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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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권태정이 소리 낸 사랑이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소리 낸 이겸이 고개를 들어 저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권태정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권태정의 눈은 꼭 봄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피는 찰나의 벚꽃 같기도 하고, 아주 추운 날 두 손을 따뜻하게 해 주는 핫초코 같기도 했다.
또 아주 많이 힘든 밤, 홀로 집까지 걷는 내내 뺨을 토닥여 주는 따뜻한 바람 같기도 하고, 햇살 좋은 날 바싹 마른 빨래에서 나는 짙은 비누 냄새 같기도 했다.
권태정은 이겸에게 위로였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다 괜찮아질 것 같은 유일한 위로. 너무 많이 좋아해 자꾸만 불안해지고, 혹시나 제가 다 망칠까 봐 겁이 나 눈물이 나는 단 하나의….
“…….”
사랑. 이겸은 다시 한번 권태정이 소리 낸 사랑을 입술에 묻힌 채 숨을 덮어씌웠다.
“…저도 그래요. 종일 실장님 생각만 해요. 카페에서 일할 때도, 손님을 볼 때도….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데울 때도 계속 실장님만 떠올라요. 실장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어요.”
“…….”
“…실장님을 좋아해서… 너무 많이 좋아해서…. 같이 있고 싶은데 혹시라도 제가… 실장님께 짐이 될까 봐 무서워요.”
“이겸아.”
“…그래서 실장님께서도 한 번은… 생각을 잘 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생각?”
“책임감 때문에… 절 참아 주고 계신 건 아닌지….”
이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권태정이 헛숨을 터뜨렸다. 차라리 이해하지 못하면 좋았을 텐데 권태정은 지금 이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를 해 버렸다.
“그러니까 되돌릴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
“내가 널 책임지겠다고 내뱉은 말 때문에 싫은데 억지로 널 참아 주고 있다고?”
“…마지막이잖아요.”
“…….”
“오늘이… 이런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 실장님께서도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서 드린 말씀이에요.”
괴로운 숨을 내뱉은 권태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비가 올 것처럼 습한 밤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성질을 못 이기고 애처럼 굴면 안 되는데 제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생각하지 못한 쪽으로 감정이 흐를 때마다 자꾸만 감정적으로 굴게 됐다.
“하….”
무너지듯 숨을 내쉬며 뻐근한 눈 위를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가 뗀 권태정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겸의 맞은편 벽으로 주저앉아 거리를 두고 눈을 맞췄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다 생각할게. 아직도 나한테 충동이란 말이 유효한지, 내 마음이 어떤지…. 혹시 억지로 짓누르고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있지는 않은지. 있다면 그게 뭔지 다 생각할게. 그러니까 이겸이 너도 생각해 봐.”
“…….”
“이런 거 저런 거 다 빼고 나 하나만 봤을 때 네가 정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소리가 멈추면 숨이 막힐 만큼 정적이 맴도는 방 안으로 어느새 침착하게 가라앉은 두 숨소리가 뒤섞였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권태정이 낡아 군데군데 갈라지고 찢어진 바닥을 보며 그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내일이면 무너질 집에 마지막까지 같이 있게 될 줄은 몰랐어.”
“…….”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네. 너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
“생각해 보면 전에 여기서 같이 지낼 때도 괜찮았어. 괜찮지 않을 때마다 널 보면 그냥 다 괜찮아졌어. 이 딱딱한 바닥도, 다 찢어진 벽지도, 잘 나오지도 않는 따뜻한 물도.”
“…….”
“그때 나 너밖에 안 보였거든. 같이 있고 싶어서, 네가 나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서 다른 건 눈에 하나도 안 보였어.”
같은 방 안에 있지만, 조금도 닿지 않는 곳에 앉은 권태정을 바라본 이겸이 울먹였다. 권태정과 몸을 붙인 채 잠들고, 함께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간들이 아주 작은 순간까지 그대로 전부 다 선명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도 그래. 네가 너무 예뻐서 다른 건 눈에 하나도 안 보이고 생각도 안 나.”
“…….”
“그리고 나 누굴 참아 내면서까지 만날 마음 없어. 그만큼 착하지도 않고. 내가 왜 참아. 참을 줄 알았으면 뉴스도 안 탔지. 운전하다가 나한테 지랄하는 거 하나도 못 참아서 쫓아가는데 내가 사람을 참아 낸다고?”
기다란 다리를 접고 있는 게 불편해 앞으로 쭉 편 권태정이 발끝으로 이불 밖에 나와 있는 이겸의 발을 톡 건드렸다. 방이 무척 좁아 가능한 작은 접촉이었다.
갑자기 닿는 것에 놀란 이겸이 저도 모르게 발끝을 오므렸다. 양말을 신었는데도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아 숨을 쉬듯 웃은 권태정이 벽으로 머리를 기댄 채 이겸을 바라보았다.
“물론 참아야 할 때도 있지. 짐승 새끼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
“지금도 나 너 만지고 싶은 거, 눈물 다 먹고 싶은 거 진짜 참고 있거든.”
“…….”
