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권기정이 차를 잘못 삼켜 콜록대는 소리가 들렸다. 권유정은 그대로 포크를 쥔 채 멍하니 굳었고, 부모님 역시 입을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권태정만 귀와 목덜미가 빨개진 이겸의 등을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어머, 태정아…. 정말이야?”
“네. 이제 6주 좀 지났어요.”
이겸의 앞이라 그래도 예의를 최대한 차리며 대답한 권태정이 저에게 닿는 아버지의 시선에 방어 태세를 갖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건 혼날 일이 아니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다소 무책임하고, 너무 충동적인 일이라 생각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와…. 태정아, 더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아, 차 마시다 목에 걸려 죽는 줄 알았네. 축하해요. 이겸 씨. 태정이도 축하해.”
“아, 우리 막내 축하해. 이겸 씨도 정말 너무 축하해요. 몸은 괜찮아요?”
박수까지 치며 축하해 주는 권유정과 권기정을 보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이겸이 작게 웃었다.
“음식 먹는 게 조금… 힘들 때가 있는데 그거 외에는 다 괜찮아요.”
“아, 벌써 입덧하는구나. 뭐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태정이한테 말하고, 우리한테도 다 말해요.”
“네에…. 감사합니다.”
이겸은 아직 아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놀라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했다.
“권태정.”
“…아빠, 일단 진정을 하시고….”
“너 이놈의 자식….”
“일단 제가 드릴 말씀이…!”
“네 녀석이 무슨 할 말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있는 쪽으로 오는 아버지를 본 권태정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아버지가 소파 바깥쪽으로 피하는 권태정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엄청난 소리에 권태정은 더 맞지 않으려 빠르게 몸을 피했고, 이겸은 걱정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진짜 일단 좀 진정하시고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결혼 허락받으려고 이런 일을 벌여? 저 어린애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 당장 방으로 따라와!”
일단 거리를 벌려 아버지와 대치한 권태정은 팔을 뒤로 해 화끈대는 등을 문질렀다.
“와, 아빠.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뭘 생각하시든 그거 아니에요. 결혼 허락받으려고 이랬으면 아빠 아들 아니지.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이겸이 아직 너무 어린 거 저도 알고, 호르몬 안정도 필요할 때라 애기는 나중에 가지자고 상의도 했었어요. 그랬는데 우리 삐약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싶다고 찾아온 거예요.”
험한 말이 나올 수 없도록 삐약이를 앞세워 말한 권태정이 예상대로 쉽게 누그러지는 아버지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전의를 상실한 회장님이 무너지듯 소파에 앉아 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이겸의 옆으로 다시 앉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삐약이?”
“네, 우리 애기 태명이에요. 아빠, 엄마 손주.”
이미 맞은편 소파에 앉아 너무 귀엽다면서 삐약거리기 시작한 누나와 형을 보고 고맙다고 눈짓한 권태정이 이겸의 옆에 앉은 엄마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겸에게서 아까부터 눈을 떼지 못하면서 등을 토닥이고, 어깨를 쓸어 주는 걸 보면 엄마는 이미 이겸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저 이겸이랑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잘 살고 싶어요. 일도 더 열심히 할 거고, 정말 책임감 가지고 살 거예요. 잘 나가다 삐끗하지 않고 잘해 나갈 거니까 저랑 이겸이 믿어 주세요.”
“…….”
“그리고 저희 각인도 했어요. 서로 진심 아니면 각인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저희 진지해요.”
“각인까지?”
“네. 저 진짜 우리 이겸이 없으면 죽어요. 못 살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권태정의 얼굴을 본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에 각인까지 해서 허락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솔직히 그걸 알기 전에도 이겸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아쉬운 마음 없이 허락할 수 있었다. 물론 기회를 봐서 한번 제 막내아들을 제대로 잡도리하긴 해야겠지만.
