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10화 (110/174)

#110

“졸리면 더 자. 자고 싶은 만큼 자도 돼.”

“요즘…. 정말 잠이 많아진 것 같아요. 카페 일하다가도 자꾸 졸리고….”

“어려지는 거 확실하네. 내가 다시 키워야겠다.”

아침이라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웃은 권태정이 어느새 눈을 떠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라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이겸이 작게 입을 벌렸다.

“…실장님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내 목소리 좋아?”

“…네….”

“꼴려?”

차마 대답 못 한 이겸이 다시 권태정의 품으로 얼굴을 묻으며 숨었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감각이 온몸을 감싸며 흘러내렸다. 권태정은 다시 이겸의 뺨과 귓가, 머리칼에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꼴린다고 대답은 못 하지만, 또 아니라고 부정도 안 하는 게 예뻐 죽을 것 같았다.

“얼굴 보여 줘. 자느라 오래 못 봤잖아.”

다른 사람이 들으면 너무 간지러워 기겁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권태정이 그 말에 또 고개를 드는 이겸을 보며 웃었다. 역시 이겸과 저는 너무 잘 맞았다.

제가 사랑을 콸콸 부으면 이겸은 그걸 조금도 흘리지 않고 전부 마셔 몸속을 가득 채웠다. 제가 쏟는 모든 간지러운 표현들을 좋아하는 이겸이 너무나 좋았다.

“뽀뽀.”

입술을 내밀면 저를 따라 똑같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드는 모습도, 쪽, 쪽 소리가 나게 두 번, 다섯 번, 열 번 뽀뽀를 하다가 그게 모자라 자연스럽게 입술을 마주 무는 것도 권태정의 모든 마음을 가득 채웠다.

“으음….”

이겸의 몸을 안고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마주 문 채 키스하던 권태정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보송한 등과 허리를 만져 주다가 꽉 끌어안았다.

“아, 맞아. 할 말 있어, 이겸아.”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권태정이 전화를 받으러 가기 전에도 저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분명히 그걸 들으려고 기다렸던 것 같은데 그다음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걸 못 기다리고 제가 잠든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어제 기다리다가 잠들었나 봐요.”

“아니야. 지금 들으면 되지. 음, 나가자. 나가서 아침 먹으면서 얘기해. 밝은 데에서 얼굴 보고 말하고 싶어. 보여 줄 것도 있고.”

“저도 드릴 말씀 있어요. 별건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리는 게 좋겠다는 말과 함께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새로 생긴 편집샵에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단 말을 권태정에게 할 생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는 걸 반기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빚을 갚기 위해, 권태정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픈 제 마음을 잘 말하면 허락해 줄 것이었다. 권태정은 이해심이 많고, 마음이 넓으니까.

“그래? 뭐지. 궁금하네. 얼른 나가자. 빨리 듣고 싶어.”

씩 웃은 권태정이 몸을 일으키는 이겸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나올 때 대충 들고나온 티셔츠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위에 입은 권태정이 익숙하게 원두를 넣고 커피를 내렸다. 곧 부엌으로 향긋한 커피 향이 퍼졌다.

“시리얼 먹을 거야?”

“네, 이거 너무 맛있어요. 먹다 보면 우유도 초코 우유 되는데 그것도 맛있고, 마시멜로도 들었어요.”

파란 시리얼 박스를 들고 겉에 그려진 걸 가리키며 설명하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요즘 이겸은 아침에 시리얼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도넛 모양처럼 생긴 초콜릿 맛 시리얼인데 이겸의 설명처럼 안에 마시멜로가 들어 있어 무척 달고, 또 단 것이 매력적인 시리얼이었다.

“실장님도 드릴까요?”

“아냐. 난 커피면 충분해.”

“맛있는데….”

“그럼 너 먹을 때 먹여 줘. 궁금하네, 맛있다니까.”

먹어 보겠다는 게 뭐 그리 좋은지 활짝 웃는 이겸을 본 권태정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식탁에 놓으며 다시 방으로 가 차용증이 담긴 봉투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이 안에 든 걸 본 다음에도 조금 전처럼 환하게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실장님, 드셔 보세요.”

시리얼 볼을 소중하다는 듯 들고 와서 우유를 적당히 부은 이겸이 잘 섞어 한 스푼을 떠 권태정에게 내밀었다. 보기만 해도 달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겸이 주는 거니 기꺼운 마음으로 입을 벌린 권태정이 달게 느껴지는 시리얼과 마시멜로를 우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음, 괜찮다. 생각보다 맛있네.”

좋게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웃은 이겸이 벌써 초콜릿색으로 변하고 있는 우유와 함께 시리얼을 떠 입에 넣었다.

“할 말 먼저 할래?”

“실장님부터 하세요. 어제부터 기다리셨잖아요.”

“음, 그럴까? 자, 이거. 선물.”

