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05화 (105/174)

#105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겸을 소파에 앉힌 권태정은 소화제와 따뜻한 물을 이겸에게 먹였다. 두 손으로 컵을 잡고 따뜻한 물을 조금씩 넘기는 것만 봐도 애처로워 마음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계속 아프면 참지 말고 꼭 말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미안해. 내가 더 챙겼어야 하는데.”

권태정의 사과에 아니라고 말을 하려던 이겸이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제가 앉은 소파 아래 다리를 구부려 앉아 바라보는 권태정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

가만히 두 팔을 벌려 권태정의 목을 끌어안은 이겸이 곧 제 등으로 감겨 오는 따뜻함을 느끼며 어깨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권태정이 저에게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방으로 갈까? 좀 누워 있을래? 아니, 누우면 안 되나. 기대고 있더라도 침대가 더 편하지 않겠어?”

어깨에 얼굴을 댄 채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몸이 들리는 느낌이 났다. 바닥에서 이겸을 안은 채 한 번에 일어난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을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저 일단 씻고 올게요.”

“괜찮겠어? 씻겨 줄까?”

“…호, 혼자… 할게요….”

체기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몸을 혼자 씻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침대에 앉아 권태정을 올려다본 이겸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잘 때 입는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먼저 꺼내고 속옷은 몰래 꺼내 그 사이에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나도 이겸이 너 씻을 때 빨리 씻고 와야겠다. 그래야 오래 안 떨어져 있지.”

싱긋 웃은 권태정이 욕실로 들어가는 이겸을 본 뒤에야 목을 조이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겸이 씻을 때 저도 빨리 같이 씻어야 떨어져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에도 이겸과 같이 있는 게 좋아서 헤어지기 전에 아쉬운 생각이야 당연히 들었지만, 떨어진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적은 없었는데 요즘은 정말 그 정도가 좀 심했다.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 안에서 떨어져 있는 것조차 참지 못하겠다는 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닌가. 권태정은 제가 심각하다 생각하면서도 침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

이겸이 없는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제 누나와 형을 만날 때 긴장해 있던 이겸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의자에 등을 조금도 기대지 못한 채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것도, 또 뭔가 질문을 하면 집중하려 눈을 동그랗게 뜨던 것도, 대답한 뒤에는 혹시 뭔가 실수한 게 있나 무서워 저를 바라보던 얼굴도 다시 떠올리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 그날 그 백화점에 가지 말걸 그랬나. 아니면 누나랑 간단히 티타임 정도 가지는 게 좋았으려나…. 여러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때쯤 침실 안쪽 욕실로 가는 복도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곧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겸을 보며 웃음 지었다.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방을 못 나가겠어서.”

“…….”

“어떡해, 이겸아. 나 너랑 못 떨어지겠어. 이리 와. 안아 줘.”

두 팔을 벌리는 권태정에게 다가온 이겸이 폭 안겨들었다. 막 씻어 따뜻하고 촉촉한 이겸을 절대 놓아 주지 않을 것처럼 품에 가둔 권태정이 제 한쪽 허벅지 위에 앉힌 채 목덜미와 뺨, 턱, 귓가 여기저기에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속은 좀 어때. 많이 아프진 않아?”

“네,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자고 일어나면 다 나을 거예요.”

“얼른 자자, 그럼. 빨리 씻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재워 줄게.”

“네…. 여기 있을게요.”

“응, 멀리 가지 마.”

권태정의 말에 미소 지은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요즘 권태정과 물리적으로 거리감이 생기면 생길수록 불안하고, 애가 타는 느낌이 너무 커서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권태정도 저와 똑같다는 것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안도가 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씻기 전 마지막으로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고 일어난 권태정이 진동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웃으며 이겸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이거 보고 있어.”

욕실로 가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겸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으로 내려가 닿았다.