아버지가 볼 수 없도록 다리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고 좋아한 권태정이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이겸의 뺨에 제 뺨을 대고 꾹 눌렀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여기저기 입 맞추고 싶은 걸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은 너무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더 노력해서 꼭 실장님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하는 이겸을 가만히 보던 권태정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자신의 장성한 자식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 이겸이 나이에 비해 단단한 마음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게 기특하면서도 귀여웠다.
“권태정.”
“네, 아빠.”
“널 믿어서 허락하는 거 아니라 이겸이 믿고 허락하는 거니까 지금보다 더 잘해.”
“네, 저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저도 꼭 이겸이 행복하게 해 줄게요. 엄마, 아빠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아, 그런데 이미 행복하시겠다. 이제 막 스무 살 된 막둥이랑 손주까지 생기셔서.”
“말이나 못 하면.”
“우리 아빠 슬프시지.”
자리에서 일어난 권태정이 회장의 옆으로 가 앉아 커다란 몸으로 치대자 결국, 웃음을 터뜨린 회장이 잘하라며 권태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겸은 제 등을 쓸어 주는 따뜻한 권태정 어머니의 손길과 저를 보고 따뜻하게 웃는 권태정의 누나와 형의 시선, 그리고 눈동자에 가득 차는 웃는 얼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거울을 보고 혼자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예쁜, 행복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열 시가 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겸은 현관까지 나와 제 손을 잡고 배웅하는 권태정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오늘 반겨 주셔서 정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저녁도 너무 맛있게 먹고, 또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이렇게 와 줘서 우리가 더 고맙지. 몸조심하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태정이한테 바로 말하고.”
“네에….”
“자주 놀러와, 아가. 또 보자.”
엄마가 이겸에게 아가라고 부르는 걸 보며 씩 웃은 권태정이 몸을 구부리며 엄마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나는?”
“태정이 너 이제 정말 잘해야 해. 이겸이 서운할 일 없게.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 임신 초기에는 정말 조심해야 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아, 이제 진짜 우리 집 막내 이겸이 됐네. 우리 엄마, 아빠 나한테 잔소리만 하시고.”
말은 그렇게 해도 권태정은 이겸이 부모님에게 관심을 받고, 사랑받는 게 너무나 좋았다. 제 부모님의 사랑이 전부 다 이겸에게 간다고 해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 이겸의 사랑을 받고 살면 되니까.
“저희 갈게요. 나오지 마세요. 아, 회장님, 저 휴가 조금만 더 주세요. 이겸이 아직 혼자 있으면 안 돼서요.”
“그건 여기서 쉽게 정할 일 아니니 내일 다시 얘기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운전 조심하고.”
“네. 가 볼게요. 누나랑 형도 오늘 고마워. 전화할게.”
가족 모두를 챙기며 인사한 권태정이 이겸과 현관을 나서 차고 쪽으로 향했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되자 뭉쳐 있던 숨이 터졌다. 권태정은 조수석 문을 열고 이겸이 타기 전 마른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오늘 너무 고마워.”
“…제가 더 감사해요, 실장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우리 자기 말하는 거 보면서 감탄만 했는데.”
“저 오늘… 괜찮았어요?”
“괜찮은 정도가 아냐. 너무 잘했어. 우리 부모님 녹아서 흐물흐물해지신 거 봤잖아.”
열심히 연습한 보람을 느낀 이겸이 권태정의 허리를 마주 안은 채 품에 얼굴을 비볐다. 긴장을 아예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정말 편하고, 너무나 행복했다.
“사랑해 줘서 고마워. 진짜 앞으로 더 잘할게. 평생 우리 이겸이만 보고 살 거야.”
