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103화 (103/174)

#103

단정하면서도 차려 입은 티가 나게 옷을 골라 입힌 권태정은 거울 속으로 보이는 부잣집 막내아들 같은 이겸을 보고 웃음 지었다.

누나와 형을 만나는 자리라 최대한 예뻐 보이면 좋을 것 같아 직접 이것저것 대 보며 고른 보람이 있었다. 뭘 입어도 예쁘고, 심지어 안 입는 것도 예쁘지만, 그래도 오늘은 유난히 더 신경이 쓰였다.

“아, 예쁘다. 옷 불편하거나 그러진 않아?”

“네, 괜찮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게 처음이라 당연히 가족에게 그 사람을 소개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부터 은근히 긴장감이 손끝에서 맴도는 게 느껴졌다. 권태정은 괜히 저릿한 손끝을 꾹 누른 채 심호흡했다.

“왜 이렇게 떨리지. 이런 거 하나도 안 떨릴 줄 알았는데.”

“전 어제보다는 오늘이 좀 덜 떨리는 것 같아요. 어제 자기 전엔 진짜 너무 많이 떨려서 잠이 잘 안 왔거든요.”

“그래? 우리 자기는 실전에 강한 타입인가 보네. 아니, 나도 한 실전하는데 이상하네. 가족한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보이는 게 이렇게 떨리는 일이었구나. 안 해 봐서 몰랐지.”

“그렇다고 하나도 안 떨리는 건 아니에요. 떨리기는 떨려요….”

멋있게 차려입고 긴장되는 듯 심호흡하는 권태정을 보던 이겸이 가만히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실장님이 그러시면 저도 더 떨려요….”

“그럼 안 되지. 나 이제 안 떨어.”

단호히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이겸의 보들보들한 뺨을 살살 문질렀다. 오늘은 특별히 억제제를 한 알 더 먹어서 우성알파인 저에게도 이겸의 달착지근한 복숭아 향이 나지 않았다. 제 누나와 형도 우성알파라 페로몬이 나서 좋을 게 없기에 취한 조치였다.

“있는 그대로만 하면 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 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에게 가볍게 입 맞춘 권태정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더라도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쯤 나가면 되겠다. 가자.”

“네.”

권태정과 드레스 룸을 나선 이겸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려니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말 잘하고 싶었다. 권태정이 곤란하지 않도록, 또 부끄럽지 않도록. 저를 늘 생각해 주고 위해 주는 권태정을 위해서 노력하고 싶었다.

“…….”

잘할 수 있어…. 잘할 수 있어. 속으로 계속 되뇐 이겸이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권태정을 올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 * *

약속 시간보다 이십 분 먼저 도착한 권태정은 이겸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어제보다 덜 떨린다고 말하더니 오는 동안 다시 엄청 긴장했는지 제 팔에 꼭 붙어 따라 걷는 이겸이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십 분 동안 차에서 여기저기 좀 만지다 가고 싶었지만, 특별한 날인만큼 서른둘답게 참기로 했다. 예쁘게 입힌 옷이 흐트러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변함없이 저희 스테이 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과 부사장님께서는 먼저 도착하셔서 룸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네? 벌써 다 오셨어요?”

“네. 십 분 전쯤 도착하셨습니다.”

누나와 형이 저희보다 더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못 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권태정이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누나나 형 둘 중 한 사람도 아니고, 둘 모두의 스케줄이 비는 날로 정하느라 보름 뒤에 겨우 날을 잡았는데 그동안 두 사람도 애가 상당히 탄 모양이었다. 약속 시간 삼십 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잠깐만요.”

룸 앞에서 문을 열려는 직원을 저지한 권태정이 이겸을 향해 돌아서서 살짝 몸을 숙여 눈을 맞췄다. 그리고 부드럽게 어깨를 쥐었다가 팔을 주무르듯 만지며 내렸다.

“이겸아.”

“…네.”

“옆에 나 있는 거 잊지 마. 어떤 경우에도 네 옆에 나 있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알았지?”

“네…. 걱정 안 해요. 실장님 계시니까.”

“응. 맞아. 나 있으니까.”

나긋하게 웃은 권태정이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문이 열렸다. 권태정은 이겸의 손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 형.”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권유정과 권기정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권태정은 이겸을 데리고 그 앞으로 가 섰다.

“우리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둘이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긴장돼서 회사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기정이 사무실에 갔더니 기정이도 나랑 똑같은 얼굴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막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거야. 그래서 그냥 같이 빨리 왔어.”

긴장된다는 듯 심장 위를 두 손으로 꾹 누른 권유정이 권태정의 옆에 선 이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선 권기정의 팔을 잡아 옆으로 데려왔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나랑 요즘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 연이겸 씨.”

권태정의 소개에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이겸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연이겸이라고 합니다.”

“이겸 씨. 우린 저번에 백화점에서 한 번 만났죠? 다시 소개할게요. 전 태정이 누나 권유정이에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이겸의 두 손을 반갑다는 듯 꼭 쥐고 인사한 권유정이 권기정을 바라보았다. 그에 싱긋 웃은 권기정이 이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태정이 형이고, 둘째 권기정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 안녕하세요. 연이겸입니다….”

차례로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제야 정말 권태정의 가족들과 만나 버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겸은 갑자기 지나치게 긴장되는 마음을 꾹 누른 채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인사도 했으니까 이제 앉아서 얘기하자.”

이겸은 권유정과 권기정을 마주보고 권태정과 나란히 앉았다. 잔뜩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저보다 훨씬 어른인 두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자체로도 이겸에게는 편할 수가 없는 자리였다.

