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19화 (119/174)

#119

오렌지 에이드를 단숨에 반 컵이나 비운 이겸은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팬케이크도 좀 먹어 볼래?”

얇은 팬케이크가 세 장 쌓인 위로 시럽을 듬뿍 뿌린 권태정이 이겸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 앞으로 가져갔다. 이겸은 가만히 입을 벌려 권태정이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시럽이 흐를까 봐 제 턱 아래로 손까지 대 주는 권태정을 보니 진짜 애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어때?”

“이것도 맛있어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다.”

“제가 먹을게요. 실장님도 얼른 드세요.”

“포크 드는 거 무거워서 안 돼. 자, 한 입 더 먹자.”

이겸의 입 안으로 팬케이크 조각을 더 넣어 준 권태정이 싱긋 웃었다. 그래도 뭔가 잘 먹을 수 있는 게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거 먹고 센터 가서 임신 맞는지 또 너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확인하고 집에 가서 푹 쉬자.”

“네….”

“갑자기 좀 걱정되네. 며칠 전에 내가 엄청 누르면서 섹스했잖아. 괜찮을까?”

이겸은 얼마 전 권태정과 잔뜩 몸을 겹쳤던 것을 떠올렸다. 현관과 욕실, 그리고 침대에서까지 몇 번이고 했던 걸 떠올리자 운동화 안에서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허벅지 안쪽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아, 아직… 엄청 작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거 다 물어봐야겠다. 아, 너무 떨려.”

한 손으로는 저를 먹여 주느라 포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떨린다며 가슴 위를 문지르는 권태정을 보던 이겸이 작게 웃었다. 권태정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덩달아 더 좋으면서도 떨렸다.

“나 어제 집에 갔었잖아.”

“네.”

“부모님께도 결혼하고 싶은 사람 있다고 말씀드렸어.”

“아…. 놀라셨겠어요.”

“응, 좀. 그래서 놀라신 김에 더 놀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보다 열두 살 어리다고도 말씀드렸어. 만나 보자고 하시는데 일단은 이겸이 너 건강 회복부터 하고 천천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겸은 저를 배려하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권태정의 누나와 형을 만나는 자리에서 잔뜩 긴장했던 것도 말하고, 또 그날 이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부 말했기에 권태정은 부모님을 당장 만나자는 말을 저에게 하기 힘들 것이었다.

“전… 빨리 만나 봬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 부담 안 가져도 돼. 당장 급한 일도 아니잖아. 네 건강, 그리고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한 거고.”

“…저번에는 정말 처음이라… 더 그랬는데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저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

“…빨리 뵈어야… 빨리… 결혼할 수 있잖아요….”

권태정의 포크 끝에 매달린 팬케이크에서 시럽이 기다랗게 뚜욱 떨어졌다. 멍하니 이겸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권태정이 포크를 내려 두고 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댄 채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미치겠다, 진짜.”

아, 씨발. 욕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좋은데. 씨발, 이렇게 미치겠는데 뭐라고 표현하지. 씨발, 진짜 돌겠는데?

“맞아. 이겸이 네 말이 다 맞아. 빨리 만나야 빨리 결혼하지. 서두를 일 맞네.”

테이블을 싹 다 쓸어 엎어 버리고 이겸을 눕힌 다음 몸 여기저기에 시럽을 뿌려 핥고 싶단 생각을 애써 짓누른 권태정이 겨우 웃음 지으며 이겸에게 다시 팬케이크를 먹여 주었다.

“다음 주쯤 약속 잡을게. 이번 주는 같이 푹 쉬자. 회사 출근도 당분간 미뤄야겠다.”

“그러셔도 돼요?”

“그럼. 그리고 안 돼도 되게 해야지.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이겸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방싯방싯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권태정은 적당한 크기로 자른 팬케이크 조각을 한 번 더 입에 넣어 주며 예쁜 웃음에 화답하듯 미소 지었다.

마음에 가득 찬 행복과 마주하며.

* * *

이겸은 초음파실 침대에 누워 초조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초음파 스캐너를 이겸의 배 위로 문지르며 화면을 보던 조현준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와, 임신 맞네요. 축하드립니다. 태정아, 축하한다.”

조현준의 말에 이겸이 얼른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권태정이 이겸의 뺨과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추고 그 정도로는 표현을 다 할 수 없다는 듯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머금다가 떼었다.

“저기…. 여기가 병원이라는 걸 잊으신 것 같은데요. 보호자분?”

“아, 참.”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는 권태정과 어쩔 줄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이겸을 번갈아 보던 조현준이 프로답게 친절한 의사의 웃음을 장착했다.

“4주 정도 된 것 같아요. 오메가셔서 베타보다 조금 더 증상이 빨리 나타나셨을 거예요. 여기 작은 점 같은 거 보이시죠? 이게 아기집이에요. 2주 뒤쯤 오시면 아이도 보일 겁니다. 심장 소리도 그땐 들으실 수 있어요.”

권태정의 손을 쥔 채 모니터 안으로 보이는 작은 아기집을 가만히 보던 이겸이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 진료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조현준이 활짝 웃으며 이겸을 바라보았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너무 좋은 일인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호르몬이 불안정해서 아이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정말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잘 드시고, 또 잘 쉬셔야 좋습니다.”

“네….”

조현준의 말을 가만히 듣던 권태정이 걱정 가득한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뭘 어떻게 조심하는 게 좋은지.”

“음,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리가 가는 일을 안 하는 게 좋지?”

“이겸이가 지금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것도 안 하는 게 좋겠지? 서서 일하니까.”

