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
•
“뭐가 죄송해. 그러지 마. 내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 이 정도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매일도 할 수 있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별일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또 별일이 아니라는 진심이 안도가 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오히려 이겸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저는 권태정에게 반의반도 해 줄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충격과 미안함, 죄책감과 고마움처럼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꽉 차는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들어 적절한 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겸은 떨리는 손을 붙든 채 입술을 달싹였다. 숨 쉬는 게 힘들어지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흔들렸다.
“아….”
단순히 놀라서 그러는 거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더 가라앉은 이겸을 가만히 바라보던 권태정이 평소와 조금 다른 이겸의 페로몬에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평소처럼 달착지근하게 달라붙어 흥분을 부추기는 페로몬이 아니라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게 전부 다 느껴지는 쪽의 페로몬이 이겸에게서 흐르고 있었다.
감정이 요동치는 만큼 페로몬도 불안정하게 마구 흘렀다가 멈추고, 또 흠뻑 터져 나왔다가 갈무리되는 것을 반복했다. 일단은 이겸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다 생각한 권태정이 몸을 기울였다.
페로몬 조절이 되지 않아 이렇게 마구 흐르다 보면 쇼크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겸은 아직 페로몬 조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 조심해야만 했다.
“이겸아. 일단 방에 가서 좀 쉬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페로몬 너무 불안정해. 이러다 쓰러져.”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는 이겸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킨 권태정이 이미 미열이 묻어나는 몸에 인상을 썼다. 제 선물에 이겸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보다 이러다 이겸이 쓰러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머리와 마음을 더 가득 채웠다.
“숨 천천히 쉬어 봐. 천천히. 응, 그렇게. 괜찮아.”
이러다 페로몬 교란이라도 오면 이겸이 버티지 못할 것이기에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쓴 권태정이 마른 몸을 끌어안아 부축한 채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다시 숨 편하게 쉬어 보자. 응, 천천히.”
이겸을 침대에 눕힌 권태정이 가슴 위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쓸다가 심장박동이 가라앉지 않는 것에 인상을 썼다.
“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던 권태정이 여전히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흐르는 이겸을 향해 고개를 기울여 내렸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을 머금으며 숨을 불어 넣었다.
“나 따라서 쉬어 봐. 들이마시고. 응, 그렇지.”
숨을 불어 넣어 주며 배 위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권태정이 이겸에게 흥분이나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약하게 페로몬을 풀었다.
“실장님….”
“숨 쉬기 좀 괜찮아?”
“…네….”
불안정한 이겸의 페로몬에 우성알파, 권태정의 페로몬이 뒤섞이며 점점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권태정은 이겸이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만큼만 더 페로몬을 풀다가 갈무리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숨 쉬기가 한결 편해진 이겸이 지친 듯 눈을 감았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전까지 숨을 쉬기 힘들 만큼의 괴로움은 아니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쉬어. 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식은땀이 식으며 침대 아래로 확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겸은 꼭 섹스 후 까무룩 정신을 잃는 순간처럼 몸에서 힘이 전부 빠지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든 이겸의 이마를 짚어 보고, 심장박동을 체크하며 안정된 것을 확인한 권태정이 그제야 침대 헤드로 몸을 기댄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우선적으로 걱정이 되던 이겸의 상태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자 다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마음을 채웠다.
“…….”
도대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에, 놀라도 결국은 기쁨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일에 이겸이 그렇게 운 이유가 뭘까.
왜지. 왜 슬픈 거지. 빚이 없어진 게 슬플 리는 없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권태정은 쉽게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찾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마음을 넘어 삶 자체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게 사라졌는데 기뻐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아예 권태정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쁨이 아니라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질 정도의 혼란한 감정을 이겸이 느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플 만큼 수축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뭐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생각이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권태정은 한낮이 되고, 그 밝은 빛이 제 풀에 지쳐 수그러들 때까지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불안정한 페로몬의 발산으로 기진한 이겸은 노을이 방 안을 물들일 때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까지 잤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주황빛으로 물든 창밖을 멍하니 보던 이겸이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 옆에 앉아 있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
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게 생각에 잠긴 권태정은 몹시 심각해 보였다. 권태정을 부르려던 이겸은 결국,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이겸아. 왜 이렇게 울어.’
바보처럼 울어 버린 게 생각나 마음이 후회로 물들었다.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더는 빚 때문에 무겁지 않아도 된다고 눈을 맞추며 들뜬 모습으로 전한 권태정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어, 일어났어?”
이마 위로 따뜻한 손이 얹혔다. 이겸은 손이 닿는 순간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저를 내려다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열은 내렸고…. 음, 페로몬 확인해 보자.”