“태정이가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걸 보는 게 처음이라 너무 반갑기도 하고,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니까 한번 보고 싶기도 해서 자리 마련했는데 이렇게 나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저야 말로… 만나 주시고, 또… 반갑게 맞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답을 겨우 하고서도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걱정이 되어 살짝 고개를 돌린 이겸은 권태정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안도하며 다시 저를 보고 있는 두 사람과 시선을 번갈아 마주했다.

“스무 살이라고 들었어요.”

“네….”

“태정이랑 열두 살 차이 나는데 뭐 그래서 어렵거나 불편한 점은 없어요?”

어렵거나 불편한 점…. 어렵거나… 불편한 점….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도 잘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과 똑똑하게 굴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머릿속에 쉽게 답이 맺히지 않았다. 이겸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작게 심호흡했다.

“누나, 내가 뭐 어렵거나 불편하게 할 사람이야? 나 안 그래. 나 이겸이한테 쉽고 편해.”

잔뜩 긴장해 얼어 버린 이겸을 눈치챈 권태정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차가워진 이겸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는 듯 단단히 쥐는 손에 이겸은 다시 작게 숨을 고르며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건 태정이 네 생각이지. 이겸 씨 입장에서는 어려울 수 있어. 안 그래요, 이겸 씨?”

“아…. 처음에는 저보다 어른이시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어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었는데…. 어…. 너무 잘해 주셔서 이제는 다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져서 다행이에요. 태정이가 안 웃으면 차가운 이미지가 좀 있어서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긴장해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앉아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겸이 귀여워 권유정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곧 집안의 막내가 바뀔 것 같았다.

“이제 식사 나올 건데 혹시 입맛에 안 맞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다른 거 주문해도 되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겸은 저와 달리 완벽하게 여유로운 어른의 모습인 권유정과 권기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권태정을 볼 때도 느낀 거지만, 권유정과 권기정 역시 범접할 수 없고, 또 따라하려고 해도 절대 따라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무척 친절하고 부드럽고, 또 다정하지만, 그래도 뭐라고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분위기. 아주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여유와 배려 같은 것들.

“태정이가 요즘 시간 많아서 이겸 씨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아요?”

“형, 질문 너무 상처다. 진짜 귀찮게 하고 싶은 거 참느라 안 그래도 죽겠는데. 아, 억울해.”

긴장한 이겸 대신 질문을 가져가 대신 대답한 권태정이 여전히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살짝 더 주어 이겸을 달랬다.

“…저는 귀찮지 않고 너무 좋아요…. 실장님께서 좋은 곳에도 데려가 주시고, 또 좋은 것도 많이 보여 주셔서…. 저한테는 너무 좋은 일이라… 귀찮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정말 한 번도, 한 번도 없어요.”

“태정이 좋게 봐 줘서 너무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이겸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젠 너무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이겸은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이겸은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직원의 설명으로는 성게알과 캐비어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조금 맛을 봤을 뿐인데도 그 식감과 바다 향이 가득 퍼지는 게 익숙하지 않아 맛있게 입에 전부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늘 성게알 특히 맛있네.”

“그러게. 하나도 안 비리네.”

“얼마 전에 이게 너무 생각나는 거야. 그날 베르사유 사장님 뵐 일이 있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저녁에 감태랑 성게알을 직접 가져다주신 거 있지. 어머니, 아버지랑 와인 마시면서 먹었는데 너무 좋았어.”

웃으며 말하는 권유정을 가만히 보던 이겸이 세 사람의 앞에 놓인 접시가 빈 것을 확인하곤 제 앞에 놓인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이겸 씨, 입에 안 맞으면 메뉴 바꿀 수 있는데 다른 걸로 바꿔 줄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겸은 얼른 캐비어가 얹힌 성게알을 들어 입에 넣었다. 조금 먹기도 힘들었던 것이 입 안을 채우자 거부감이 확 들었지만, 이겸은 억지로 몇 번 씹어 목 뒤로 삼켰다.

모두가 맛있게 먹는데 저만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바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권태정을 위해서 이 정도쯤은, 입에 넣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하고 싶었다.

“아, 태정아. 와인 마실래?”

“음, 나는 운전해야 해서.”

“대리 부르면 되잖아.”

“대리한테 이겸이 보이기 싫어.”

“…세상에.”

분명히 들었는데도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권태정을 보던 권유정과 권기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겸 씨, 평소에도 태정이가 저런 말 자주 해요?”

“…네. 자주 해 주세요.”

평소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말을 자주하는 것을 떠올린 이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이겸 쪽으로 몸을 기울인 권태정이 뺨을 살살 문지르며 눈을 맞췄다.

“자주 해서 좋지.”

권태정을 바라볼 때면 그래도 내내 불안정하게 떨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겸은 오직 저만을 바라보는 권태정과 눈을 맞추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태정이 진짜 결혼하겠다.”

“그러게.”

진지하게 대답하고, 또 반응하는 이겸을 귀엽다는 듯 바라본 권유정이 미소 지었다. 권태정이 왜 이겸에게 빠져 허우적대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럼 태정이는 운전하라고 하고, 이겸 씨가 와인 한잔할래요? 와인 괜찮아요?”

“아…. 와인은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어서요.”

“아, 처음이면 맛있는 와인 마시면 좋은데.”

직원을 호출해 자연스럽게 와인 이름을 말하는 권유정을 멍하니 보던 이겸은 배 속이 조금 울렁이는 느낌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입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삼켜서 그런 것 같았다.

“…….”

이겸은 테이블 아래로 다시 제 손을 잡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웃는 얼굴을 보며 따라 미소 지은 이겸이 불편한 저의 상황을 조금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말을 더듬고, 대답도 바로바로 제대로 못하며 바보짓을 한 것으로도 실수는 충분했다. 남은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저를 배려하느라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잘 어우러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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