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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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와…. 이겸아, 와, 이게 진짜….”
꽉 안고 있던 이겸의 몸을 살짝 놓은 권태정이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괜찮아?”
“네….”
이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권태정이 뺨과 목덜미를 한 번에 부드럽게 쥐곤 다른 손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들어 바라보았다.
“이건 언제 해 본 거야?”
“…어제요. 약국에서 사서… 여기 와서 해 봤어요.”
“왜 나 왔을 때 바로 얘기 안 했어. 애기 가져서 몸 계속 안 좋은데 잠도 안 자고, 지금 밥도 안 먹고 있는 거야? 딱딱한 데 이렇게 계속 있어도 돼? 내가 미쳤지….”
“괜찮아요, 실장님….”
“춥지는 않아? 아, 새벽에 쌀쌀하던데…. 씨발, 안 되겠다. 아, 미안. 욕하면 안 되지…. 일단, 일단 센터부터 가자. 얼굴이 너무 하얗고… 아파 보여.”
평소와 다르게 허둥지둥하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겸이 두 손으로 제 앞에 있는 권태정의 얼굴을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저에게 멈추는 깊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실장님….”
“응, 이겸아.”
눈을 살짝 감은 이겸이 조금 더 고개를 앞으로 움직여 권태정의 마른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맞췄다.
“…실장님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신 것들 전부…. 제 소원이기도 해요.”
“…….”
“여기서 나가서… 실장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바보처럼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 않아요….”
떨림 속 또렷한 진심을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권태정은 가만히 이겸의 고백을 마주했다. 몹시 떨리고… 황홀했다.
“…제가 실장님께 더 큰 짐이 되면 어쩌나 겁이 나서… 애기 가진 것 같단 말씀 바로 못 드렸어요….”
“이겸아.”
“혼자서는 그런 생각만 들었는데…. 실장님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잘 안 나고… 봐서 좋다는 생각이랑, 실장님이 이런 바보 같은 저를 계속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눈물이 맺혀 눈가가 반짝반짝하는 이겸을 보며 웃음 지은 권태정이 먼저 입술을 깊게 물었다가 놓으며 뺨을 매만졌다.
“바보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착해서 그런 거야. 이겸이 너 자신보다 날 먼저 생각하느라 그런 거잖아. 내가 속상할까 봐, 내가 힘들까 봐, 내가 지칠까 봐.”
“…….”
“날 사랑하니까.”
또다시 사랑이라는 말에 이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마음 속 권태정의 사랑이, 그리고 그에게 전하고픈 저의 사랑이 가득 차 있었기에.
“이겸아.”
“…….”
“나 사랑해?”
마음에 가득 찬 사랑이 단단히 뭉쳐 권태정을 향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대답하고 싶었다. 바보처럼 마음을 전할 따뜻하고 다정한 순간을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찬 권태정의 눈을 보며, 또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만큼 좋아 어쩔 줄을 모르겠는 제 마음을 마주하며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 위로 뚝뚝 떨어져 흘렀다.
“사랑해요, 실장님….”
“…….”
“…실장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
“이제 뭐든 다… 실장님이랑 같이 하고 싶어요. 혼자서 바보 같은 생각… 안 하고, 뭐든 다, 전부 다… 실장님이랑 같이 할래요. 사랑한다는 말도 계속, 계속… 많이 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와르르 쏟아 내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꼭 그 마음 안으로 제가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저도 이제 다… 보여 드릴 거예요….”
권태정의 손을 잡은 이겸이 제 심장 위로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손이 마음 위로 닿는 순간 이겸은 정말 제 모든 것이 전부 권태정에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전부 다… 실장님 거니까….”
씨발. 다 내 거래.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가빠지는 경험을 하며 권태정이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두 눈동자가 예뻐 마음은 꽉 조이고, 아랫배는 당겼다.
“이제 진짜 다 내 거야?”
“…네….
“그럼 이제 마음껏 사랑해도 되지? 무섭다고 도망가면 안 돼.”
