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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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권유정이 말한 와인을 준비해 온 직원이 이겸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이겸은 권유정과 권기정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계속 눈으로 따라가며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이스 와인이라 쓰지 않고 달콤해서 잘 마실 수 있을 거예요. 혹시 단거 좋아해요?”
“네…. 단거 좋아해요.”
“태정이는 단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저랑 기정이는 단거 좋아하거든요. 그럼 디저트도 좋아해요? 케이크나 초콜릿이나 그런 거.”
“네, 전부 좋아해요.”
“너무 잘됐다. 제가 자주 가는 초콜릿 가게가 있는데 태정이 집으로 보내 줄게요. 먹어 봐요.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한두 개씩 먹으면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런 맛이에요.”
이겸은 권태정이 사 준 초콜릿을 떠올렸다. 권태정 없이 혼자 다람동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초콜릿을 먹으면서 아주 많이 울었던 기억도 머릿속을 흔들었다.
“그거 내가 이겸이 사 줬어. 단거 진짜 좋아하거든.”
“아, 그래? 먹어 봤구나. 그거 진짜 맛있죠. 내가 그런 곳 많이 알거든요. 앞으로 내 거 살 때 이겸 씨 것도 같이 사야겠다. 사서 태정이한테 주거나 집으로 보낼게요.”
눈이 접히며 싱그럽게 웃는 얼굴 안에 권태정의 얼굴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긴장이 되는 와중에도 권유정이 너무나 좋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겸은 건배를 하자며 잔을 드는 권유정과 권기정을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잔을 마주했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룸 안으로 울렸다.
“어때요?”
“…너무 맛있어요. 달달해서 술 같지가 않아요.”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저에게 닿는 따뜻한 시선들에 웃은 이겸이 빈 접시를 치우고, 새로 놓이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스테이크라 이번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겠지만, 조금 전에 먹은 성게알의 식감이 자꾸만 떠올라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이겸 씨 다른 술은 마셔 본 적 있어요?”
“맥주랑… 소주 조금이요.”
“사실 그게 제일 좋아요. 전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도 가끔 맥주 생각날 때가 있더라구요.”
권유정의 물음에 대답한 이겸은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다음 말을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시무룩해진 이겸이 고개를 숙이자 그걸 눈치챈 권태정이 다시 몸을 기울여 이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둘이 있고 싶다. 그치.”
귓가에 닿는 간지러운 목소리에 바라보자 권태정이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허벅지 위에서 단단히 얽히는 손가락의 느낌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긴장과는 다른 느낌의 두근거림이었다.
“이따 집에 가기 전에 드라이브 할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권태정은 의자 뒤에 조금도 등을 기대지 못한 채 빳빳하게 허리와 등을 세우고 앉은 이겸을 보며 잔뜩 긴장한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누나도 마레 복숭아 무스 좋아하지?”
“어, 마레 디저트 너무 좋지. 어제 엄마가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사 갔었어.”
“이겸이도 그거 좋아하거든.”
“이겸 씨도 그거 좋아하는구나. 너무 맛있지 않아요? 입에 넣으면 전 진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던데.”
자연스럽게 대화거리를 만들어 준 권태정이 이겸을 바라보았다. 그에 이겸은 얼마 전에 먹은 복숭아 무스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너무 맛있어서 매일매일 먹어도 안 질릴 것 같을 정도였어요. 그때 옆에 같이 나온 아이스크림…? 같은 것도 너무 맛있었어요.”
“아, 복숭아 셔벗! 그것도 진짜 너무 맛있죠. 가끔 그게 생각나서 간다니까요. 솔직히 앞에 코스는 안 먹고, 디저트만 두세 번 먹으면 좋겠어요.”
“…복숭아 좋아하세요?”
처음으로 이겸이 먼저 한 질문에 눈까지 접어 가며 웃은 권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과일 중에서 복숭아를 제일 좋아해요. 이겸 씨는요? 무슨 과일 좋아해요?”
