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30화 (130/174)

#130

계단을 내려가자 거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겸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계신 권태정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과 웃음소리를 들으니 안 그래도 좋던 기분이 더 좋아졌다.

“아가, 이겸아. 잘 잤어?”

“네, 덕분에 실장님 오실 때까지 한 번도 안 깨고 푹 잤어요.”

“밥 먹여서 재울까 하다가 태정이 오면 같이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안 깨웠어. 배고프지?”

배고프냐는 질문을 받자 그제야 배가 고픈 게 느껴졌다. 이겸이 웃자 권태정이 뺨에 입을 맞추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들께 저녁 식사를 부탁드렸다.

“…….”

잠시 혼자 남은 이겸은 권태정의 아버지를 보다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모아 잡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니임….”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찾아보니 그냥 아버지, 어머니의 높임말인 아버님, 어머님으로 부르면 된다는 게 나와 사실 이것도 몇 번이나 혼자 연습을 했었다. 이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저를 가만히 보는 권태정의 아버지, 아버님과 눈을 맞췄다.

“어…. 그, 그래. 몸은 괜찮고?”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태정이한테 다 해 달라고 해. 우리한테도 말하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에 싱긋 웃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 아버지의 시선이 부드럽게 풀렸다.

“와, 우리 아빠 벌써 이겸이한테 녹았네. 아빠, 이겸이 예쁘지. 나 보는 눈 높지?”

“그래. 너보다 훨씬 더 나아.”

“맞아요. 우리 이겸이가 나보다 훨씬 더 나아. 엄마, 아빠는 식사하셨어요?”

“아직.”

“그럼 같이 드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부모님을 보며 권태정은 이겸을 데리고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그사이에 식탁에는 맛있는 것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아, 실장님…. 저 화장실 좀….”

분명히 배도 고프고, 뭔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음식들 냄새를 맡으니 확 배 속이 뒤집혔다. 이겸은 순간 치미는 토기에 다이닝룸을 빠져나가 거실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서둘러 권태정의 방 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변기에 고개를 내리자 헛구역질이 마구 났다.

“하아….”

속도 아프고, 목도 아팠다. 그리고 울렁이는 그 느낌이 너무 괴로웠다. 이겸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힘이 빠져 주저앉으려는 순간 권태정의 손이 이겸을 단단히 붙잡았다.

“실장님….”

“우리 이겸이 힘들어서 어떡해. 내가 대신 힘들면 좋을 텐데.”

이겸이 바닥에 앉지 않도록 제가 앉아 다리 위로 이겸을 앉힌 권태정이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힘없이 축 처진 몸이 안쓰러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전 좀 누워 있을게요…. 실장님 저녁 드시고 오세요.”

“아니야, 안 먹어도 돼. 같이 있어.”

“실장님 계속 일도 하고 오셨잖아요…. 얼른 드세요. 네? 저 때문에 실장님도 굶으시면 저 속상해요….”

“아직 배 안 고파서 그래. 그리고 이상하게 나도 좀 냄새 맡는데 비위가 상해서 못 먹을 것 같아. 이따 자기 속 좀 가라앉고 먹고 싶은 거 생기면 그때 그거 같이 먹자.”

속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이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권태정이 싱긋 웃음 지었다. 순간 놀란 이겸이 얼른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더, 더러운데….”

“뭐가 더러워. 하나도 안 더러워. 우리 이겸이는 더러운 거 없어.”

입을 가린 손을 떼고 다시 뽀뽀한 권태정이 이겸과 함께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치질하는 이겸의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겸은 양치질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더 헛구역질을 했다.

편히 갈아입을 옷도 없고, 또 모두가 편하게 해 준다고 해도 단 둘이 있는 것보다는 아직 못할 것 같기에 일단은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진이 빠진 이겸을 부축한 권태정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저희 집에 가 볼게요. 여긴 이겸이 짐도 없고, 가서 편히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응, 그래. 그게 낫지. 입덧이 그렇게 심해서 어떡해. 가여워라.”

울어서 눈가가 불그레한 이겸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 권태정의 어머니가 다가가 가만히 이겸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에 가만히 웃은 이겸도 권태정의 어머니, 어머님의 등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겸아. 가서 푹 쉬고, 속 가라앉은 다음에 뭐 먹고 싶은 거 생기면 태정이한테 다 말하고. 알았지?”

