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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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굴이 아직 창백하네. 어제 놀란 것도 그렇고 아직 컨디션이 안 돌아왔나 봐. 오늘 좀 푹 쉬어야겠다.”
“아…. 딱히 아픈 데는 없는데….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진짜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닌가.”
“…….‘”
“약이라도 사 와야겠다. 빨리 갔다 올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권태정을 보고 놀란 이겸이 얼른 그 팔을 잡았다.
“좀 춥고, 몸이 늘어지는 게 전부라… 하루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목 아프고, 기침 나고 그런 것도 아니라서 약 안 먹어도 괜찮아요.”
“그럼 아침 먹고 일단 좀 쉬어 보자. 자고 일어나도 춥고 그러면 현준이한테 전화할게. 그때 센터에 있던 그 친구.”
“네에….”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빵을 몇 입 더 먹었다. 고소한 맛이 좋긴 하지만 계속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작게 숨을 내쉰 이겸이 우유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다 먹은 거야?”
“네….”
“그럼 들어가자.”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권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방으로 향했다. 이겸은 몸에 닿은 권태정의 온기가 좋아 조금 더 품 쪽으로 안겨들었다. 품에서는 특유의 마른 장미향과 함께 쓰는 바디워시의 포근한 향이 났다.
“자다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침대에 누운 이겸이 제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잠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이지만, 그래도 무섭지 않도록 약하게 불까지 켜 주는 것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매일 잠을 네다섯 시간만 자고도 잘 버텼었는데 요즘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특히 요 며칠은 이상할 만큼 더 그랬다. 어제 계단에 앉아 권태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든 것도 그렇고, 또 저를 방으로 옮겨 주는데도 전혀 모른 채 잤던 걸 보면 확실히 잠이 많아진 것 같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또 누웠다고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것만 봐도 확실히 어딘가가 아프기는 한 것 같았다.
“잘 자.”
얕은 잠에 빠져드는 이겸의 귓가로 권태정의 인사가 닿았다. 같이 있어 주세요, 실장님…. 전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한 말이 가물가물한 정신 안에서 뱅뱅 돌다가 이내 흐트러졌다.
* * *
며칠을 쉬었지만, 오한과 나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특별히 다른 증상이 있는 건 아니라 이겸은 옷을 한 겹 더 입고, 졸릴 때마다 잠을 자는 식으로 증상을 해소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겸에게는 해소할 방법조차 알 수 없는 일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권태정과의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묘한 어색함이었다.
그렇다고 권태정이 저에게 데면데면하게 군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권태정은 여전히 다정하게 저를 챙겨 주었다. 열이 나는지 아침마다 체크하고, 푹 쉬어도 창백해 보이는 저를 내내 걱정하기도 했다.
입맛이 없어 잘 먹지 못하는 저를 위해 복숭아 무스를 사다 주기도 하고,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말에 바로 나가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열 가지 맛이나 사 오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며칠 동안 스킨십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처럼 계속 뽀뽀를 하거나 꽉 끌어안는다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깊게 키스하지 않는 권태정을 보며 이겸은 조금 위축됐다.
“이겸아. 오늘 아빠가 불러서 회사에 좀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내일 철거라 뭐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 봐. 다시 회사 돌아가는 일도 상의해야 하고.”
“아…. 네. 늦으세요?”
“회사에서 일 보고 같이 집으로 퇴근하자고 하시는 거 보면 저녁까지 있다가 와야 할 것 같아.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이겸이 지난밤에 온 강지훈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저 실장님, 그럼 저 오늘 낮에 몇 시간 나가서 일하고 와도 될까요? 지훈이 형이 하루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봐서요…. 어려운 일 아니고, 그냥 개업 기념 전단지 나눠주는 일이에요.”
“힘들게 뭐 하러. 이제 그런 일 안 해도….”
“…….”
빚에 대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말이 나오자 순간 또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권태정의 눈치를 보던 이겸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동물 탈 쓰는 일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니에요. 낮에 그냥 몇 시간 하는 거라….”
굳이 나가서 고된 일을 하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저도 없는 집에 종일 혼자 외롭게 있는 것보단 그 떨거지들이라도 만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권태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너무 무리하진 말고. 괜찮다곤 하지만 이겸이 너 아직도 좀 창백해 보여. 일하러 갈 게 아니라 센터를 가야 할 것 같은데.”
“힘들면 그만하고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실장님.”
“알았어. 나도 얼른 가야겠다. 아빠가 시간 안 지키는 거 진짜 싫어하시거든. 옷 갈아입고 나올게.”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멀쩡하게 대화가 이어지고 있고, 분위기가 나쁜 것도 아닌데 묘한 어색함이 있어 자꾸 권태정의 눈치를 보게 됐다. 제가 권태정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게 마음에 내내 걸려 신경이 쓰였다.
“…….”
권태정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이겸은 머리를 짧게 쓰다듬고 떨어지는 손을 보며 현관으로 나갔다.
“갔다 올게. 저녁에 봐.”
“네…. 실장님. 다녀오세요.”