“저도 복숭아 좋아해요. 또…. 딸기도 좋고, 음…. 청포도도 좋아해요.”
형편이 좋지 않아 많이 먹어 본 적은 없지만, 일할 때 사장님이 한 조각씩 주는 케이크 위에 얹힌 복숭아나 딸기를 먹을 때면 참 맛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파는 청포도 주스나 에이드를 마실 때면 청포도도 맛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많이 먹어 보지 않고 좋아한다고 해도 되나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한 것 같아 그래도 내내 불안했던 마음 안으로 숨이 통했다.
“새콤달콤한 거 좋아하는구나. 저도 그래요. 이겸 씨랑 저랑 비슷한 게 많네요? 같이 디저트 투어도 하고, 봄에는 같이 딸기 뷔페도 가고 그러면 되겠다.”
“누나 나는?”
“태정이 너는 디저트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냐, 나 요즘 단거 잘 먹어. 입맛이 바뀌었어.”
“그래? 그러기도 하나?”
“응, 그게 되더라고.”
싱긋 웃은 권태정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어 이겸의 허벅지를 살짝 쥐었다. 그에 놀란 이겸이 다리를 확 오므렸다.
“내가 복숭아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제 페로몬 향 이야기를 한다는 걸 눈치챈 이겸이 입술 안쪽을 꾹꾹 깨물었다. 저만 그 의미를 알아들어 조금 부끄러웠다. 제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댄 권태정이 늘 몸에서도 복숭아 맛이 난다고 말하던 게 떠올라 곤란하기도 했다.
“그럼 태정이 너도 같이 가자. 기정이야 뭐 당연히 갈 거고. 디저트 킬러잖아.”
“난 디저트 없으면 회사 일도 안 돼, 요즘.”
권기정의 말에 웃음소리가 여기저기로 울렸다. 고개까지 저으며 진지하게 말하는 권기정을 보며 가만히 웃은 이겸이 권태정이 제 앞으로 내미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스테이크 이걸로 먹어.”
접시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린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권태정은 잘 썰린 스테이크 접시를 이겸의 앞에 놓인 접시와 바꾸었다.
권태정의 배려에 눈을 맞추고 웃은 이겸이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 조각을 하나 입에 넣었다. 울렁이는 속 때문에 뭔가를 더 먹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저 때문에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진다면 정말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아 계속 음식을 입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것. 그게 지금 제가 겨우 조금 어우러진 다정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니까. 그조차 못해 모두의 자연스러운 시간을 뚝뚝 끊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다. 좋게 보이지 못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여기서 더 그 이유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겸은 여전히 빳빳하게 등과 허리를 세워 앉은 채 떨리는 마음과 울렁이는 속을 감추며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권태정을 위해. 이유는 여전히 그것 하나였다.
긴 식사 끝에 디저트까지 먹은 이겸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야 레스토랑을 나섰다. 이겸은 주차장에서 저에게 다가와 웃는 권유정과 권기정을 바라보았다.
“오늘 나와 줘서 정말 너무 고마워요.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 오늘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잘해 주셔서…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는 우리 좀 더 편하게 만나요. 디저트 투어도 꼭 가고. 그리고 태정이랑 정말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 등을 다정히 토닥이는 권유정에게 꾸벅 인사한 이겸이 권기정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곧 두 사람이 탄 차가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그제야 완벽하게 긴장이 풀린 이겸이 입 안에 고인 숨을 내쉬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 어디라도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리도 이제 집에 가자. 아,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네. 오늘 힘들었지.”
“아니에요. 두 분 다 정말 좋으신 분들 같아요. 너무 잘해 주셔서 힘든 거 없었어요….”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못됐다고 했잖아. 그리고 누가 이겸이 널 안 좋아하겠어.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오늘 진짜 너무 잘했어. 고마워.”
