겸아, 어때? 사진 같이 찍을까? 찍어서 거실에도 걸고, 침대 옆에도 걸고, 현관에도 걸자.”
몹시 기분 좋아 보이는 권태정이 귀여워 웃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 여기저기에 권태정과 제가 결혼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진들이 걸려 있으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뭐 웨딩 촬영까지 한다고 해도 3주면 준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하객 관련해서 엄마, 아빠 양해를 구하고 싶은데요.”
권태정의 입에서 하객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이겸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어머님과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하객은 저랑 이겸이가 둘 다 아는 공통 지인만 부르고 싶어요. 다행히 우리 엄마, 아빠랑 누나, 형은 공통 지인 안에 들어가셔서 식장에 오실 수 있겠네요.”
분위기가 딱딱해지지 않도록 웃으며 말한 권태정이 제 부모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마 제 부모님이라면 이 정도만 말씀을 드려도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권태정의 예상대로 곧 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생각하고 있었어. 결혼이라는 게 많은 사람 축하받는 것도 좋지만, 무리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랜드볼룸에서 한다고 해서 거기까지 태정이가 생각 못 한 줄 알았는데 우리 막내 진짜 다 컸네.”
“엄마, 나 이제 막내 아니야. 난 진작 다 커서 막내 이겸이한테 줬잖아.”
“참 그렇지. 이제 우리 막내는 이겸이지.”
서로 눈을 맞추고 웃는 엄마와 이겸을 번갈아 본 권태정이 싱긋 웃으며 이겸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객이 적으니 사실 그렇게 큰 홀에서 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맞아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거기가 제일 예쁘잖아요. 그래서 포기가 안 돼요. 그건 제 의견 따라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 준비는 엄마도 도와줄게.”
“그럼 예복 맞추는 것 좀 도와주세요.”
“응, 그래. 엄마가 내일 바로 알아보고 말해 줄게.”
가족끼리 분담을 해서 척척 진행이 되는 분위기에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이겸이 살짝 권태정의 옷소매를 당겼다.
“실장님, 전… 뭐 할까요?”
제 소매를 잡고 묻는 눈망울이 예뻐 침음한 권태정이 아예 이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과격한 감탄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참아 내는 게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냥 욕 좀 하고 아빠한테 한 대 더 등짝을 맞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자기는 나랑 결혼해 주기만 하면 돼.”
참지 못하고 뺨에 가볍게 입 맞춘 권태정이 발그레 달아올라 아빠, 엄마 눈치를 보는 이겸의 턱을 부드럽게 쥐어 다시 저를 보게 했다.
“시간 잘 내 볼 테니까 예복도 같이 맞추러 가고, 사진도 예쁘게 찍자.”
“네. 좋아요.”
“예뻐 죽겠네, 진짜.”
가족들에게 전할 얘기도 대충 다 했겠다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권태정은 이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부모님을 돌아보았다.
“저희 이제 집에 가 볼게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이겸이 이제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둘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태정이 너 얼굴에 다 보여.”
놀리듯 말하는 권유정에게 씩 웃어 보인 권태정이 나오지 마시라고 손짓한 다음 소파를 벗어났다. 그에 놀란 이겸이 얼른 뒤돌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신발을 신고 나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쟤를 어쩌면 좋냐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귀엽지 않냐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웃기만 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 * *
이겸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권태정이 다시 태성그룹 본사로 정식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권태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출근하는 권태정을 보고픈 마음에 이겸은 몰래 알람을 맞춰 두었다.
잠은 언제든 잘 수 있지만, 출근하는 권태정을 보지 못하면 저녁까지 볼 수 없기에 꼭 잠시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부지런한 권태정은 저보다 훨씬 더 먼저 일어나 운동을 하고 씻는 중일 것이었다. 저도 전에는 나름 부지런하게 살았는데 삐약이를 가진 뒤로는 정말 이렇게 지내도 될까 싶게 자고 먹고 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게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너무나 편한 삶이라 오히려 불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 일어났어? 더 자지.”
씻고 나온 권태정이 침대에 앉아 있는 이겸을 보고 놀라 얼른 다가왔다. 이겸은 갓 씻어 따뜻하고 촉촉한 권태정을 안고 웃으며 쪽, 쪽 뽀뽀했다.
“실장님 출근하시기 전에 얼굴 보고 싶어서요.”
“이겸아, 나 그냥 지금이라도 때려치울까. 일 안 해도 돈 많은데.”
“회사로 돌아가길 바라셨잖아요. 실장님이 회사에서 진짜 중요한 일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자리 비우신 동안 아버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대요.”
“엄마한테 들었어?”
“네…. 그리고 실장님께서도 회사 일하는 거 좋아하신다고 하셨어요.”