권태정은 이겸에게 차용증이 든 봉투를 슥 앞으로 밀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던 이겸이 봉투를 눈으로 보다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봐도 돼. 네 거니까.”

그제야 이겸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들고 안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얇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얼굴로 종이를 꺼낸 이겸의 눈이 맨 위에 적힌 차용증이라는 세 글자에 놀라 커졌다.

“…어….”

채권자 구대범. 채무자 연규학. 할아버지의 이름을 본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금 일억 오천만 원이라는 숫자 아래에는 언제 돈을 빌렸는지 또 이자는 몇 퍼센트인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원금을 언제까지 갚겠다는 말과 기한을 어길 경우, 또는 채무자가 빚을 변제하지 못할 경우 손자 연이겸이 그 빚을 대신 변제한다는 말까지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의 필체였다.

“…이게… 어떻게….”

“이제 빚 걱정 안 해도 돼. 어제 내가 구대범 만나서 다 끝냈어.”

가만히 권태정의 말을 듣던 이겸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이해 못할 말이 섞인 것도 아닌데 쉽게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놀란 이겸을 보고 미소 지은 권태정이 다시 한번 천천히 이겸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겸이 완벽히 알아들어 기뻐할 수 있도록.

“이제 빚 같은 거 없어, 이겸아. 그거 때문에 고생 안 해도 돼.”

“…아….”

이제야 권태정의 말을 이해한 이겸의 눈동자가 이제는 크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지금 권태정이 구대범에게 남은 저의 빚을 모두 갚았다는 것이었다. 3억이나 되는 그 큰 빚을.

“놀랐구나.”

“…어제 언제… 언제 만나신 거예요?”

“너 일할 때. 그때 구대범 조진 뒤로 걔한테 사람 붙여 놨었거든. 나한테 깨지고, 너한테 화풀이할까 봐 걱정돼서.”

“…….”

“조용한가 싶더니 며칠 전에 다람동에 갔었나 봐. 그걸 듣는데 이제 진짜 끝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바로 만나서 깨끗하게 해결했어.”

이겸의 머릿속으로 어제 하루 종일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보던 시간과 저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를 가진 권태정의 누나와 형의 얼굴이 스쳤다.

권태정에게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게 갑자기 달라져 버렸다.

“…….”

더는, 정말 더는 권태정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저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야 너무나 고맙고 좋지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빚만큼은, 정말 제 앞으로 된 빚만큼은 제가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노력이 닿아야 할 게 사라졌다고 권태정이 저에게 말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

“…….”

“이제 좀 마음이 놓여? 후련해?”

그리고 권태정이 말하고 있는 감정은 지금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저를 내내 짓누르던 3억이나 되는 빚이 사라졌으니 후련하고, 마음이 놓여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권태정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생각만 머릿속과 마음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이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지금 권태정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겸아.”

다물린 입술을 다시 벌리는 순간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에 놀란 권태정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겸의 옆자리로 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많이 놀랐어?”

“…어떤…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빚이 모두 해결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이겸이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권태정이 상상한 눈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기쁨을 수반한 눈물이지 이렇게 슬픔에 가까운 눈물을 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마음이 복잡해졌다.

“죄송할 거 없는데, 정말. 아, 맞다. 아까 이겸이도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지? 뭔지 말해 줘. 궁금해.”

권태정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이겸의 촉촉한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르바이트 하나 더 늘리고 싶어서 어제 알아봤어요. 카페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새로 생긴… 편집샵인데 열 시부터 네 시까지만 하면 된다고 해서…. 내일 면접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아르바이트 하나 더 하려고? 이제 안 그래도 돼. 힘든 일 이제 할 필요 없어.”

큰 빚도 사라지고, 더는 힘든 일을 할 필요도 없다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좋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꼭 권태정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길을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더 열심히 일해서… 빚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갚고 싶었어요….”

“그래도 면접 가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다. 내일 못 간다고 하자. 미안하다고 하면 이해할 거야. 더 빨리 해결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이겸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권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될 만큼 큰돈을 써서 빚을 변제해 준 권태정이 더 빨리 해결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다가 쿵 떨어졌다. 왜, 권태정은 왜 저에게 사과를 하는 걸까.

“사실 전부터 해결하고 싶었는데 네가 부담스러울까 봐 좀 걱정이 되더라고.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얼마 전까진.”

“…….”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래도 되는 거잖아. 이겸이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이게 됐으니까.”

권태정은 제가 말을 하면 할수록 눈물만 더 뚝뚝 흘리는 이겸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보면 볼수록 좋아서 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런 확신이 짙게 들수록 마음이 묘하게 일렁였다.

“이겸아. 왜 이렇게 울어.”

“…죄송해요….”

눈물을 문질러 닦은 이겸이 겨우 고개를 들어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생각과는 달리 계속 폐만 끼치고, 또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해 눈을 맞추는 것조차 염치가 없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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