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3화 (133/174)

#133

권태정의 연락을 받고 미리 나와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랜드볼룸이라고 적힌 홀로 들어간 이겸은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 입을 퐁 벌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좋다는 건 들어 알고 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고, 또 훨씬 더 멋졌다.

“와아….”

이겸은 한참이나 감탄을 금치 못하며 홀 안을 권태정과 천천히 걸어 구경했다. 그리고 역시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홀 전체를 꽃으로 채우고 싶은데요.”

“아, 네. 가능합니다. 보통 그렇게 꽃으로 장식하시는 걸 선호하셔서 여기 입장 로드, 하객 테이블, 그리고 샹들리에, 그리고 로드에 플라워 아치를 설치해서 보다 화사하고 예쁘게도 진행 가능합니다.”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만.”

대외용 웃음을 적당히 지은 권태정이 여전히 멍한 이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이겸아, 여기 어때? 여기서 하게 되면 들어가는 이 앞에 길이랑 이 길옆으로 있는 테이블, 그리고 곳곳에 다 꽃이 놓일 거야.”

“저희 예식 사진 몇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커다란 태블릿PC를 꺼내 얼른 꽃으로 예쁘게 장식된 예식 사진을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꽃이 없어도 위압감이 들 만큼 멋진 곳인데 화사한 꽃들이 가득 놓이니 정말 너무 예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예뻐요, 실장님.”

“마음에 들어?”

“네….”

이렇게 예쁜 곳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라 이겸은 다시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혼자 구경하는 이겸을 귀엽다는 듯 눈에 담으며 권태정이 옆에 선 직원에게 물었다.

“최대 몇 명까지 수용 가능한가요?”

“최대 팔백 분까지는 수용 가능합니다.”

“아, 그래요.”

“실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홀이 전국 최대 규모에 우아함까지 갖춰서 하객분들이 많으시다면 이 그랜드볼룸 홀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음, 뭐 하객이 많기는….”

이겸을 보며 하객 이야기를 꺼내던 권태정의 말이 뚝 끊겼다. 가장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해 주고픈 마음에 들떠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이유였다.

하객. 이겸이 부를 하객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왜 이제야 떠올린 걸까 싶었다. 그리고 하나를 떠올리니 그 뒤로 제가 간과하고 있던 것들이 줄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셔서 혼주석에 앉을 분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하객을 초대하는 과정에서 이겸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또 무척 속상해질 수 있다는 것까지 떠올린 권태정이 다시 직원을 바라보았다.

“최소 인원 제한 뭐 그런 것도 있나요?”

“따로 제한을 두지는 않고 있습니다.”

“음….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한 오십 명 정도 채우고, 빈 곳은 꽃이나 장식 같은 거로도 채울 수 있을까요?”

팔백 명을 채울 수 있는 곳에서 갑자기 오십 명을 말하는 권태정에 직원이 잠시 놀라다가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원하신다면 그렇게 가능합니다. 하객을 많이 부르고 싶으셔서 선택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 홀만의 분위기가 독보적이라 선택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하객 수는 단 한 분만 오신다고 해도 식 진행 가능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좀 놓이네요. 예식 진행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이 언제인지 정리해서 보내 주시겠어요?”

“네. 실장님. 금일 중으로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인사한 권태정이 저에게 다가오는 이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겸과 결혼한다는 들뜨고 행복한 마음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구경 다 했어?”

“네, 진짜 크고 좋아요. 그런데 실장님….”

“응, 이겸아.”

“여기 있는 테이블 전부… 하객으로 채워야 할 텐데…. 저는 올 사람이 없어서요….”

조금 전 제가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 이겸의 이 말을 듣고 바보처럼 멍해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었다. 권태정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생각하며 이겸의 몸을 한쪽 팔로 끌어안고 입구부터 주례석까지 길게 기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올 사람이 왜 없어. 너랑 같이 탈 쓰고 있던 그 고양이, 개, 하나 뭐지. 곰이었나. 게네도 있고, 그 카페 사장도 부르면 올 거고, 그 뭐야. 이벤트 회사 사장인가도 초대해야지. 또, 그 세탁소 아주머니도 오시지 않겠어? 아, 그리고 돌팔이…. 아니, 현준이도 이겸이 네 손님으로 부르자. 내 손님으로는 별로 부르고 싶지가 않네.”

“…….”

“그리고 요즘 보면 우리 엄마, 아빠도 이겸이 엄마, 아빠로 참석할 가능성이 커 보이던데.”

주례석이 있는 앞까지 걸어간 권태정이 몸을 구부려 울먹이는 이겸과 눈을 마주했다.

“우리 둘이 같이 아는 사람만 부르자. 테이블이야 다 빼면 되지. 그만큼 다 꽃으로 채우면 더 예쁠 거야.”

“…제가 실장님이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하는데?”

“…착하게….”

착하단 말에 권태정은 웃고 이겸은 울었다. 어떤 경우에도 저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어떻게든 제 쪽으로 기울어져 배려해 주는 권태정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겸은 권태정이 혼자 손님 초대를 해도 이 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며 알게 된 사람도 많을 거고, 또 회사 밖에도 아는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었다. 거기에 친척까지 부르면 이 홀이 부족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 하나를 위해, 부모님도 없고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도 딱히 없는 저를 생각하며 둘이 같이 아는 사람만 부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겸은 태어나 이렇게 착하고, 또 따뜻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착해서 우는 거야?”

“…실장님만 계속… 계속….”

“응, 계속.”

“…저한테 다… 맞춰 주시니까….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권태정은 이제 이겸의 말을 굳이 이해하려는 과정을 크게 거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제가 말없이 빚을 갚았을 때 이겸이 마냥 좋아하지 못했던 그때와 비슷한 감정일 것이었다.

