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혹시라도 권태정이 깰까 봐 훌쩍이지도 못한 채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이겸이 다시 물끄러미 휴대폰 화면 속 먹음직스러운 복숭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복숭아를 보는 것에 몰두했는지 권태정이 깨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반쯤 몸을 일으킨 권태정이 휴대폰에서 내내 눈을 떼지 못하는 이겸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빛이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안에는 복숭아 사진이 잔뜩 떠 있었다.
눈치가 빠른 권태정은 단번에 이겸이 복숭아를 먹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마침 냉장고에는 어제 이겸이 잠든 후 누나가 잠시 들러 주고 간 복숭아가 두 박스나 있었다. 애기를 가지면 새콤하고 달콤한 것만 당기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직접 구해 온 아주 비싸고 맛있는 복숭아였다.
잠든 사이에 왔으니 이겸은 집에 복숭아가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화면을 보며 먹고 싶어 울기까지 하는 걸 거고.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게 미안해서 혼자 사진을 보며 우는 걸 택한 이겸이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워 조용히 혼자 앓은 권태정이 다시 자고 있던 것처럼 누워 눈을 감았다.
이겸을 부를 수도 있지만, 너무 화면 보는 것에 몰두하고 있어 제가 갑자기 부르면 깜짝 놀랄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으음….”
일부러 이불을 좀 크게 사부작대고 손을 뻗으니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이겸의 고개가 제 쪽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제가 일어나도 이겸이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권태정은 다시 몸을 일으켜 뒤에서 이겸의 허리를 안고 어깨에 턱을 올렸다.
“잠 안 와?”
“꿈을 꿔서 깼어요….”
“무슨 꿈? 무서운 꿈?”
“복숭아 꿈….”
아, 그래서 복숭아가 먹고 싶어졌구나. 먹고 싶어진 이유도 이겸처럼 너무 귀여워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복숭아 꿈 꿔서 복숭아 사진 보고 있었어? 먹고 싶구나.”
“…조금요. 그런데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먹고 싶을 때 먹어야지. 먹으러 가자.”
“…지금요?”
“응, 지금. 가까워.”
자다 일어나도 보송보송한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권태정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기 전에 벗었던 티셔츠를 입으며 이겸의 손을 잡아 방을 나섰다.
권태정은 이겸을 딱딱한 식탁 의자가 아니라 거실 소파에 앉히고 혼자 부엌으로 가 냉장고 안에 있던 복숭아 두 개를 꺼내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트레이에 접시와 포크, 과도를 놓고 다시 거실로 향했다.
“복숭아 먹자.”
눈앞에 있는 복숭아를 멍하니 보던 이겸이 제 옆에 앉는 권태정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집에 복숭아 없었는데….”
“어제 자기 잘 때 누나가 주고 갔어. 이거랑 마레 복숭아 무스랑. 향 강한 거 잘 못 먹는다니까 걱정됐나 봐.”
“아…. 내일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겠어요.”
“내가 다 했어. 음, 그래도 하고 싶으면 누나한테 톡 하나 보내 줘. 누나 감동할 거야.”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겸의 눈은 권태정의 손에 들린 복숭아에 닿아 있었다. 과일 깎는 걸 한 번도 안 해 봤을 것 같은데 권태정은 생각보다 아주 능숙하게 과일을 잡고 칼로 얇게 껍질을 까고 있었다.
“…실장님, 과일 많이 깎아 보셨어요?”
“아, 음, 뭐 많이 깎아 봤지? 왜, 나 이런 거 못 할 것 같아?”
“네…. 한 번도 안 해 보셨을 줄 알았어요.”
“나 진짜 준비된 신랑감이지?”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권태정을 보고 웃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권태정이 잘라 포크로 찍어 주는 복숭아를 얼른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소리와 함께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으로 가득 퍼졌다.
“맛있어?”
“네, 너무너무…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요….”
