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24화 (124/174)

#124

잠에서 깬 권태정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에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 나간 건가 싶어 방을 나서려는데 욕실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조용히 다가가 복도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연이겸입니다. 연이겸이라고…. 연이겸입니다. 나이는 스물이에요. 스무 살이에요. 스물입니다…. 뭐가 좋지….”

거울을 보고 앉은 이겸이 조용히 계속 인사를 하고, 나이를 말하며 뭔가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뭘 하는 건지 몰라 궁금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권태정은 들키지 않게 아주 조용히 이겸을 몰래 눈에 담았다.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

거울을 보며 미소 짓는 이겸은 꼭 뭔가 인사 연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연습?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연이겸이라고 합니다…. 너무 딱딱해 보이나…. 안녕하세요, 연이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아….”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하고, 조금씩 다르게 말하는 이겸을 보던 권태정은 그제야 이겸이 제 부모님과의 만남을 위해 인사 연습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있는 그대로 가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겸이 저번보다 더 잘하고 싶어 계속 연습하는 게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로워 마음이 다 꽉 조여들었다. 권태정은 복도로 들어가는 문 쪽에 등을 기댄 채 서서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음식들이 전부 다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걸 듣고 봤다는 걸 알면 어쩐지 이겸이 부끄러워할 것만 같아 권태정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조용조용히 옮겨 다시 침대로 갔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 누워 이불까지 덮었다. 거리가 생겨 이제 잘 들리지는 않지만, 집중해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아주 작은 이겸의 목소리가 자꾸만 권태정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저번에는 정말 처음이라… 더 그랬는데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저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어요.’

더 잘할 수 있다고, 또 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이겸이 떠올랐다. 권태정은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물기 어린 눈을 깜빡였다. 이겸은 종종 이렇게 저를 감동시키고는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과 행동으로.

“…….”

나 진짜 더 잘해야겠다. 우리 이겸이 꼭 행복하게 해 줘야지. 속눈썹이 눈물에 젖는 느낌이 나 손끝으로 눈가를 문지른 권태정이 다시 숨소리와 감정의 소리를 모두 짓누른 채 멀리서 들리는 제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계속 다짐했다.

반드시 이겸을, 저를 위해 저렇게까지 노력하는 제 유일한 사랑을 아주 많이 웃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 * *

전과 다르게 집에서 나서기 전 계속 거울을 본 이겸은 쿵쾅쿵쾅 빠르게 뛰는 심장 위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떨리는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

소파에 멍하니 앉아 손바닥으로 쿵쿵 뛰는 게 느껴질 만큼 세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있자 멀끔하게 차려입은 권태정이 얼른 다가와 그런 이겸의 옆으로 앉았다.

“많이 떨려?”

“네…. 실수하면 안 되는데….”

“실수하면 어때. 그리고 실수할 게 뭐가 있어. 우리 아빠 보고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인사만 안 하면 돼.”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예를 드는 권태정을 보며 사르르 웃음 지은 이겸이 아예 권태정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권태정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로 대었다.

“어떡해요, 실장님….”

“우리 이겸이 이렇게 떨려서 어떡해. 가기 전에 안아 줘야겠다.”

안아 준다는 말에 바로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이겸을 꽉 끌어안은 권태정이 뺨과 귓가, 목덜미에 차례로 뽀뽀를 퍼부었다.

“내가 계속 괜찮다고 해도 이겸이 너한테는 무거운 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거 알아. 저번에는 내가 너무 들떠서 다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우리 이겸이한테 떨리는 자리인지 내가 다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떤 경우에도 옆에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럴게요.”

권태정은 이겸이 입은 예쁜 셔츠가 구겨지지 않게 잘 만져 주고는 쪽, 쪽 입술을 내밀어 몇 번 입 맞췄다. 그리고 셔츠 위로 이겸의 배를 손으로 짚으며 웃음 지었다.

“삐약아, 할아버지, 할머니 보러 가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태명을 부르며 웃는 권태정을 보고 다시 웃은 이겸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깜깜한 밤,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마음 안에 그 어떤 후회도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며.

* * *

집 앞에 도착해 버튼을 누르자 차고 문이 열렸다. 이겸은 단단해 보이는 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주차한 권태정은 여전히 두 손을 심장 위에 올리고 있는 이겸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여운데 안쓰럽기도 하고, 또 안쓰럽긴 한데 너무 사랑스러워서 몸이 다 저릿했다.

“마음의 준비 다 되면 내리자.”

“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세 번 반복한 이겸이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권태정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내리는 이겸의 팔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이겸이 직접 고르고 산 꽃다발과 케이크를 꺼냈다.

“제가 들고 갈게요.”

“그럼 꽃다발만 들어. 케이크는 내가 들게. 무거워서 안 돼.”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권태정이 안겨 주는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권태정의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유명한 꽃집에 가 직접 이것저것 예쁜 것으로 골랐는데 제 눈에만 예뻐 보이는 거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이 됐다.