그대로 몸을 내린 권태정이 이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깊게 입술이 눌리고, 숨이 닿는 느낌에 움찔댄 이겸이 미소 지으며 몸을 바로 세우는 권태정을 보며 입술 안쪽을 꾹꾹 깨물었다. 제 몸 위를 덮었던 권태정의 무게가 아직도 느껴져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아, 먹고 싶은 냄새.”
다시 몸을 내려 이겸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문 권태정이 이 정도로는 아쉽다는 듯 아랫입술을 축였다.
“…죄송해요. 이렇게 오래 자려고 한 건 아닌데….”
내내 제 옆을 지켰을 권태정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금세 들어찼다.
“뭐가 그렇게 죄송해.”
“…네?”
“힘들어서 쉰 거잖아. 죄송할 일 아니야. 그리고 내가 네 빚 해결한 것도 죄송해할 일 아니고.”
“그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이야기가 다시 가운데에 놓이자 해야 할 말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마음을 말해야 할지 마음을 가다듬던 이겸은 제 대답을 잠자코 기다리는 권태정을 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실장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하셨지만, 저한테는… 너무 커다란 일이에요.”
“…….”
“제가 평생을 일해서 갚아도… 어쩌면 못 갚을지도 모를 그런 큰… 일이었는데 그걸 해결해 주셨다고 하니까…. 번번이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죄송해요.”
“전혀 좋지 않단 거네, 그럼.”
권태정의 낮은 목소리에 너무 미안해 눈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고 있던 이겸의 고개가 들렸다. 이겸은 덤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권태정과 눈을 맞추며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내가 혼자 이해해 보려고 했거든. 왜 그 무거운 게 사라졌는데 네가 하나도 안 좋아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혼자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모르겠어.”
“…….”
“뭐 생색내려고 한 일도 아니고, 네가 더 이상 빚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됐다는 거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계속 죄송하단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좀 그래.”
“…….”
“섭섭해.”
덤덤한 말, 표정과는 달리 갈무리되지 못한 위협적인 페로몬이 이겸에게 닿아 왔다. 꼭 마른 장미에 돋친 가시가 온몸을 할퀴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향이었다.
이겸은 그 강한 페로몬에 몸을 떨며 이불자락을 꼭 쥐었다. 권태정의 감정이 얼마나 상했는지, 제가 그를 얼마나 속상하게 했는지가 온몸으로 닿을 때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겸아. 왜 그래?”
“…하아…. 페로몬이….”
이겸이 다시 숨 쉬기가 버거워 헐떡이는 것을 본 뒤에야 권태정은 지금 제가 페로몬 조절을 전혀 못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 몸이 다 홧홧할 정도로 페로몬이 터져 나오고 있으니 이겸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갈무리를 하려고 해도 감정이 뒤섞여 그런지 쉽게 페로몬이 가라앉지 않았다.
권태정은 안 되겠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가 이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달래 주고 싶지만, 지금은 제가 이겸과 가까이 있는 게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미안해. 놀랐지. 이런 적이 없는데.”
“…….”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진정 좀 하고 올게.”
이겸은 창백해진 채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도 권태정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왜 제가 죄송하다는 말을 했는지 제대로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도 못했고, 또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권태정과 떨어지는 것은 싫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2층에 있다가 괜찮아지면 내려올게. 이런 페로몬에 노출돼서 좋을 거 없으니까 내가 내려오기 전까진 올라오지 마.”
“실장님….”
“하….”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위협적인 페로몬 사이로 권태정의 한숨이 뒤섞였다. 한숨 소리에 놀란 이겸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또 지친 것 같기도 한 권태정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
곧 권태정은 그대로 뒤돌아 이겸에게서 멀어졌다.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혼자 남게 된 이겸은 내내 그 닫힌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귓가에는 권태정의 낮고, 지친 것 같은 한숨 소리가 달라붙은 채 내내 이겸을 괴롭혔다.
‘전혀 좋지 않단 거네, 그럼.’
그리고 권태정이 보인 상처가 이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해 준 권태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는커녕 좋은 내색도 하지 못한 제가 너무 싫었다.
‘계속 죄송하단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좀 그래.’
어떡해….
‘섭섭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는 말이라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아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바보처럼 굴어서….
“…….”
나한테 질렸을 거야…. 주제도 모르는데 고마움까지 몰라서…. 어떡하지. 이제 더는 안 좋아해 주시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만 했다. 이겸은 침대에서 벗어나 방을 나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이런 페로몬에 노출돼서 좋을 거 없으니까 내가 내려오기 전까진 올라오지 마.’
두어 계단을 급히 오르는데 권태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올라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어기고 올라가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겸은 멀거니 계단 위를 바라보다가 더는 오르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 난간으로 몸과 머리를 기대었다.
‘섭섭해.’
그 엄청난 일을 해결해 주고도 섭섭함을 느껴야 했을 권태정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제가 미안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권태정에 한해서는 유독 더 연약한 이겸의 마음은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감정이 변하고는 했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더 그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