“…안 그래요…. 더,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씨발. 사랑해 달래. 존나 예뻐. 이겸에게 차마 전하지 못할 경박스러운 기쁨을 계속 머릿속으로 터뜨린 권태정이 어린애처럼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며 매달리는 이겸을 품에 가득 안았다.
이겸의 고백은 황홀하다는 말로 다 담을 수가 없을 만큼 대단했다. 너무 좋아서 울고 싶었다. 저를 끌어안고 우는 이겸의 울음소리에 권태정의 속눈썹도 이내 축축하게 젖었다.
“울지 마, 이겸아.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는데 울기까지 하면 힘 더 빠져. 우리 애기, 뚝.”
저까지 울면 이겸이 더 울 것 같아 눈물을 삼킨 권태정이 살짝 몸을 떼고 흠뻑 젖은 이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이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넘치는 것조차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고 그 눈가에 입술을 댄 채 한참이나 눈물을 머금어야만 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겸은 눈물에서도 복숭아 향이 났다.
“코 빨개졌어.”
많이 울어 빨개진 눈가와 코끝을 톡 두드린 권태정이 웃음 지으며 이겸의 뺨에 깊게 입 맞췄다. 쪽 소리가 나고 떨어지는 입술을 가만히 보던 이겸이 고개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눈을 감았다.
“…….”
씨발, 존나 예쁘네, 진짜. 속으로 과격하게 말한 권태정은 고개를 비틀며 저에게 다가온 입술을 머금었다. 마구 집어삼켜 미친놈처럼 헤집고 싶지만, 밤새 무리하고, 임신까지 한 이겸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가 놓고, 또 겹치며 혀끝만 살살 문질러 주니 이겸의 몸이 더욱 앞으로 기울었다. 권태정은 안 되겠다는 듯 이겸을 아예 제 허벅지 위로 올려 앉히고 몸을 잔뜩 밀착했다. 몸과 몸이 맞물리듯 완전히 맞닿은 뒤에야 안도가 흘렀다.
“내가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데.”
“하아….”
“내 페로몬 때문에 힘들까 봐 참으면서도 이겸이 너만 보면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어.”
“…저는 그것도 모르고…. 실장님한테 제가 못되게 굴어서… 실장님이 이제 저 싫어지신 줄 알고….”
“그래서 우리 자기 속상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의 등을 쓸어 준 권태정이 웃으며 다시 입술에 몇 번이고 쪽, 쪽 입 맞췄다. 한참을 만지고, 입 맞추고 나니 그래도 핏기가 없던 얼굴에 약한 혈색이 돌았다.
“이제 여기서 나갈까?”
“…네.”
“센터 가서 몸 상태 안 좋은 것도 물어보고, 임신한 것도 확인하고 집에 가서 쉬자.”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다시 한번 권태정을 꼭 끌어안았다가 다리 위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이겸이 휘청댈까 싶어 부축한 권태정이 얼른 문을 열고 방보다 따뜻한 바깥으로 이겸을 내보내 앉혔다. 그리고 쇼핑백을 찾아 이겸이 말해 주는 것을 찾아 하나씩 담았다. 말하는 걸 다 담았는데도 큰 쇼핑백 하나도 차지 못한 게 애처로웠다.
“다른 거 더 챙길 거 없어?”
“네….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옷도 다 집에 있고…. 여기서는 할아버지 유품만 가져가면 돼요.”
“그럼 이제 가자. 곧 공사 시작할 거야.”
방을 나와 신발을 신은 권태정이 다리를 구부려 앉아 이겸의 발에 운동화를 신겨 주었다. 그리고 빛을 받아 말간 이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랑 평생 놀자. 석 달은 너무 짧다.”
석 달의 마지막 날 권태정이 소리 낸 ‘평생’이라는 말이 좋아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빛에 부서져 반짝이고, 그 사이로 떨어지지 않는 시선과 웃음이 매달렸다. 권태정은 이겸의 하얀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며 일어났다.
“가자.”