“응. 지금은 무조건 잘 먹고, 잘 쉬는 게 좋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이겸이 뭔가 생각난 듯 조현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조현준이 권태정을 바라보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웃음으로 이겸과 눈을 맞췄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이건… 임신이랑 관계없는 질문인데요….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제 이상형 같은 거 물어보셔도 됩니다.”

걱정이 가득한 이겸의 분위기를 조금 풀어 주고 싶어 농담하던 조현준은 저를 죽일 듯 보는 권태정을 흘끗 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실장님께서 노팅하신 다음부터…. 실장님이랑 같이 있으면 평소보다 더 막 심장이 뛰고…. 또 떨어져 있고, 눈에 안 보이면 지나칠 만큼 불안하고, 또 심장이 막 뛰고… 그랬거든요. 어, 이게 노팅 때문이라고 정확히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그때 이후로 그런 것 같아서… 혹시 이런 것도 제 호르몬이 불안정해서 그런 걸까요?”

이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조현준이 펜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펜으로 권태정을 가리켰다.

“너도 그랬어?”

“뭘.”

“너도 연이겸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비슷한 증상 있었냐고. 같이 있어도 감정이 확 치솟고, 떨어지면 불안감이 심해지고 그런 증상.”

“어. 나도 그랬어. 불안하다 못해 못 보면 좀 숨이 안 쉬어지고 그럴 정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조현준이 키보드로 뭔가를 쳐서 살펴보고는 다시 권태정과 이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각인 초기 증상인 것 같아요.”

“…각인이요?”

“네. 각인이 뭔지는 알고 계시죠?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알파와 오메가가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 페로몬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만 종속되는 걸 각인이라고 하는데 지금 두 분께서 말씀하신 증상들이 각인 초기 증상이거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에 놀란 이겸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각인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제대로 오메가로 살지 못한 이겸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일 중에 하나였기에 지금 권태정과 각인을 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제 서로에게만 반응을 하게 됐기 때문에 초기에 그 적응 과정으로 엄청나게 서로를 찾게 되는 거죠? 보통 짧으면 한 3개월, 길면 반년 정도까지도 그 증상이 나타나거든요. 충분히 같이 있어 주시는 게 좋아요.”

“야, 그런 건 빨리 알려 줬어야지.”

“야, 각인한 건 초음파에도 안 나오고, 피 검사로도 모르거든? 그러는 너는 서른둘 먹도록 각인한 것도 모르고 뭐 했어? 척하면 척이지.”

“누구처럼 난잡하게 안 살아서 몰랐지.”

“와…. 진짜 내가 난잡하게나 살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말도 안 되는 걸로 공격하는 권태정을 보고 혀를 찬 조현준이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장착하고 이겸을 바라보았다.

“임신 중이셔서 지금은 호르몬 조절도 불가하니까 되도록 태정이랑 같이 시간 보내시는 게 제일 좋아요. 시간 지나면 점점 안정될 겁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마 내내 태정이 찾게 되실 거예요. 알파 페로몬이 안정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네…. 여쭤보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또 뭐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언제든 궁금한 거 생기시면 여기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 주세요. 임신 초기고, 또 주의 깊게 봐야 할 시기니까 병원에 당분간은 자주 오셔야 합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

“네, 그럴게요.”

“임신에 각인에 축하드릴 일이 많네요. 축하드립니다. 2주 후에 뵐게요.”

“감사합니다아….”

부끄러워 귀가 빨개진 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이겸이 권태정과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섰다.

간호사에게 다음 예약일과 유의 사항, 그리고 초음파 사진 같은 것들을 받은 이겸이 저를 내내 부축하고 걷는 권태정에게 기댄 채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시선은 내내 까만 초음파 사진에 고정된 채였다.

“실장님, 아기집이 너무 작아요…. 다음에 보면 더 커질까요?”

“그렇지 않을까?”

차에 타서도 내내 눈을 떼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이겸이 귀여워 볼을 문질러 준 권태정이 얼른 병원을 빠져나갔다. 빨리 집에 가서 이겸을 침대에 눕혀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집까지 날아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싶어 최대한 안전히 운전해 집으로 간 권태정은 이겸이 신발을 벗을 때부터 과하다 느껴질 만큼 보호하며 함께 움직였다.

“지금 씻을 거야?”

“네에…. 씻고 자고 싶어요.”

“씻겨 줄게.”

“…괜찮아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전에 씻다가 쓰러진 적 있잖아.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혼자 씻으면 안 돼.”

부끄러워 발긋해진 얼굴로 고민하던 이겸이 살짝 권태정의 셔츠자락을 쥔 채 살살 흔들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고 싶어요.”

“아, 그것도 좋겠다. 여기 앉아 있어. 내가 물 받고 데리러올게. 절대 혼자 오지 마. 혹시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과하게 보호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권태정이 데리러 나올 때까지 조금도 걱정할 일이 없게 그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권태정과 각인이 됐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

어떡해…. 너무 좋아. 방싯 웃은 이겸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좋아서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잠이 와서 노곤하기도 하고, 참 많은 일을 겪어 머릿속이 어지럽기도 한데 그래도 좋았다. 너무너무.

“이겸아. 누가 그렇게 귀엽게 기다리래.”

“그냥…. 앉아 있었는데….”

“다리 흔드는 거 다 봤거든. 씨…. 가 아니라 진짜 존…. 너무 귀엽다.”

과격하게 표현하고픈 마음을 애써 순화한 권태정이 이겸을 부드럽게 일으켜 세워 욕실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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