“네에…. 그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 어머님….”

“어머, 이겸이는 어쩜 이렇게 예쁘니.”

몸을 살짝 떼고 정말 너무 예쁘다는 듯 이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살살 누르며 예뻐한 권태정의 어머니가 이번에는 몸을 돌려 제 진짜 막내아들의 손을 잡았다.

“태정아, 이겸이 잘 보살펴. 알았지? 뭐 먹고 싶다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도 말하고. 엄마가 만들어 줄게.”

“그럴게요. 그런데 엄마, 이겸이 예쁘지.”

“그래, 너무 예뻐. 그러니까 조심히 대하는 거 잊지 마.”

그 중에도 제 애인을 자랑한 권태정이 이겸을 다시 조심조심 부축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조수석을 뒤로 적당히 젖힌 다음 이겸을 앉혔다.

시동을 걸고 차고를 나서며 권태정은 어쩐지 차에서 나는 가죽 냄새 같은 것에 이겸이 괴로워하는 것 같아 얼른 제 페로몬을 풀었다. 금세 차 안으로 퍼지는 마른 장미향에 또 토기가 치밀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던 이겸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제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향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도착하면 깨울게. 자고 있어.”

“네….”

손을 뻗어 보송한 뺨을 쓰다듬자 이겸의 눈이 감겼다. 금세 잠드는 게 진짜 애기 같아 귀여우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안겨들던 걸 생각하면 마음이 꽉 수축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다 아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어 속상해진 권태정이 작게 한숨지었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이겸을 안아 들고 집까지 올라온 권태정은 이제 저를 완전히 믿고, 의지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잠든 이겸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데 이렇게 먹는 것으로 고생을 하니 참 걱정이었다. 겨우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복숭아 같은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빵 같은 게 전부라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으음….”

“이겸아. 어디 불편해?”

“물 마시고 싶어요….”

“물? 잠깐만.”

빠르게 방을 나가 너무 차갑지 않게 바깥에 둔 물을 한 병 열어 컵에 가득 따른 권태정이 얼른 방으로 향했다. 그사이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이겸의 옆으로 가 조심조심 컵을 기울여 먹여준 다음 젖은 입술까지 살짝 닦아 주고 얼굴을 살폈다.

“속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졌어요.”

“뭐 먹을 수 있겠어?”

“배가 조금 고프기는 한데….”

점심때 가볍게 브런치를 먹고 먹은 게 없어 확실히 배가 고프기는 했다. 이겸은 조금 쓰린 것 같은 배 위를 문질렀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생각해 봐. 뭐든 사다 줄게.”

“음….”

이겸은 여러 음식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다. 밥, 면, 빵…. 밥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것 같고, 면은 그리 끌리지 않았다. 빵도 요즘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게 그것뿐일 때가 많아 자주 먹었더니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았다.

“…매콤한 거 먹고 싶어요….”

“매콤한 거?”

“네…. 음, 떡볶이….”

권태정의 머릿속으로 그동안 그가 봐 왔던 떡볶이들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권태정은 단 한 번도 떡볶이를 제 스스로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아주머니들께 해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진짜 가끔, 그것도 어릴 때 형이나 누나가 먹다가 하나씩 먹어 보라고 주면 먹었던 게 전부였다.

“떡볶이…. 어, 떡볶이. 얼른 사 올게. 또 더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다른 건 생각이 잘 안 나요.”

“어, 그럼 얼른 떡볶이 사 올게. 떡볶이는 뭐 맛 다 똑같나?”

“음, 너무 많이 안 맵고 달달하면 좋겠어요….”

“알았어. 너무 맵지 않고 달달한 걸로. 빨리 갔다 올게. 어, 집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의 뺨을 매만진 권태정이 얼른 방을 나섰다. 차 키를 챙기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탄 후에야 떡볶이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고민했다.

“…….”

하지만 떡볶이에 대해 평소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매움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식의 매운 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많아 어디 가서 뭘 사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십 분 정도 인터넷을 뒤지던 권태정은 가까운 순서대로 뜨는 떡볶이 가게, 분식집에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혹시 거기 떡볶이가 많이 매운가요? 아…. 매운 정도 조절 같은 건 안 되나요? 네, 알겠습니다.”