저녁도 속이 울렁거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들어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복숭아라도 잘 먹혀 다행이었다. 권태정은 오물오물 잘도 먹는 이겸을 흐뭇하게 보며 예쁘게 복숭아를 조각내 접시에 가득 놓아 주었다.
“삐약아, 이겸이 아빠 맛있는 거 많이 먹게 해 줘.”
부탁하듯 배를 살살 문지르며 말한 권태정이 부드럽게 이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먹어. 이것도 체해.”
“네, 천천히….”
제 말을 잘 들으려는 것처럼 따라 말하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잘 깎여 놓인 복숭아를 보며 어릴 때를 떠올렸다.
“중학교 다닐 땐가. 집안일 돌봐 주시는 여사님들께서 동시에 휴가를 가신 적이 있었어. 엄마, 아빠도 한창 바쁘실 때라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는데 그때 내가 배고프다니까 기정이 형이 사과를 깎아 준 적 있거든.”
복숭아 한 조각을 또 포크로 찍어 베어 문 이겸이 권태정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처음이라 서툴러서 껍질을 엄청 두껍게 깐 거야. 그때 그걸 아빠가 보고, 버리는 게 더 많다고 이런 것도 못 하면 안 된다고 두 달을 형이랑 나랑 둘이 번갈아 가면서 과일 깎게 시키셨거든. 그때 매일 해 봐서 그런가 오랜만에 깎았는데도 실력 살아 있네.”
볼이 볼록해진 채 제 이야기를 듣는 이겸이 귀여워 웃은 권태정이 어느새 빈 포크를 가져가 복숭아를 한 조각 더 찍어 주었다.
“그때 배워 두길 잘했지. 이것도 못 했으면 지금 엄청 헤매고 있을 거 아냐.”
기분이 좋은지 이겸이 소파에 앉은 채 두 다리를 달랑였다. 권태정은 그 흔들리는 다리를 보며 침음했다. 이겸의 포크에 매달린 복숭아 조각이 되어 입 안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이거라도 잘 먹으니까 너무 좋다.”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는 처음 먹어 봐요.”
“많이 먹어. 요즘 잘 못 먹어서 살 빠진 것 같아.”
“…실장님도 요즘 살 빠지신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실장님도 식사 제대로 못 하시잖아요.”
“신기한 게 나도 좀 음식 냄새 맡는 게 역한 것 같아. 내 착각인가. 이런 것도 현준이한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이겸은 얼른 먹고 있던 복숭아를 입에 넣고 새로 하나 집어 권태정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너무 맛있어 행복한 감정을 권태정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괜찮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 주는 대로 복숭아를 반쯤 베어 문 권태정은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는 듯 이겸을 바라보았다.
“진짜 맛있네?”
“실장님도 더 드세요. 같이 먹어요.”
“알았어. 나도 먹을 테니까 우리 이겸이 마저 먹어.”
권태정은 이겸이 속상하지 않도록 작은 복숭아 조각을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것을 이겸이 전부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
“더 먹을래?”
“이제 배불러요. 내일 또 먹을래요.”
“응, 내일 또 먹자. 이제 들어가서 잘까?”
“네, 빨리 양치질하고 자고 싶어요….”
배가 부르자 금세 또 잠이 밀려들었다. 이겸은 방 안에 있는 욕실로 가 권태정과 함께 양치질을 하고는 침대로 다가가 올랐다. 그리고 누워 편안하게 눕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애기를 가진 게 아니라 꼭 제가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지만, 호르몬의 변화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잘 자, 우리 애기.”
몽롱한 머릿속으로 듣기 좋은 권태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뺨 위로 따뜻한 것이 닿았다가 배 위로도 닿는 게 느껴졌다. 삐약이도 잘 자. 이어지는 다정한 인사에 이겸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잔뜩 달착지근해진 기분으로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겸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권태정의 뒤에 섰다. 권태정이 직원에게 제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웃으며 방을 안내해 주었다. 좋은 향이 나는 깨끗한 복도를 지나 닫힌 문 앞에 선 이겸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곧 열리는 문 사이로 저를 보고 활짝 웃는 권태정의 어머니 얼굴이 보였다.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우리도 서둘러서 온다고 온 건데.”