“내가 우리 이겸이한테 맞추는 건 너무 당연한 거야. 사랑하니까.”

“…….”

“그리고 나만 맞추는 거 아닌데. 이겸이 너도 나한테 맞춰 주잖아. 내가 인사드리러 가자고 하면 무서워도 가고, 엄마가 만나고 싶어 하면 그것도 날 생각해서 가고, 들떠서 결혼식 하나만 보고 이 큰 홀에 데려와서 어떤지 묻는 나한테 착하다고도 해 주고.”

“…….”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 이겸이가 날 사랑하니까 날 생각해서 맞춰 주는 거지.”

“…….”

“그리고 나도 사랑하니까 내가 아니라 이겸이 너한테 맞추는 거고. 나보다 우리 이겸이가 더 중요하니까. 하객 따위는 안 불러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깟 하객 때문에 네가 속상한 건 진짜 싫으니까.”

솔직한 권태정의 말에는 아주 큰 힘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꾸는 힘과….

“…생각해 주시는 게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초대하고 싶은 분들 많으실 텐데 저 때문에 다 못 부르시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죄송해서….”

“이겸아. 너만 나한테 와 주면 돼.”

“…….”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

“나한테 와 줘. 결혼해 줘.”

그리고 권태정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게 하는 아주 커다란 힘이.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먼저 한 걸음 다가가 권태정을 끌어안았다.

“아…. 프러포즈 진짜 더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반지도 없이 이게 뭐야.”

권태정을 안은 채 고개를 저은 이겸이 살짝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는 다정한 연인과 눈을 맞췄다.

“…반지 같은 건 하나도 안 중요해요.”

“…….”

“…실장님만 계시면 저도…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나야 항상 여기 있지. 우리 이겸이랑 같이.”

다시 권태정을 가득 끌어안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정말 그거 하나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사랑해요, 실장님.”

이겸의 진심은 늘 권태정을 무너뜨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져 본 적이 없던 권태정은 이 무너짐이 너무나도 좋았다. 권태정에게 사랑이라는 게 그랬다. 제 원래의 모습을 잃고 무너져 이겸의 모습이 되는, 그것이 권태정의 사랑이었다. 권태정은 오늘도 한층 더 이겸의 모습에 가까워진 채 그다음 무너짐을 기다렸다.

“응, 나도 사랑해. 나보다 더.”

이겸아, 너는 알까. 내가 널 사랑하며 남기는 이 흔적들이 그동안 살아오며 느낀 내 모든 감정의 흔적보다 크다는 것을.

결국은 사랑 하나만 남을 거야. 너를 향한 사랑 하나만.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기다려. 오롯이 너로 물들어 또다시 너에게 무너질 그 순간을.

* * *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이겸과 함께 집으로 간 권태정은 오는 김에 가지고 온 이겸의 홈웨어 몇 벌과 속옷 같은 것들을 제 방 서랍에 정리했다. 속옷을 넣을 때는 이겸이 직접 하겠다며 나서며 얼굴을 붉혔다.

권태정은 쪼그려 앉아 서랍에 속옷을 숨기듯 넣는 이겸의 뒤에 딱 붙어 앉아 머리칼과 뺨, 귓가 여기저기에 뽀뽀하며 이겸을 간지럽혔다.

“아빠가 아마 오늘 결혼 얘기하실 거야. 언제 할 건지, 어떻게 할 건지…. 뭐 계획은 세웠는지 말씀하실 것 같아. 식장 가 본 거 아직 말씀 안 드렸거든.”

“아….”

“이따 가족들이랑 얘기해 보자.”

“네….”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저에게 쏟아지는 페로몬 향에 살짝 몽롱해짐을 느끼며 권태정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권태정의 페로몬에 파묻히면 너무너무 안정이 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 여기저기에 묘한 감각들이 달라붙기도 했다. 이겸은 몸을 돌려 권태정에게 안긴 채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내려가자. 고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오늘 저녁 스테이크래. 안고 갈까?”

“거, 걸어서….”

장난으로라도 고개를 끄덕이면 진짜 저를 안고 내려갈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놀라 몸을 일으킨 이겸이 바닥에 앉아 있는 권태정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일으켰다.

“그래도 삐약이가 오늘은 이겸이 아빠 좀 잘 먹게 해 주려나 보네. 앞으로도 그래 줘.”

이겸의 배를 손바닥으로 덮고 부드럽게 토닥인 권태정이 이겸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다음에 올 때부터는 그냥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게 1층 방이나 별채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이닝룸으로 들어가기 전 권태정은 이겸을 잠시 세우고 음식 냄새를 먼저 맡게 했다. 다행히 스테이크 냄새는 이겸을 안으로 당겼다. 이겸은 자리마다 놓인 아주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테이크는 아주 맛있었다. 간만에 양껏 맛있게 먹은 이겸은 권유정이 사 온 복숭아 무스와 따뜻한 차까지 디저트로 먹고, 예쁜 모양의 초콜릿도 두 개 먹었다. 권태정의 부모님은 잘 먹는 이겸을 아주 흐뭇하게 보며 디저트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 두 사람 결혼식 얘기는 좀 해 봤고?”

“아, 네. 우리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하고 싶어요. 며칠 전에 가서 보고, 가장 빠르게 식 올릴 수 있는 날짜 알려 달라고 했는데 제일 빠른 날이 3주 뒤라 그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3주? 그렇게 빨리?”

“전 다음 주쯤 하고 싶었는데 다음 주엔 예식이 다 잡혀 있어서 시간을 뺄 수가 없대요.”

다음 주쯤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권태정의 말을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에 의아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고개를 기울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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