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22화 (122/174)

#122

푹 자고 일어나 초코 맛 시리얼과 과일, 토스트를 한 쪽 먹은 이겸은 권태정이 운동을 하러 2층으로 올라간 사이 서재에서 노트 한 권과 펜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실로 가는 복도에 있는 큰 거울 앞에 앉아 노트를 펼친 뒤 휴대폰으로 ‘떨지 않고 말 잘하는 법’을 검색했다. 권태정의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저번처럼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준비를 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할아버지와 같이 살기도 했고, 또 주로 접한 다람동 주민들이 전부 나이가 든 분들이라 어른과 대화하는 게 어색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권태정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는 게 어렵고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달 정도 시간을 들여 마음을 더 단단히 한 다음에 뵙고 싶었다. 하지만 저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시고,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실 권태정의 부모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도록 할 수는 없었다.

임신 초기라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나 입덧을 하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를 들며 미루는 게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 속에 삐약이까지 있으니 더더욱 미룰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저는 가족이 아무도 없어 이 일을 알릴 사람이 없고, 알리지 않아도 되지만, 권태정은 그게 아니니까. 무섭다는 이유로 제가 피하면 권태정이 더욱 곤란해질 거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제가 그를 위해 용기를 낼 때였다. 이겸은 심호흡을 하고 화면에 뜬 말 잘하는 방법들을 눈에 담았다.

“…너무 꾸며서 얘기하지 않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이기….”

노트에 하나씩 적어 가며 떨지 않고 말하는 법을 공부하던 이겸은 마지막에 적힌 ‘늘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라는 문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전에 권태정의 누나와 형을 만났을 때는 갑자기 너무 긴장을 하게 돼서 내내 잘 웃지도 못했던 게 떠올랐다.

“…….”

이겸은 펜을 내려놓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거울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라 이렇게 별일 없이 제 얼굴과 마주하고 있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연이겸이라고 합니다.”

인사하며 입술을 끌어올려 웃는데 어쩐지 거울 속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금세 시무룩해진 이겸이 입술 안쪽을 꾹꾹 물다가 다시 거울 속 저와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연이겸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눈을 접고 웃은 이겸이 어색한 느낌과 함께 부끄러워져 권태정과 저의 스킨로션 같은 게 놓인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어떡해….”

화끈화끈한 얼굴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겸은 잠시 엎드려 열을 식히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 뻔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렇게 잠이 오다니 정말 신기할 지경이었다. 얼른 고개를 들어 뺨을 톡톡 두들기며 잠을 물리치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끝을 올려서 인사해 보기도 하고, 조금 길게 빼며 말해 보기도 한 이겸이 거울 속 제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술을 위로 올렸다. 어색하지 않도록 미소 짓는 것을 계속 연습하다 보니 점점 괜찮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을 30분도 넘게 연습한 이겸은 노트에 예상 질문 같은 것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권태정의 누나와 형은 저에게 그 어떤 곤란한 질문도 하지 않았었다.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권태정과 만나게 됐는지조차도 묻지 않고 내내 저를 편하게 해 주려 노력했었다.

권태정의 부모님도 분명히 좋은 분들이실 테니 저를 곤란하게 하진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저번처럼 정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웃으면서 보낼 수 있는 자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식사를 하러 가는 자리가 아니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의 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니까.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권태정의 부모님이 알고 싶어 하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

가족 관계, 하는 일, 앞으로의 계획, 형편. 현실적인 것들을 줄에 맞춰 적은 이겸은 맨 처음에 쓴 가족 관계라는 글자를 보며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족 관계와 하는 일 같은 걸 궁금해하시면 어떻게 답해야 하지…. 이겸은 펜 끝으로 입술을 누른 채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오랫동안 살았는데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지금 하는 일은… 없습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만두게 됐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

앞으로의 계획에서 말문이 막힌 이겸은 물끄러미 한참이나 그 글자를 눈에 담았다. 계획. 앞으로의 계획.

여태까지 저의 미래 계획은 늘 3억이 넘는 빚을 갚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딱히 생각해 본 게 없었다. 그 빚이 항상 저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빚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미래를 꿈꿀 수가 있었다. 이겸은 제가 뭘 하고 싶은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자유라 그런지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맺히는 게 없었다.

여기서 막히면 안 되는데…. 한참을 생각해 보던 이겸이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젓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지금 당장 연습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연이겸입니다…. 안녕하세요?”

몇십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목이 다 말랐다.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 방을 나선 이겸은 2층에서 내려오는 권태정을 보며 웃음 지었다.

“운동 다 하셨어요?”

“좀 더 해야 하는데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내려왔어.”

“그럼 내일부터는 실장님 운동하실 때 옆에 있을까요?”

“그럴래? 그럼 나야 너무 좋지.”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권태정이 이겸을 안으려다가 제가 땀이 났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머뭇댔다.

“아, 땀났다. 얼른 씻고 올게.”

“…괜찮아요.”

어정쩡하게 올렸던 팔을 내리지도 못하고 감지도 못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먼저 한 걸음 다가가 품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땀이 나서 그런지 더 짙어진 체취가 확 끼치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었어? 잤어?”

어깨에 입술을 누른 채 고개를 저은 이겸이 고개를 들어 저를 다정히 내려다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너무 자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자고 그냥 있었어요.”