[누나 : 오늘 너무 즐거웠어. 이겸 씨한테도 나와 줘서 너무 고맙다고 다시 꼭 전해 줘]

[누나 : 너무 순하고 예쁘더라. 간만에 진짜 좋았어. 기정이도 오늘 재밌었대]

[누나 : 우리도 떨렸는데 이겸 씨는 더 그랬을 거야. 잘 챙겨 주고, 아직 많이 어리니까 더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누나 : 우리 막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누나 : 너도 고생했어 푹 쉬어]

다정한 말들이 가득한 메시지를 하나하나 눈에 꼭꼭 담은 이겸이 작게 미소 지었다. 권태정을 닮아 참 좋은 분들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좋게 봐 주고, 뒤에서도 일관되게 다정히 대하는 사람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마음이 울렁였다.

제가 권태정의 가족들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저도 권태정의 가족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말 너무나… 좋은 사람이.

이겸은 권유정이 권태정에게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안도가 되어서 권태정이 다 씻고 나와 옆에 앉을 때까지도 다정한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아직도 보는 거야?”

“…정말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저 불편할까 봐 아까도 계속 신경 써 주셨는데 또 이렇게 따뜻하게 말씀도 해 주시고….”

“우리 누나가 원래 좀 천사야. 그런데 일할 땐 진짜 무서워. 아빠도 누나 못 이겨. 누나가 일 제일 잘해.”

씩 웃은 권태정이 다시 메시지를 꼼꼼히 읽는 이겸을 보며 웃음 지었다.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잘 못한 것 같아 상심한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며 보여 준 건데 효과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그만 보고 나 봐 줘. 이겸아.”

귓가에 닿아 스며드는 목소리에 움찔한 이겸이 휴대폰을 권태정에게 주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권태정이 그런 이겸을 안아 들어 침대 위로 눕혔다.

“회사 다닐 땐 이 시간에 자려고 누워 본 적이 없는데 뭔가 새롭네. 좋기도 하고.”

“많이 바쁘셨어요?”

“응, 꽤 바빴지. 나도 누나랑 형처럼 그냥 지시만 내리고 알아서 하겠지 놔두는 타입이 아니라 직접 보고,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뭐…. 사서 고생하는 타입?”

권태정이 조금만 움직여도 조금 전 제가 씻을 때 쓴 바디워시 향이 났다. 거기에 밤이라 살짝 느슨하게 풀어진 페로몬 향까지 뒤섞여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이겸은 살짝 몸을 기울여 권태정의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철거하고 나면…. 바로 다시 회사로 가시는 거예요?”

“음, 아마도. 아, 그러고 보니 정말 철거 얼마 안 남았네.”

달착지근한 감정에 절여진 채 이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가 이렇게 짧나 싶을 만큼 빠르게 흘렀다. 권태정은 어느덧 열흘 앞으로 다가온 철거를 떠올렸다.

“다음 주쯤 집에 들르자. 정리할 거 해야지.”

“…네. 저 실장님.”

“응.”

“그 집에서 할아버지 유품이랑 사진 같은 거… 여기로 가지고 와도 될까요?”

“그럼. 당연히 되지. 너한테 필요하고 소중한 건 다 가지고 와도 돼. 그게 뭐든. 그 집 통째로 옮겨서 다른 데에 박제해 달라고 해도 할 거야.”

극단적이지만, 분명한 애정 표현에 웃은 이겸이 살짝 몸을 떼고 다시 눈을 맞췄다. 권태정과 함께 있을 때면 아직도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먼저 다가가 권태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이겸이 가만히 바라보는 입술 위로 다시 한번 입술을 꾹 눌렀다. 그 닿음에 완전히 허물어진 숨을 내뱉은 권태정이 부드럽게 이겸의 입술을 머금었다. 저를 향해 열린 안으로 혀를 넣어 헤집자 금세 앓는 소리가 울렸다.

