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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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간 권태정은 퍼스널 쇼퍼를 대동하지 않고, 평범하게 이겸과 쇼핑을 했다.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고치고 뉴스를 타기 전에도 늘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좋은 체격,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외모까지 가진 권태정은 웬만한 연예인보다도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종종 연예인이냐면서 사인을 해 달라고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거 예쁘다.”
저를 보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은 권태정은 이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을 고르는 것에 몰두했다. 이쪽으로 자꾸만 닿는 시선을 느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이겸 하나뿐이었다.
“이겸아, 피곤하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예쁘게 생기래. 지나치게 예쁘니까 다 쳐다보잖아.”
“절 보는 게 아니라 실장님 보시는 거예요….”
“말도 안 돼. 난 네 얼굴밖에 안 보이는데. 너무 예뻐서.”
씩 웃은 권태정이 이겸에게 새로운 니트를 입혀 보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잘 어울리고 예뻐 돈 쓰는 것에 큰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권태정은 그 매장 안에 있는 비슷한 종류의 니트를 전부 사고, 차에 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음, 또…. 뭐가 필요하더라. 침대도 다시 살까? 너무 크지. 좀 작은 걸로 사서 더 붙어 잘까?”
더 붙어 자는 건 좋지만, 엄청나게 좋은 침대를 두고 굳이 새로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말하려던 이겸은 권태정의 뒤로 다가오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권태정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태정아.”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자연스럽게 권태정의 이름을 불렀다. 이겸은 여자가 권태정의 누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 누나.”
“왔으면 말을 하지. 쇼핑하러 온 거야?”
“응.”
“아, 같이 온 분이 계시네. 안녕하세요. 태정이 누나, 권유정입니다.”
상냥히 인사하며 손을 내미는 권태정의 누나, 권유정에 놀란 이겸이 얼른 그 손을 잡아 악수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이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연… 이겸 씨.”
이겸의 이름을 듣고 잠시 갸웃하던 권유정이 다시 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괜찮으시면 제 사무실에서 차 한잔하시겠어요?”
이겸에게 살갑게 말하는 권유정을 보던 권태정이 슬쩍 그 사이로 들어가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미안. 내가 점심 예약을 해 둔 게 있어서 가야 하거든. 다음에.”
“너한테 들어야 할 말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알았어.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
“오후에 나도 미팅 있고, 기정이도 미팅 있어서 끝나면 마레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기로 했거든. 너도 와.”
대충 별일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권태정은 이겸과의 관계를 제 가족에게 ‘대충’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맞닥뜨린 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이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니 카페에 데려다주고 누나와 형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는 게 가장 베스트란 생각이 들었다. 누나와 형이 먼저 알고 제 편이 되어 주면 아주 든든할 것 같았다.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다음에는 꼭 차나 식사 같이 해요.”
권태정의 옆으로 몸을 움직여 이겸에게 웃으며 말한 권유정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긴장한 채 서 있던 이겸도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권유정과 잠시 눈을 맞췄다. 아까 잠깐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권태정과 참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그럼 쇼핑 즐겁게 하세요. 태정아, 저녁에 보자.”
이겸에게 미소 지은 권유정이 권태정의 어깨를 두드리고 매장을 나섰다. 이겸은 멍하니 멀어지는 권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나 바빠서 안 내려올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응, 여기가 누나 백화점이거든. 나 쇼핑하러 왔다고 누가 보고했나 봐.”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새삼스럽게 그가 태성의 막내아들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둘이 있을 땐 떠올릴 일이 없는데 이렇게 밖에 나와 대접을 받거나 모두가 우러러보는 느낌을 받을 때면 확 체감이 되고는 했다.
“놀랐지. 이렇게 인사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조금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좋은 분 같아서 저도 좋았어요.”
“우리 누나랑 형은 나랑 달라서 진짜 착하고 젠틀해.”
괜찮다는 이겸의 말에 마음을 놓은 권태정이 주차장으로 가는 VVIP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한테 같이 다니는 거 보인 이상 이제 슬슬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진지하게 만나는 거.”
“아….”
“숨길 일도 아니고, 숨겨지는 일도 아니잖아. 누나가 궁금했는지 저녁에 형이랑 같이 저녁 먹자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 일단 누나랑 형한테는 말할까 하는데 어때?”