이겸의 어깨를 팔로 감싼 채 당겨 뺨에 쪽,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권태정이 차로 가 조수석으로 이겸을 태우고, 운전석에 올랐다.
이겸은 조수석에 타자마자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흐무러지며 시트로 몸을 기대었다. 내내 꼿꼿하게 힘을 주며 세우고 있던 허리와 등이 조금 아팠다.
“드라이브하자. 어디 가서 따뜻한 거 한 잔 마실까?”
운전석에 타 안전벨트를 당긴 권태정이 조수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시선을 떼어 안전벨트 버클 쪽으로 내리던 권태정이 조금 전 제가 본 이겸의 울적해 보이는 얼굴에 놀라 얼른 시선을 다시 들었다.
“이겸아. 왜 그래?”
“…죄송해요, 실장님.”
이겸의 사과에 놀란 권태정이 안전벨트 버클을 채우지 않은 채 다시 놓아 버리고 이겸에게로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왜, 뭐가 죄송해. 그럴 일이 없는데.”
“오늘 더 잘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물어보시는 것 외엔 말도 먼저 잘 안 하고…. 저 때문에 실장님도 창피하셨을 것 같아요.”
“이겸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얼마나 잘했는데. 그런 생각하지 마. 응?”
조수석으로 손을 뻗은 권태정이 허벅지 위에 놓인 이겸의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게 느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제 누나와 형이 좋은 사람들이어도 이겸에게는 어렵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걸 알기에 권태정은 오늘 이겸이 그 시간을 잘 보내 주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다.
게다가 긴장한 것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웃기도 하면서 존재 자체로 누나와 형을 다 녹여 놨으면서 왜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귀여우면서도 애처로웠다.
“아무리 내가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오늘 불편했을 거 알아. 왜 안 그러겠어. 그냥 모르는 사람 만나는 자리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처음 만나는 자린데.”
“…….”
“오늘 정말 잘했어. 네가 우리 누나, 형이랑 얘기하고 웃는 거 보면서 얼마나 고맙고 좋았는데. 사과하지 마, 응? 죄송하긴 왜 뭐가 죄송해. 너무 잘하기만 했는데.”
조수석 쪽으로 거의 완전히 커다란 몸을 기울인 권태정이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눈을 감은 이겸이 가볍게 맞물렸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다음에 또 뵙게 되면 그땐 더 잘할게요.”
긴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아 안쓰러웠다. 더 잘하겠다는 이겸에게 안 그래도 된다고 말을 하는 것보단 일단 다독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날 땐 훨씬 더 편하게 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한 번 본 사람들이니까.”
다독이며 어깨와 팔을 쓸어 주던 권태정의 시선이 이겸의 하얀, 아니 그걸 넘어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이겸의 이마를 짚은 권태정이 약간 오른 열과 손에 닿는 축축함에 놀라 이겸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식은땀이 나. 어디 아파?”
“조금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아요. 괜찮아질 거예요.”
“아니, 손도 평소보다 좀 차가운 것 같고…. 체한 거 아냐?”
이 정도로 긴장을 했는데 먹는 것 또한 편했을 리가 없었다. 권태정은 이겸의 이마와 손을 몇 번이나 번갈아 만지다가 얼른 다시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드라이브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집에 가자. 아니다, 병원 갈까? 현준이한테 전화해야겠다.”
휴대폰을 찾는 권태정의 팔을 잡은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체기가 약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긴장해서 그런 거라 집에 가서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정말 괜찮아요, 실장님…. 집에 가고 싶어요.”
“알았어. 집에 얼른 가자. 아마 집에도 약 있긴 할 거야. 가는 중에 힘들면 말하고, 알았지?”
“…네.”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다시 힘이 빠지는 몸을 등받이로 기대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내내 걱정이 되어 저를 보는 시선, 또 핸들을 잡은 유려한 손가락에 눈을 맞추었다. 권태정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내내 각인이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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