“가볍지? 이런 상황에서 저딴 말을 하나 싶을 거야. 그런데 나 원래 이래. 너도 알잖아. 그래서 날 좋아한 거 아냐? 어렵지 않고 쉬워서. 꼬지 않고 다 보여서. 좋으면 좋다, 서운하면 서운하다 다 말해서.”
이겸은 권태정을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솔직할 뿐이고, 또 상대를 심적으로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 배려하는, 그게 몸에 밴 사람일 뿐이었다. 상대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자신을 가볍게 포장해서라도 웃음 짓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도 똑같아. 널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하는 거고, 너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고, 혼자서는 죽어도 나가기 싫으니까 곧 무너질 철거촌에서 너랑 같이 있는 거야.”
“…….”
“그게 전부야.”
솔직히 당장이라도 이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권태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다가가 얼굴을 매만지고, 부드럽게 달래고 사랑을 속삭이면 이겸이 안겨 들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겸의 말대로 마지막 날이니까.
함께 보낸 석 달의 마지막 날, 그 석 달을, 그리고 지금을, 또 그보다 길 앞날을 이겸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 생각이 불안과 두려움일지라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이겸의 마음을 믿으니까. 그리고 모든 것을 부술 것 같은 불안이나 두려움도 때론 사랑의 몸집을 빠르게 불려 주는 촉매제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함께할 시간들을 위해 새벽의 아주 느린 호흡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래, 그 정도는. 권태정은 다시 적요한 방 안에서 이따금 이겸의 발끝을 톡 두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겸도 더 이상 발끝을 움츠리지 않았다.
밤에 가깝던 새벽이 오롯한 이름을 가지고, 다시 아침에 가깝게 기울자 방 안으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백 비서에게 이겸의 집에 둘이 있음을 알린 권태정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벽에서 등을 떼 몸을 일으켰다.
밤새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있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권태정은 이겸의 앞으로 가 무릎을 세우고 앉은 이겸의 두 다리를 제 다리 사이에 가두며 마주 보고 앉았다.
“이렇게 긴 밤이 또 있을까.”
이겸을 안심시키듯 엷게 웃은 권태정이 부드럽게 이겸의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을 매만졌다. 며칠 째 아파 보이는 얼굴이라 걱정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밤새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해 봤는데 난 달라질 거 없어.”
“…….”
“사랑해.”
사랑한다는 흔들림 없는 말에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권태정이 말한 사랑은 이겸의 허락도 없이 몸 여기저기로 파고들어 밤새 뭉쳐 있던 걱정과 미안함을 차례로 녹이며 사랑으로 물들였다. 마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이겸이 넌?”
“…….”
“나 사랑해?”
아주 밝은 날, 가장 환하게 빛나 이겸이 많이 웃을 수 있는 순간에 묻고 싶었던 말을 소리 낸 권태정이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덜컥 치미는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 말을 이었다.
“네가 어떤 대답을 해도 결과는 같을 거야. 넌 나랑 여기서 같이 나가서 집으로 돌아갈 거고, 앞으로도 나랑 같이 있을 거야.”
이겸의 마음을 알기에 결국은 저에게 올 거란 것을 알지만, 요즘의 불안정해 보이던 이겸의 마음과 아파 보이는 얼굴이 권태정을 불안하게 했다.
어둠이 주던 용기가 걷히고 기어이 마주해 버린 마지막 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권태정은 혹시라도 이겸이 제 손을 놓을까 봐 저를 거절할까 봐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전에 나한테 그랬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겠다고. 그때 내가 뭐 해 달라고 말 안 한 것 같은데 지금 할게.”
“…….”
“내 소원 들어줘. 할 수 없다고는 하지 말고. 이겸이 너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이불에 감춰진 이겸의 무릎 쪽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나가.”
“…….”
“그리고 나가서 나랑 결혼해.”
떨리는 숨소리와 함께 흐른 고백에 이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권태정을 담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인 채였다. 대답을 할 것처럼 입술을 벌리는 이겸을 보던 권태정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
“…나 사랑해 줘.”
애처로운 권태정의 고백에 기어이 흘러넘친 눈물이 이겸의 창백한 뺨을 적셨다. 이겸은 밤새 잠시도 놓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이불 밖으로 꺼내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겸이 내민 것을 받아 든 권태정이 낯선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옆에 쓰인 ‘임신’이란 말을 눈에 담았다.
“아….”
“…얼마 전부터 몸이 이상했어요. 계속 춥고, 졸리기도 하고…. 또 평소라면 별일 아니라 생각했을 일에도 마음이 막 크게… 울렁울렁하고….”
“…그러니까 지금…. 어, 이겸아….”
“혹시나 해서 해 봤는데…. 맞는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겸을 보다가 다시 선명한 두 줄로 시선을 떨어뜨린 권태정이 몇 번이나 두 줄이면 임신이라는 문구를 눈에 담았다.
“애기… 가진 거 맞지?”
“…네에….”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권태정이 이겸을 꽉 끌어안았다. 마음이 터져 버릴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도 기쁨이라는 감정은 너무나도 선명히 권태정을 마구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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