잔뜩 헤집다가 부드럽게 혀를 빨아들이자 이겸이 품으로 더 안겨들었다.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매만지니 금세 미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이겸의 혀끝을 살살 문질러 주며 느릿하게 손을 옮겨 몸 여기저기를 기분 좋게 만져 주었다.

“하…. 너무 좋다. 출근이고 뭐고 그냥 회사 관둘까.”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안겨 있던 이겸이 손을 들어 권태정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도 좋아요.”

“…….”

“…실장님이… 너무 좋아요….”

품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크게 부풀었다. 권태정은 벅차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웃음 지었다. 이걸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혼자만 마음에 담은 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권태정은 고개를 기울여 이겸의 입술에 제 귀를 가져다 대었다.

“더, 더 말해 줘.”

두근두근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이겸은 권태정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두 손까지 모아 귀 옆을 감쌌다. 소리가 조금도 새지 않고 권태정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권태정만 제 고백을 들을 수 있도록.

“…좋아해요, 실장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득 고인 감정을 담아 소리 내고 나면 오히려 더 마음이 가득 차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이겸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추며 웃음 지었다.

“…….”

“…….”

권태정이 좋았다. 그게 전부였다. 어떤 감정이 몰아쳐도 권태정이 좋다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도 좋아. 이겸이 네가 좋아서 미쳐 버리겠어. 나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심각한 권태정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쥔 이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얕은 숨과 함께 웃은 권태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겸을 가득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이 무너져 이겸의 작은 몸을 완전히 품에 가뒀다. 이겸의 두 팔까지 제 몸에 감기는 느낌이 나자 더없이 마음이 충만해졌다.

서로의 벅찬 감정이 뒤섞이는 곳엔 그 어떤 말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가장 끌어안고 싶은 것을 끌어안으며 끝없이 전해지는 감정을 느낄 뿐이었다.

체온과 손길, 따뜻한 숨과 마주 닿은 심장의 두근거림 같은 것으로 전해지는 끝없는 감정, 사랑을.

* * *

새벽에 문득 눈을 뜬 이겸은 곤히 잠든 권태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즘도 권태정은 자기 전에 늘 팔베개를 해 주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고 그 품에 안겨 밤새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를 깨지 않게 조심조심 넘겨 준 이겸이 잠든 모습도 잘생긴 권태정의 얼굴을 멍하니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종종 지금처럼 멀거니 얼굴만 한참을 보게 될 때가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를 좋아할 수가 있을까. 생각은 늘 거기까지 향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이상 비교해서 좋을 것은 없지만, 저는 비교를 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만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권태정에게 늘 고마웠다. 가진 것이 없는 저를 사랑으로 채워 주는 것도, 또 보잘것없는 제가 유일하게 줄 수 있는 마음을 온전히 받아 주는 것도 너무나 고마워 늘 마음이 꽉 조였다.

‘이겸이 네가 좋아서 미쳐 버리겠어.’

저를 좋아하는 권태정에게 조금이라도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장 많은 것을 바꾸고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려면 일단 제 앞에 있는 빚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구대범 같은 사람과 더는 엮이지 않도록 더 노력해서 빚부터 갚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철거가 되면 권태정도 다시 회사에 나가 일을 하게 될 테니 저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권태정과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하다 보면 조금씩이라도 빚은 줄어들 테고 한참 뒤에라도 그걸 다 갚게 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었다. 물론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꼭 노력하고 싶었다. 꼭.

이겸은 자면서도 제 몸을 놓아주지 않는 권태정을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원래 안겨 있던 자리로 더 가까이 다가가 기대자 조금 뒤척인 권태정이 이겸의 몸을 다시 더 깊게 끌어안았다.

“어디 불편해?”

잠이 묻어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이겸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얼른 권태정을 다시 재우기라도 하듯 등을 토닥였다.

“…….”

다시 귓가에 닿는 고른 권태정의 숨소리에 웃은 이겸이 몸에서 힘을 빼며 눈을 감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을 만큼 다정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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