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이겸의 대답에 권태정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권태정의 어머니도 놀라 아예 이겸을 향해 몸을 반쯤 돌려 앉았다.
“저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작지만 용기와 마음을 담아 밀어낸 말에 귀를 기울여 전부 담은 권태정의 어머니가 얼른 이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불편하기는 왜 불편해. 이겸이도 이제 우리 가족인데.”
“…가족….”
“응, 가족. 이제 아가가 우리 집 막내잖아.”
이겸은 계속 권태정의 어머니가 소리 낸 가족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가족, 가족…. 권태정이 만들어 준 가족. 이겸은 제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고 토닥이는 권태정의 어머니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제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고, 늘 저를 보고 있는 사랑과 다시 눈을 맞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태정이랑 더 상의해 봐. 생각하는 거랑 진짜 와서 같이 쭉 사는 건 다른 거니까. 꼭 들어오는 거 아니더라도 종종 혼자 있기 적적할 때 와서 있다가 가도 좋고. 혹시 혼자 있는데 뭐 먹고 싶은 게 생기거나 아프면 어쩌나 걱정돼서 말한 거니까 절대 부담은 가지지 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아….”
“내가 더 고맙지. 우리 가족 돼 줘서 고마워, 아가.”
너무나 따뜻한 말이 한 방울 더 똑 떨어지자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일렁이던 마음이 넘쳤다. 울지 않으려 꾹 참던 이겸은 가족이 돼 줘서 고맙다는 말에 울먹였다.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뒤덮여 맺히는 것을 본 권태정의 어머니가 얼른 이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우리 자기 울면 기운 빠져서 안 되는데.”
이겸이 울먹이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정은 얼른 옆에 앉아 달래 주라며 비켜 주는 엄마의 자리에 앉아 이겸을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다리 위에 앉혀 꽉 안고 토닥이고 싶은데 엄마가 있어 충동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저야 괜찮지만, 이겸이 부끄러울 테니까.
“…죄송해요. 안 울려고 했는데….”
“삐약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이제 더 자주 본다니까 좋아서 울었나 보다. 그치.”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춘 채 씩 웃은 권태정이 불긋해진 눈가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그제야 이겸도 권태정을 따라 작게 웃었다.
“이따 저녁에 컨디션 봐서 괜찮으면 간만에 드라이브할까?”
“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뺨을 만지다가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 옆을 가리고 쪽 뽀뽀하는 권태정을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커다래진 눈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이겸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소곤댔다.
“괜찮아, 가렸잖아.”
“그, 그래도….”
“그럼 이따 둘만 있을 때 할까?”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낸 권태정은 떼기 싫은 손을 겨우 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고마워.”
“고맙긴. 엄마가 더 고맙지. 네 말대로 예쁜 막내에 손주까지 생겼잖아.”
“앞으로 진짜 내가 더 잘할게.”
“엄마, 아빠한텐 늘 잘하고 있으니까 이겸이한테 더 잘해 줘. 조금도 서운하게 하지 말고. 알았지?”
“네. 그건 걱정 마세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밀자 제 손을 마주 쥐고 손가락을 얽어 오는 이겸을 보며 웃은 권태정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꽉 잡은 채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 별것 아닌 움직임 하나에도 번지는 예쁜 웃음이 좋아 자꾸만 마음 깊은 곳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이겸의 웃음도, 엄마의 따뜻한 시선도, 가득한 사랑이 절대 마르지 않을 거라는 분명한 사실도.
* * *
이겸은 권태정의 어머니를 따라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권태정이 회사에 간 사이에 집 구경도 제대로 하고, 또 앞으로 자주 다닐 집이니 적응도 할 겸 같이 왔는데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큰 집 구경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또 햇살이 반짝반짝한 정원에서 주스를 마시는 것도 무척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태정이 방이야.”
2층도 1층 거실처럼 무척 깨끗하고 밝고, 또 좋은 향이 났다. 얼마나 크고 좋은지 한 층을 구경하는 것도 한참 걸릴 것 같을 정도였다.
“2층 안쪽을 태정이가 혼자 썼었어. 여기가 2층 거실이고, 이 방이 태정이 방, 여긴 욕실, 그리고 저쪽은 드레스룸.”
“…와아…. 집이 너무 좋아요. 이 안쪽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어요.”
“마음에 들어? 앞으로 언제든 오면 여기서 편하게 지내면 돼.”
“너무너무 좋아요.”
“아가가 좋다니 너무 다행이다. 아,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계단 오르내리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래층에도 방 하나 비워 놨어. 나중에 힘들면 거기서 쉬라고.”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게 너무나 고마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이겸이 권태정의 어머니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권태정의 방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을 텐데도 여전히 권태정이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고 또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딱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커다란 침대, 노트북이 놓인 책상, 책들로 가득 찬 책장.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권태정의 집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유정이랑 기정이도 같이 사는 건 알지?”
“아…. 네, 실장님께 말씀 들었어요.”
“유정이는 2층 반대편 안쪽을 쓰고, 기정이는 3층에 있는데 워낙 분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이 층에서 마주칠 일 거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언제 오든 편하게 지내, 이겸아.”
“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해.”
정말 늦게 얻은 막둥이를 대하듯 등을 토닥여 준 권태정의 어머니가 웃으며 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따라 나오려는 이겸에게 손을 저었다.
“피곤할 텐데 태정이 올 때까지 쉬어. 원래 임신 초기에는 계속 잠 오잖아. 자고 일어났는데도 또 졸리고, 밥 먹다가도 졸리고. 편하게 쉬라고 데려온 거니까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태정이 침대에서 자. 드레스룸 가 보면 태정이 옷들 남아 있으니까 일단 그걸로 편하게 갈아입고. 아, 씻고 싶으면 욕실 편히 쓰고. 이제 여기도 이겸이 집이니까.”