“볼 일이 있어서 잠깐 갤러리 들렀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어.”
권태정의 어머니가 고개를 기울여 옆으로 선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이겸의 손을 꼭 쥐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갑작스러웠을 텐데 나와 줘서 고마워, 아가. 요즘 뭘 통 못 먹는다며.”
“아…. 속이 많이 울렁거려서 밥 종류를 잘 못 먹겠어요.”
“나도 태정이 가졌을 때 그랬어. 밥 종류는 아예 냄새도 못 맡겠고, 그나마 빵이나 과일 정도만 겨우 넘어가는 거야. 속 울렁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안쓰러워라.”
이겸을 먼저 자리에 앉힌 권태정의 어머니가 맞은편이 아니라 옆쪽으로 앉아 이겸의 등을 두드렸다.
“태정이는 점심만 먹고 회사 들어간댔지?”
“네. 아빠가 오라고 하셔서요. 아, 휴가 더 쓰고 싶은데.”
“회사 오래 비우긴 했지, 뭘.”
“비우고 싶어서 비운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회사 비운 그 석 달은 진짜 내 인생 최고의 석 달이었어. 난 다시 돌아가도 보복운전 할 거야.”
“태정아, 그런 위험한 일은 하면 안 돼. 만날 사람은 결국, 다 만나게 되어 있어.”
마음 여린 엄마를 속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이겸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브런치 세트를 주문했다. 안 그래도 복숭아나 아이스크림, 깔끔한 차 같은 것 외에는 잘 먹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먼저 이겸을 생각해 챙겨 주니 마음이 좀 놓였다.
“들어 보니까 태정이 아빠가 태정이를 이제 다시 회사로 부를 모양이야. 그럼 아가 혼자 집에 있어야 하잖아. 그게 아무래도 너무 걱정되는 거야. 옆에서 누가 늘 챙겨 줘도 힘든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있으면 너무 힘들잖아.”
물을 한 모금 마신 권태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걱정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제가 출근을 하고 나면 이겸이 집에 혼자 있을 거고, 제가 없는 시간 동안 뭔가 먹고 싶은 게 생기거나 또 속이 너무 울렁여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울게 될까 봐 너무 걱정이라 도저히 출근을 한다고 회장님에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본가로 애기 낳을 때까지 들어와 있으면 어때?”
“…얼마 전에 갔던….”
“응, 맞아. 상주하면서 집안일 봐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나도 일 없을 땐 집에 있으니 언제든 살필 수 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씀에 입술을 퐁 벌리고 권태정의 어머니를 바라보던 이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갔던 권태정의 집에 들어가서 제가 산다는 게 잘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웃음소리가 나고, 여럿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언제든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소중한 집 안에 제가 있어도 되나 싶었다.
“…….”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 보고 싶다는 것. 그 따뜻한 분위기 안에 머물러 보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고,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같이 지내면서 더 빨리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한 말인데 아가한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
이겸은 맞은편에 앉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 역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겸을 바라보았다.
“엄마, 제가 이겸이랑 따로 더 얘기해 볼게요. 쉬운 일 아니잖아요. 엄마, 아빠 마음이야 다 이해하는데 우린 이겸이 한 사람이랑만 친해지면 되지만, 이겸이는 엄마, 아빠, 누나, 형…. 또 여사님들까지 전부 다 익숙해져야 하는 거라 힘들 수도 있어요.”
“어머,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앞섰나 봐. 미안해, 아가.”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는 권태정의 어머니를 보며 이겸은 마음 안에 맺힌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런 이겸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할 수 있게 다정히 말을 걸어 주었다.
“이겸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부담 조금도 안 가져도 돼.”
“저는….”
편히 말하라는 권태정과 눈을 맞추고 미소 지은 이겸이 여전히 저에게 닿고 있는 권태정의 어머니를 보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신 대로…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