“졸리면 자도 돼, 이겸아. 애기 가져서 그런 거잖아.”

“그래도…. 요즘 계속 잠만 자서 실장님이랑 얘기도 많이 못 하고, 하루가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눈에 졸음이 가득한 채 하는 게 귀여워 웃은 권태정이 이겸을 안은 채 손가락으로 부엌과 방을 번갈아 가리켰다.

“어느 쪽으로 갈까?”

“아…. 주스 마시러 나왔어요.”

“그럼 얼른 마셔야지.”

고개를 숙여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의 얼굴에 뽀뽀한 권태정은 몸을 떼지 않고 걸음을 느릿하게 옮겨 냉장고로 향했다. 저에게 안긴 채 뒷걸음질을 치는데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겸이 사랑스러웠다.

“오렌지? 포도? 음, 사과도 있고, 딸기도 있네.”

“오렌지 주스….”

“응, 오렌지.”

첨가물 따위 없이 오렌지만 착즙한 주스 병을 꺼내 컵에 가득 따르자 이겸의 시선이 주스에 닿았다. 정말 마시고 싶었는지 두 손으로 컵을 쥐고 금세 잔을 비우는 이겸을 보던 권태정이 입술에 묻은 것을 할짝였다. 주스는 새콤하고, 입술은 달콤했다.

“배는 안 고파?”

“네, 지금은 안 고파요.”

“뭐 먹고 싶은 거는 없어? 뭐든 말해. 내가 다 사 올게.”

“음…. 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나요.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꼭 말해 줘, 알았지? 밤이어도 되고, 새벽이어도 되니까 참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이겸이 다시 권태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을 안은 채 이번에는 제가 뒷걸음을 쳐 침실로 향했다. 혹시라도 제가 넘어질까 봐 바쁘게 제 뒤에 길을 훑는 얼굴을 보니 손끝이 다 저릿했다.

“주스 마셨으니까 우리 이겸이 이제 좀 자자. 눈에 잠이 가득해.”

“괜찮은데…. 저 참을 수 있어요.”

“그럼 같이 누워만 있자. 누워서 얘기해.”

누우면 어쩐지 잠이 들 것 같다 생각하며 저를 눕히는 손길을 따라 누운 이겸은 제 옆에 올라와 앉는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실장님….”

“응.”

“…안아 주세요.”

“얼른 씻고 올게, 그럼.”

“…전 지금도 좋아요.”

잠시 고민하던 권태정은 모르겠다는 듯 이겸의 옆으로 누웠다. 운동한 다음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운 적은 처음이지만, 뭐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벌어지는데 이깟 거에 너무 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애기 가지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데, 그럴 때 상대 페로몬을 맡으면 안정이 된대요.”

“우리 이겸이 하루 종일 안아 줘야지. 내 페로몬 다 우리 자기 거야.”

“…너무 좋아요. 실장님 향….”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드는 이겸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은 권태정이 교차하는 다리에 심호흡을 했다. 이겸이 먼저 안기는 것도 좋고, 제 향이 좋다며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것도 좋지만, 몸이 닿기만 해도 발기할 것 같은 성기를 가라앉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페로몬 때문에 이겸이 다치게 될까 봐 조심하던 때부터 오늘까지 꽤 오래 섹스를 하지 못해 자극에 상당히 취약해진 상태였다. 이겸이 제 손가락을 만지기만 해도 성기 끝이 반응하고, 깊게 잠이 들어 얌전히 숨을 쉬는 것만 봐도 아랫배가 움찔댈 정도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강도를 높여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잔뜩 무거운 것을 들고, 미친 듯 빠르게 뛰고 내려왔는데 이겸이 닿는 순간 모든 게 다 허사로 돌아갔다. 땀이 나 젖은 피부에 달라붙은 제 페로몬 향이 좋은지 평소보다 더 안겨들고, 또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이겸이 너무 야했다.

“…….”

아, 이겸이 물 마시고 싶다.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고, 얼굴을 파묻어 혀로 헤집을 때마다 왈칵 넘치는 애액을 한참 빨다가 내벽을 문지르며 쑤셔 주고, 기다란 손가락 정도만 하나쯤 넣어 잘 느끼는 곳을 살살 건드리며 찔러 주면 자지러질 것이었다.

성기는 만져 주지 않은 채 집요하게 깊은 곳만 손톱 끝으로 갉작이면 결국, 이겸은 물줄기를 쏟아 낼 거고, 그때 성기 끝을 입에 문 채 귀두를 문질러 주며 전부 받아 마시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러트 때 제 정액이 잔뜩 묻은 몸으로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이겸을 떠올린 권태정이 보송한 목덜미로 입술을 묻었다. 살갗을 살짝 혀끝으로 핥자 이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한동안 섹스를 못 한 건 이겸도 마찬가지라 저와 똑같이 몸이 민감해져 있을 것이었다.

“현준이한테 물어볼까.”

“…….”

“진짜 가볍게 만지는 정도는 해도 되는지.”

권태정의 목소리가 목덜미에 닿는 것만으로도 이겸은 몸을 떨었다. 권태정과 더 닿고 싶었다. 몸 여기저기에 뜨거운 손이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끄러워져 곧바로 품에 얼굴을 파묻고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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