“실장님, 저 머리 이상하지 않아요? 올 때 뒤에 기대고 와서….”

“어디 보자.”

권태정은 꽃다발을 안고 있는 이겸을 찬찬히 살폈다. 흐트러진 곳도 없고, 어디를 봐도 다 사랑스럽고 예뻐 볼수록 제 마음만 흐트러졌다.

“아, 현준이 부를걸.”

“…의사 선생님은 왜요?”

“우리 자기 너무 예뻐서 엄마, 아빠가 보자마자 기절할지도 모르잖아.”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렸으면 좋겠어서 씩 웃은 권태정이 이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들어가자.”

권태정은 이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차고 안으로 이어진 문으로 들어가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차고에 차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진작 가서 그런지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전부 나와 있는 가족을 본 권태정이 웃음 지었다.

“엄마, 아빠. 누나, 형. 저 왔어요.”

긴장감에 품에 안은 꽃다발을 더 꼭 안은 이겸이 권태정을 따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인상이 아주 좋은 부모님의 앞에 서서 공손하게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인사드려요. 연이겸입니다….”

이겸은 긴장했지만, 연습한 것을 분명히 소리 내어 떨지 않고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권태정의 부모님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그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권태정의 어머니가 먼저 다가와 이겸의 손을 잡았다.

“너무 반가워요. 태정이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아…. 약소하지만, 실장님께서 꽃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준비해 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권태정의 어머니에게 화사하고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 드린 이겸이 어색하지 않게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어머, 예뻐라. 그냥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또 고맙다고 활짝 웃는 권태정의 어머니를 보고 웃은 이겸이 저에게 다가오는 권태정의 아버지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가워요. 집으로 오는 게 부담됐을 텐데 이렇게 와 줘서 고맙고.”

“아닙니다,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반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떨리는 마음을 누른 채 권태정의 아버지와도 인사한 이겸이 그 뒤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는 권유정과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권기정을 보며 다시 꾸벅 인사했다.

“이겸 씨, 또 만나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 정말 잘 지냈어요.”

권태정은 제가 돕지 않아도 아주 훌륭하게 인사를 해낸 이겸을 보고 웃으며 케이크 박스를 권기정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손을 휘휘 안쪽으로 흔들었다.

“이제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 맛있는 냄새 난다.”

“바로 저녁부터 먹을까?”

“네, 저희 손 씻고 올게요. 이겸아, 가자.”

다정히 이겸의 등을 감싸고 욕실로 간 권태정은 소매가 젖지 않도록 살짝 걷어 올린 다음 따뜻한 물을 틀어 손을 씻겨 주었다.

“제가 할게요.”

“너무 예뻐서 내가 해 줄래. 어쩜 그렇게 인사를 잘해? 아까 엄마, 아빠 그냥 녹으시던데.”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이제 저녁 먹을 건데 요즘 평소에 잘 먹던 것도 냄새 때문에 잘 못 먹기도 하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무리해서 안 먹어도 돼.”

“네…. 오기 전에 입덧 약 먹어서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애기 가진 것부터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제가 입덧이라도 하면 놀라실 텐데….”

“응, 말씀드려야지. 일단 저녁 먹고 얘기하자. 중간에 말할 상황 생기면 내가 또 잘 말씀드릴게. 우리 자기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이겸은 제 손을 수건으로까지 닦아 주는 권태정을 보며 웃음 지었다.

“이제 나갈까?”

“네에.”

크게 심호흡을 한 이겸이 권태정을 따라 욕실을 나서 커다란 식탁이 있는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하얀 식탁 위에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이겸은 비어 있는 두 개의 자리에 권태정과 나란히 앉았다.

“많이 들어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전부 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요. 잘 먹겠습니다….”

“먹다가 더 필요한 거 있으면 편히 말해요. 여보, 얼른 수저 드세요.”

권태정의 아버지가 수저를 드시고 난 다음 모두의 손이 움직였다. 이겸은 식탁 위에 놓인 갈비찜과 색색의 예쁜 전, 전복구이 같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전부 다 맛있어 보여 어떤 것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일단은 앞에 놓인 맑은국부터 한 입 먹은 이겸은 다행히 메슥대지 않는 속에 안도하며 한 숟가락을 더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노릇노릇한 동태전을 하나 들어 베어 물었다.

“음식들이 전부 다 너무 맛있어요….”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아…. 말씀 편히 해 주세요.”

이겸의 말에 권태정의 어머니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그래도 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 이름으로 부를게. 이겸이 천천히 많이 먹어.”

“네….”

저를 보고 웃는 권태정의 어머니를 보며 예쁘게 입술을 올려 웃은 이겸이 갈비찜을 하나 앞접시에 덜어 살코기를 떼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해서 너무나 맛있었다.

“그래, 올해 나이가?”

“아…. 스무 살입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믿을 수가 없어 직접 다시 물은 권태정의 아버지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앳된 얼굴이라 놀랐는데 나이를 직접 확인까지 하고 나니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아직 소년처럼 보이는 이겸이 제 아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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