“응. 아, 이거.”
이겸은 권태정이 내미는 까만 카드를 두 손으로 받았다. 까만 카드는 그냥 보기만 해도 무척 좋아 보였다.
“점심 맛있는 걸로 먹어. 편의점에서 대충 먹지 말고. 같이 일하는 애들도 다 사 줘.”
“…고맙습니다. 맛있는 걸로 먹을게요. 실장님도 점심이랑 저녁 꼭꼭 챙겨 드세요.”
“응, 그럴게. 아, 그리고 그 카드 십만 원 이하는 결제 안 되니까 꼭 십만 원 이상 맛있는 걸로 먹어.”
“…정말 결제가 안 돼요?”
“응. 그러니까 꼭 비싸고 맛있는 걸로 먹어.”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뭔가 느낀 듯 이겸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여 목덜미 근처에 얼굴을 대었다가 살짝 떼었다.
“억제제 안 먹었어?”
“아…. 네. 아직….”
안 먹었다는 말에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인 권태정이 이겸의 뺨을 살짝 손끝으로 문질렀다.
“꼭 먹고 나가. 페로몬 진해.”
“…네….”
싱긋 웃은 권태정이 그대로 몸을 떼고 손을 한 번 흔들어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이겸은 현관에 선 채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목덜미에 묻은 권태정의 숨을 덮듯 손으로 감싼 이겸이 부엌으로 가 억제제를 꺼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나가기 전에 현관에서 입을 맞추기도 하고, 더 깊게 몸을 마주 댔을 텐데 그런 것까지 전부 사라진 것 같아 자꾸만 걱정이 고였다.
그냥 그런 날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벌써 며칠이나 꽉 끌어안지도 키스하지도 않는 권태정을 떠올리니 심장이 꽉 수축하며 뻐근하게 아파 왔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이겸이 때마침 전화를 건 강지훈에게 일을 할 수 있음을 알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부디 머릿속에 달라붙은 상념들이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 * *
강지훈은 옷을 두 겹 껴입은 이겸을 위아래로 대놓고 보며 혀를 찼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저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라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야, 이 더운데 뭔 옷을 두 겹이나 껴입었어? 안 더워? 오늘 28도래.”
“자꾸 으슬으슬해서요.”
“엥, 으슬으슬할 날씨가 아닌데. 18도도 아니고 28도라니까? 난 반팔 입어도 지금 더운데.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좀 그래 보이는데. 야, 유재민. 얘 봐봐. 아파 보이지.”
안에서 전단지를 잔뜩 가지고 나와 나눠주던 유재민이 이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몸살 아냐? 너 일할 수 있어?”
“저도 감기인 줄 알았는데 좀 춥고 졸린 거 말고는 증상이 없어서…. 감기는 아닌 것 같아요.”
“졸리면 전단지 나눠주다가 자는 거 아냐?”
유재민의 말에 강지훈이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전단지를 이겸에게 듬뿍 얹어 주었다.
“그래도 탈 안 쓰고 하는 게 어디냐. 이 날씨에 씨발, 그거 쓰면 뒈질 듯. 전에 나 아는 애 8월에 한번 돈 더 준대서 쓰고 하다가 진짜 기절했어. 하늘 존나 삥삥 돈다 그러더니 그냥 뒤로 넘어갔다니까.”
“안 다치셨어요?”
“다행히 내가 얼른 잡아서 다치진 않았는데 걔 눈 돌아가면서 쓰러지는 거 보는데 존나 무서워서 나도 여름엔 편한 것만 해. 너도 조심해.”
“네….”
“아, 근데 너 오늘 이거 하러 나와도 돼? 재벌이 해도 된대?”
전단지를 탁탁 털어 모서리각을 맞추던 이겸이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네?”
“너 그… 권태정이랑 사귀는 거 맞지. 전에 너 술 취한 날에도 갑자기 와서 데려가고 맞는 것 같은데. 그때 존나 무서웠다니까. 내가 자기 거 뺏어라도 간 것처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해도 전혀 믿지 않는 강지훈과 유재민의 얼굴을 살핀 이겸이 얼른 전단지를 품에 안은 채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알게 되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제가 알려서 권태정을 더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야, 너 근데 진짜 괜찮아? 힘들면 말해.”
“네…. 그런데 지금은 진짜 괜찮아요.”
“너 아침 안 먹었지.”
“네, 형은요?”
“난 먹었지. 밥 안 먹으면 난 일 못 해. 아, 점심 뭐 먹냐.”
점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이겸은 권태정이 아침에 준 카드를 주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사 주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기…. 형, 오늘은 제가 점심 살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헐, 진짜? 야, 됐어. 너 빚 갚아야지. 내가 존나 돈 없어도 너한테 돈 쓰라곤 안 해.”
“아….”
빚 이야기가 나오자 이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 빚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빚 같은 거 없게 됐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면 되는데 역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그 말 다음에 어떻게 그 큰돈을 갚게 됐는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붙을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권태정의 이야기가 나올 것도 알기에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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