“뭐 일하는 게 엄청 좋지는 않은데…. 그냥 열심히 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게 좋았어. 내가 해냈다는 그 느낌?”
권태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웃은 이겸이 보송보송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가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무사히 철거를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전부 알기에 회사로 복귀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우리 삐약이가 실장님의 그런 멋있는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일 열심히 하는 게 멋있어?”
“네….”
“또 뭐가 멋있어? 다른 건 멋있는 거 없어?”
아침이라 더 짙게 나는 페로몬 향에 움찔한 이겸이 이제 다시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권태정을 보며 살짝 긴장했다.
“얼굴이랑… 목소리도 멋있어요….”
“맞아. 우리 자기 내 얼굴 좋아하지. 섹스할 때 내 얼굴 보면 계속 서잖아.”
“…그, 그건…. 제가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서서 힘든 거 알아.”
이겸의 다리를 가리고 있는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무릎을 만지다가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자 다리가 확 오므라들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랫배가 찌릿해지는 걸 느낀 권태정이 다른 데에 비해 말랑한 허벅지 안쪽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았다.
역시 출근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출근 따위만 안 했어도 당장 저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을 테니까. 권태정은 한숨과 함께 시간을 확인했다.
“키스할까. 오 분만. 페로몬 묻혀 줄게.”
권태정이 닿는 것만으로도 살짝 달아오른 이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를 덮치듯 다가와 입술을 머금고 파고드는 권태정에게 밀려 몸이 기울어졌다.
“…으응….”
이겸은 어제 자기 전에도 한참이나 떨어지지 못하고 키스했던 것을 떠올리며 제 몸 위를 뒤덮는 권태정을 끌어안았다. 혹시나 배를 심하게 누를까 싶어 권태정은 요즘 제 몸을 뒤덮다가도 살짝 몸을 옆으로 틀어 마주 끌어안고는 했다.
아, 어떡해…. 너무 기분 좋아. 이겸은 방 안이 온통 권태정의 향으로 꽉 찰 만큼 강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몸을 떨었다. 제 온몸이 온통 권태정의 페로몬으로 절여지는 느낌이 좋아 발끝이 움츠러들고, 권태정을 안고 있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도, 또 숨과 함께 섞이며 문질리는 혀의 느낌도 너무 좋아 이대로 떨어지지 않고 내내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느릿하게 입술이 떨어졌다. 이겸은 조금 아쉬움이 묻은 눈으로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오 분 벌써 지났어요?”
“오 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미치겠네.”
못 참겠다는 듯 다시 입술을 머금은 권태정이 조금 더 달아오른 이겸의 입 안을 잔뜩 헤집었다. 혀끝이 문질리고, 서로의 입 안으로 빨릴 때마다 너무 좋아서 온몸이 다 찌릿했다.
“으응…. 실장님….”
“일 끝나자마자 올게. 밥도 있고, 과일도 있고 다 있는데 집에 있는 거 안 먹히고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해. 알았지? 굶지 말고.”
“네….”
“우리 애기 두고 회사를 어떻게 가.”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거의 임박할 때까지 이겸과 안고 있던 권태정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에도 대충하고 간 적이 없지만, 회사에 정식으로 복귀하는 첫날이니만큼 특별히 더 신경을 써 슈트를 고르고, 머리까지 매만졌다.
“이겸아, 나 어때?”
권태정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던 이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권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도 정말 멋있고 잘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더 멋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너무 멋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이겸의 뺨에 입 맞추는데 울리는 진동에 권태정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정 기사의 메시지였다.
“이제 나가야겠다. 이겸아, 졸리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니까 편하게 있어. 알았지? 퇴근하자마자 날아올게.”
“네에…. 조금 더 기다려도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오세요, 실장님.”
“우리 자기 착해서 어떡해.”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커다란 몸을 숙여 도저히 두고 못 가겠다는 듯 이겸을 안고 뽀뽀하던 권태정이 이번에는 정 기사에게 전화가 오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이겸은 현관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권태정과 눈을 맞춘 채 손을 흔들었다.
“…….”
문이 닫히자 시무룩한 얼굴을 한 이겸이 이내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권태정과 내내 붙어 있어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적응이 잘 안 되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여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애가 아니라 어른이니까 이런 걸로 속상해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삐약아, 실장님 벌써 보고 싶다…. 그치.”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가시지 않아 침실로 간 이겸은 권태정의 페로몬 향이 가득한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의 베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퍼진 마른 장미향이 이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또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괜찮다는 듯, 잘 자라는 듯. 그래서 이겸은 꼭 권태정의 품에 안긴 것처럼 다시 깊게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부디 그가 올 저녁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