권태정의 말을 이해하고, 또 동의하지만, 그와 별개로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야 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해할 수 있지만, 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이유로 권태정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겸을 불안하게 했다.
“조금… 무섭기는 해요. 하지만…. 실장님 말씀처럼…. 숨길 일 아니니까 지금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응. 내가 잘 말하고 올게. 누나랑 형도 좋아해 줄 거야.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누가 싫어하겠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보송보송한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한 권태정이 웃었다. 그 싱그러운 웃음을 보며 이겸은 더욱 열심히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권태정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를 배려하며 내내 몸을 기울여 주는 권태정을 위해서. 그가 힘들게 내내 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도록.
* * *
얼른 말해 보라는 듯 저만 기다리고 있는 권유정과 권기정을 번갈아 본 권태정이 관자 요리를 반 잘라 입에 넣었다.
“태정아, 너 만나는 사람 있다는 게 진짜야? 누나가 확실하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권기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권태정은 와인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만나는 사람 있어. 그것도 꽤 진지하게 만나는 중이야. 그리고 지금부터 폭탄을 좀 터뜨릴 건데 일단 끝까지 들어 줘. 이건 내 부탁.”
“알았어. 일단 들어 보자.”
앞에 놓인 음식 같은 것은 관심도 없다는 듯 저만 바라보는 시선에 심호흡을 한 권태정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름은 연이겸이고 나이는… 스무 살이야.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려.”
일단 첫 번째로 충격받을 나이 이야기를 꺼낸 권태정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저를 보는 누나와 형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누나는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다람동 주민이야. 전에 말한 그 어린애.”
“…방송 못 나가게 해야 한다는 그 주민?”
“응.”
권기정의 물음에 태연히 대답한 권태정이 남은 관자 반쪽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인데도 오늘은 나름 긴장을 해서 그런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아서 설마 했는데…. 세상에.”
연달아 충격적인 이야기를 터뜨린 권태정은 이제 가만히 누나와 형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안 되겠다는 듯 먼저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하고 싶어.”
3연타 충격 발언에 이제 권유정과 권기정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권태정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 다 했어.”
“그러니까…. 그 주민 마크하다가 좋아하게 된 거야?”
“응. 같이 시간 보내다 보니까 좋아졌어.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게 되더라고. 난 내가 연애보단 일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이겸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게 아까워.”
이겸의 이야기를 하며 내내 웃는 권태정을 본 권유정이 작게 한숨지었다.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태정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잠깐 인사만 나눴지만, 첫인상도 좋았고.”
“이겸이 진짜 예쁘지. 웃으면 더 예뻐.”
권유정과 권기정은 처음 보는 막내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라 웃기기도 하고 또 귀엽기도 했다.
“못 살겠다, 진짜.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동안은 다 시시하고 귀찮았는데 지금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거 하나도 잊을 수가 없어. 나 처음으로 상처도 받아 봤다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거 아냐. 철거촌에 간 지 이제 두 달 됐잖아. 좋은 건 알겠는데 두 달 만나고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는 건 좀 너무 이르지 않아?”
걱정이 묻은 목소리에 권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지 두 달이고, 좋아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보다 짧기에 누나와 형이 뭘 걱정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야. 철거 후에 제대로 집 정리해서 이겸이랑 같이 살게 된 다음에 천천히 하겠단 거지. 당장 다음 주에 결혼한다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너도 생각을 다 했으니까 우리한테 말하는 거겠지.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막내 믿어. 누구보다 똑똑하고 자기 앞가림 잘하니까. 그런데 스무 살은 너무 어리다. 얼굴 완전 애기다 싶었는데 정말 애기네.”
저를 보고 어쩔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바라보던 이겸의 얼굴을 떠올린 권유정이 작게 웃음 지었다.
“언제 같이 식사 한번 하자.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 태정이 네가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진 상대라면 우리한테 소개해 줄 수 있잖아. 한번 보고 싶어.”
“이겸이한테 물어볼게. 누나랑 형도 얼른 접시 비워. 지금 나만 먹고 있는 거 알아?”
그제야 처음으로 커틀러리를 든 권유정과 권기정이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이라는 듯 숨이 뒤섞인 웃음을 차례로 터뜨렸다. 이제 두 남매의 바람은 부디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3연타의 충격을 잘 견디시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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