정해진 레시피가 있어 매운 정도 조절이 안 된다는 말에 인사를 전하고 끊은 권태정은 그 뒤로도 열 개가 넘는 가게에 전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겸이 좋아할 것 같은 정도의 매운맛으로 파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권태정은 고민하다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디저트를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겸과 입맛이 가장 비슷하기도 하고, 또 누나와 형이 그런 걸 야식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기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였다.

-응, 막내야.

“형, 집이야?”

-응, 좀 전에 들어왔어. 왔다가 갔다면서? 이겸 씨 입덧이 심하다던데 좀 괜찮아?

“응, 그래도 아까보다는 괜찮아졌어. 형, 그런데 전에 누나랑 떡볶이 해 먹었다고 한 적 있지 않아?

갑자기 전화해서 떡볶이타령을 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변죽을 울리며 여유로운 대화를 할 시간이 권태정에게는 없었다.

-떡볶이? 응, 가끔 누나랑 야식으로 해 먹어.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웬 떡볶이? 태정이 넌 잘 안 먹잖아.

“응, 난 그런데 이겸이가 그게 먹고 싶다고 해서. 너무 맵지 않은 게 먹고 싶다는데…. 검색해서 나온 가게에 다 전화해 봐도 매운맛 조절이 안 된다잖아.”

이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온 지 거의 삼십 분이 다 되도록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한심해 저절로 한숨이 다 흘러나왔다.

-그래? 그럼 얼른 집에 와서 가져가. 내가 해 줄게. 말 들으니까 갑자기 나도 먹고 싶네. 누나 먹을 건지 물어봐야겠다.

“정말? 해줄 수 있어?”

-그럼, 별로 안 맵게 할 테니까 집으로 와. 만들고 있을게.

“어…. 별로 안 맵고 달달하게도 할 수 있어?”

-이겸 씨 진짜 우리랑 입맛 비슷하다. 나랑 누나도 그렇게 해 먹거든.

형의 말에 안도한 권태정이 얼른 차를 뒤로 빼며 웃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어두컴컴하던 마음 안으로 빛이 마구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형, 진짜 고마워. 역시 태성의 빛, 권기정.”

-빛처럼 만들고 있을 테니까 얼른 와. 운전 조심하고.

“네, 형.”

아, 진짜 살았다. 막막했던 마음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끊은 권태정이 얼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고에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 주차한 권태정은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형! 어, 누나도 있네.”

“기정이가 만들어 준다는데 안 먹을 수가 있어야지. 이겸 씨는 좀 어때?”

“괜찮아졌어. 요즘 뭘 통 잘 못 먹어서 걱정이야. 이건 잘 먹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걱정이네. 아까 친구 만나서 물어보니까 그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너무 힘든 시기라 옆에서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잊히지가 않는다니까 잘하고.”

권태정의 어깨를 두드린 권유정이 식탁 위로 놓이는 떡볶이를 하나 입에 넣었다. 그리고 권태정에게도 하나 먹여 주었다.

“막내야, 어때? 그 정도면 별로 안 맵지?”

오늘따라 떡볶이가 이상할 정도로 아주 맛있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떡볶이를 통에 담는 형을 보며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맛도 나서 이겸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있어. 이겸이가 좋아하겠다. 고마워, 형.”

“이런 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으니까 뭐 잘 모르겠고 하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전화해. 셋이 머리 맞대면 더 금방 해결될 거 아냐.”

“응, 그럴게.”

“자, 여기. 이겸 씨 배고프겠다. 얼른 가 봐. 운전 조심하고.”

“응, 진짜 고마워. 나 갈게. 나오지 마.”

누나와 형에게 부엌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한 권태정이 떡볶이가 담긴 통이 든 쇼핑백을 들고 얼른 다시 집을 나섰다. 엄마, 아빠에게 왔다 간다는 인사를 하지 못한 게 조금 죄송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겸이 더 중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

조수석에 쇼핑백을 조심히 모신 권태정은 급한 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조심히 도로를 달렸다. 이겸과 삐약이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고 또 지키려면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저부터 지켜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아, 나 철들었나. 이겸이한테 칭찬해 달라 그래야지. 조수석에 놓인 쇼핑백을 보고 씩 웃은 권태정이 다시 어둠을 헤치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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