“네…. 고맙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하고.”
“네에….”
싱긋 웃은 권태정의 어머니가 방을 나섰다. 이겸은 닫히는 문을 보고는 짙은 색의 이불이 구김 하나 없이 펼쳐진 침대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까지 와서 또 졸리다고 쿨쿨 자는 건 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삐약이가 자고 싶어 하는 건지 침대를 보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삐약아, 또 졸려? 그럼… 우리 조금만 잘까?”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 이겸은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가 권태정의 티셔츠와 편안한 홈웨어 바지를 찾아 욕실로 들어갔다.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따뜻한 물로 씻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겸은 옷을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 마음까지 나른하게 풀어질 만큼 따뜻한 물로 천천히 몸을 씻었다.
씻고 나와 권태정의 티셔츠를 입은 이겸은 입자마자 아래로 축 늘어지며 허벅지를 덮으며 내려가는 셔츠 단을 내려다보았다. 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크다 생각한 이겸이 맞을 리가 없는 바지 안으로 다리를 넣었다. 속옷은 차마 권태정의 것을 입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입지 못해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헐렁여서 옷을 입었다고 하기보다는 풍덩 그 안에 빠진 모양새라 거울을 보고 웃은 이겸이 미지근한 바람으로 젖은 머리칼을 말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지가 내려갈 것 같아 허리끈을 조금 꽉 묶었다가 삐약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 침대에 앉아 결국 다시 끈을 풀어냈다.
갓 씻고 나와 미열이 오른 따끈한 몸이 녹아내리듯 침대 위로 늘어졌다. 권태정이 오래 방을 쓰지 않았을 텐데도 방에서는 약하게 권태정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겸은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파묻었다.
“…….”
실장님, 보고 싶어….
금세 머릿속을 꽉 채우는 권태정의 얼굴을 떠올린 이겸이 잠이 묻은 눈을 다시 떠 충동적으로 방을 나서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티셔츠를 꺼낸 서랍을 열어 다른 옷을 꺼내 향기를 맡아 보았다.
“…안 나네….”
오래 입지도 않고, 말끔히 세탁을 해 둔 옷이라 그런지 권태정의 페로몬 향이 나지 않았다. 금세 시무룩해진 이겸이 옷을 잘 접어 제자리에 넣고 방을 나서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옷장 문을 열었다.
“…….”
벽 전체를 두르며 쫙 놓인 옷장을 차례로 열던 이겸은 여섯 번째 칸 문을 열었을 때 확 끼치는 권태정의 페로몬에 어깨를 움찔댔다.
“아….”
안에 걸린 몇 벌의 겨울 코트를 본 이겸은 눈앞에 있는 코트 자락을 잡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코트에 밴 약한 권태정의 페로몬 향을 맡으며 보고픈 마음을 위로하듯 두드렸다.
각인을 하고, 또 삐약이까지 가지게 되면서 이겸은 날마다 권태정을 더욱 필요로 했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또 그가 저를 안거나 만질 때면 그보다 더 깊은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떨어지게 되면 불안하기도 하고, 또 보고 싶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전화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일 때문에 회사에 간 권태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꾹 참은 이겸이 안에 걸린 코트 한 벌을 꺼내 품에 소중히 안고 다시 권태정의 방으로 향했다.
“삐약아, 너도… 실장님 보고 싶지.”
아직 너무 작아서 제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배 속에 있는 삐약이한테도 말을 건 이겸이 침대로 다시 올라 누워 코트를 꼬옥 끌어안았다.
“…실장님 냄새….”
약하지만 분명하게 배어 있는 권태정의 페로몬 향을 깊게 들이마신 이겸의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향만 맡아도 온몸 구석구석 조금의 빈 곳도 없이 권태정이 그동안 주었던 따뜻함과 그것을 넘어서는 뜨거운 감각들이 퍼지는 것만 같았다.
“…….”
이겸은 어쩐지 저릿한 허벅지를 꽉 붙여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빠르게 잠이 들어도 되나 싶을 만큼 정신이 흐릿해지는 느낌과 함께 이겸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아빠와 함께 집으로 퇴근한 권태정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이겸을 찾았다. 퇴근하며 전화를 한 번 걸었는데 자는지 받지 않는 것에 내내 잠든 얼굴을 상상하며 오느라 눈앞에 이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빨리 보고, 만지고, 입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났다.
“우리 태정이 집으로 퇴근하니까 엄마 너무 좋다.”
“나도 우리 엄마 보니까 너무 좋아. 이겸이는요? 전화 안 받던데.”
“아, 이겸이 자. 뭐라도 좀 먹이려고 올라갔는데 너무 곤히 자서 안 깨웠어. 얼른 올라가 봐.”
“네, 저녁은 이겸이 깨면 같이 먹을게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은 권태정이 얼른 계단을 올랐다. 제 가족들이 있는 집, 그것도 제가 오랫동안 살았던 제 방에서 이겸이 자고 있다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이름을 부르며 들어가 물고 빨고 싶은 마음을 닫힌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다스린 권태정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방 안에서 나는 복숭아 향에 심호흡하며 다스린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흥분감이 묻은 욕이 머릿속에서 뭉그러졌다.
각인을 하고, 또 아이까지 가졌으니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이겸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세상에 저 하나라는 게 좋아 미칠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이겸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발을 옮겨 침대로 다가가 옆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아, 돌겠네.”
아주 약한 불빛이 주위를 밝히고, 잠든 이겸까지 담은 순간 권태정은 이겸이 끌어안은 것이 제 코트라는 걸 알고 침음했다. 그리고 이겸의 몸 위에서 흐트러진 이불을 살짝 걷고 그 안을 보고 나서는 머리가 더 확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