커다란 손이 이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겸은 손가락을 펼쳐 권태정의 손가락 사이로 넣어 단단히 마주 잡았다. 함께 걸음을 옮겨 초록색 대문을 마지막으로 넘어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좁은 골목에 서서 맞은편에 있는 허물어진 담과 벽돌 더미를 눈에 담았다.
평생 잊을 수 없을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벽돌 더미에 긴 다리를 펴고 주저앉아 저를 기다리던 권태정의 모습이.
“어디 가서 아침부터 먹고 가자. 아직 센터 열 시간도 아니고…. 배고프지. 어제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다며.”
“아…. 냄새를 맡았는데 갑자기 속이 막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지금은 좀 괜찮아? 뭐 먹을 수 있겠어?”
“음…. 주스 같은 거 마시고 싶어요. 새콤달콤한 거….”
“새콤달콤한 거? 알았어. 주스 마시러 가자.”
골목을 빠져나가 조수석에 이겸을 태운 권태정이 안전벨트까지 채워 준 다음에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에도 이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실장님!”
운전석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권태정은 소장과 함께 다가오는 백 비서를 바라보았다. 저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소장에게 마찬가지로 인사한 권태정이 이겸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곤 운전석 문을 닫았다.
“백 비서님, 잠깐만요.”
사람 좋게 웃으며 보는 소장에게 비즈니스용 친절한 미소를 보인 권태정이 조심스럽게 백 비서를 불러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소곤댔다.
“나 이겸이 데리고 좀 가 봐야 할 것 같거든. 권한 일임해 줄 테니까 네가 좀 대신 오늘 일 좀 봐 주라.”
“알았어. 여긴 걱정하지 마. 포클레인이랑 다 왔고, 날도 좋아서 별문제 없을 거야. 혹시 일 생기면 연락할게. 연락 받을 수는 있지?”
“어. 이겸이 아침 먹이고 센터 좀 데려가려고.”
“센터? 연이겸 씨 어디 안 좋아?”
“아…. 아직 정확한 건 아니라 말하긴 그렇고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 줄게.”
고개를 끄덕인 백 비서가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며 권태정의 팔을 두드렸다. 그에 고맙다고 인사한 권태정이 소장에게 깍듯하게 숙여 인사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실장님, 오늘 여기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백 비서한테 일임했어. 내가 보고 있다고 철거가 더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기 무너지는 거 나도 직접 보고 싶진 않네.”
“…….”
“정들었나 봐. 빨간 컨테이너는 빼고.”
권태정의 말에 웃은 이겸이 점점 가까워지는 빨간 컨테이너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컨테이너를 떠올리면 안 좋은 기억들만 떠올랐는데 지금은 권태정과 함께한 것들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게 너무나 짙고 행복해서 다른 안 좋은 기억은 그 위로 올라올 수가 없었다.
“저는… 저 컨테이너를 보기만 해도 귀에 빗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난 그날 빗소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나.”
“…….”
“네 목소리, 숨소리만 생각나.”
부끄러워하는 이겸을 흘끗 보고 웃은 권태정이 커다란 손을 뻗어 보송한 뺨을 만지작댔다. 이겸은 그 손에 얼굴을 기대며 철거촌 출구 쪽에 선 여러 대의 포클레인과 많은 인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다람동이 철거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울고 싶을 만큼 슬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산 곳이라 그런지 이제 아예 없어진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기 다시 올 일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
“나도 그런데 이겸이 넌 더 그럴 거야. 예전부터 여기 살았으니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소리 내어 말해 주는 권태정을 바라본 이겸이 가만히 제 다리 위에 놓인 따뜻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아요. 다람동은 이제 없지만…. 저한테는 실장님이 계시잖아요.”
신호에 멈춰 선 권태정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가오는 권태정을 향해 똑같이 몸을 기울인 이겸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몇 번 마주했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몇 번 울린 다음에야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응,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이제 내가 있잖아.”
“…….”
“난 절대 안 무너져.”
씩 웃는 권태정을 향해 다시 고개를 움직인 이겸이 얼굴을 감싸고 깊게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그 입술에는 조금의 불안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저에게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권태정이 있으니까. 이겸은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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