“저도… 실장님만 보고 살 거예요.”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에 잔뜩 부끄러워진 이겸이 권태정의 어깨 위로 숨듯 얼굴을 파묻었다. 그게 귀여워 등을 쓸고, 허리를 조금 야한 손길로 매만지자 작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아, 이러다 차고에서 서겠네. 아랫배로 맺히는 묘한 감각에 정신을 차린 권태정은 목덜미와 귓가에 뽀뽀를 퍼붓고는 이겸을 조수석에 조심히 태웠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넣어 안전 벨트를 채우고, 편히 가도록 시트까지 뒤로 적당히 눕혀 준 뒤에야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자.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신경 내내 쓰고, 말도 많이 하고 하느라 힘들었을 거야.”
나갈 준비를 하자 다시 차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권태정은 차고 밖으로 나가며 금세 가물가물 졸린 얼굴이 된 이겸을 흘끗 보고 웃음 지었다.
“오늘 정말 너무너무… 좋았어요.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제 얘기도 다 들어 주시고…. 큰 선물도 아닌데 많이 좋아해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 이겸이가 하나하나 다 고르고 산 거잖아. 아르바이트 열심히 한 돈으로 우리 부모님 드리려고 직접 꽃도 고르고, 케이크도 주문하고. 너무너무 큰 선물이야.”
다정히도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이제야 완전히 긴장이 풀려 자꾸만 늘어지는 몸에서 힘을 쭉 뺐다.
“…….”
권태정과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고, 서로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너무나도 가득한 가족 안에 저도 꼭 들어간 것만 같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아까… 실장님 어머니께서 토닥토닥해 주셨는데 그때 엄마 생각이 났어요. 전 엄마 기억이 없는데…. 엄마가 만약에 있었으면 이렇게 따뜻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신호를 보고 선 권태정은 잠결에 말하는 이겸을 보며 뒷좌석에 놓인 담요를 가져와 몸 위로 덮어 주었다. 느릿하게 감고 있던 눈을 뜬 이겸이 그런 권태정을 보며 웃었다. 이겸은 분명히 웃는데 권태정은 몹시 울고 싶어졌다.
“앞으로 더 좋기만 할 거야. 약속할게.”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던 이겸이 스르륵 잠으로 빠져들었다. 권태정은 잠든 이겸을 울 것 같은 눈으로 보다가 담요를 더 위로 올려 덮어 주고는 젖은 눈동자로 다시 조심히, 또 안전히 차를 몰았다. 저의 사랑이 잠시라도 아주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 * *
이겸은 갑자기 눈앞으로 펼쳐진 분홍색 길을 보며 따라 걸었다. 길 양옆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있고, 그 나무에는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향긋하고 예쁜 색의 복숭아들을 구경하며 말랑말랑한 길을 걷던 이겸은 나무에서 떨어진 커다란 복숭아가 품으로 안겨드는 것에 놀라 복숭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너무너무 예쁘고 향긋해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났다.
실장님한테 얼른 보여드려야지. 권태정을 떠올린 이겸이 조심조심 복숭아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 저 앞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권태정과 눈이 마주쳤다.
‘실장님, 복숭아가 저한테 떨어졌어요!’
권태정에게 달려간 이겸은 권태정에게 복숭아를 내밀었다. 그리고 함께 복숭아를 쥐는 순간 이겸은 눈을 떴다.
“…….”
복숭아를 안고 있던 게 너무나 생생해 없을 걸 알면서도 제 품을 내려다본 이겸은 생각만으로도 코끝에 느껴지는 복숭아 향에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갑자기 새콤달콤한 복숭아가 너무 먹고 싶었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떠올리자 입 안이 저절로 촉촉해졌다. 이겸은 제 옆에서 잠든 권태정을 보다가 침대 옆으로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복숭아를 검색했다.
“…….”
꿈에서 본 것처럼 화사하고 예쁜 색의 복숭아 사진이 가득 뜨는 것에 사진을 보며 입술을 달싹인 이겸이 아래로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평소에는 뭔가가 먹고 싶어도 금방 잊게 되거나 또 참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 눈물이 날 수가 있지…. 이겸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