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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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의 말을 듣던 권태정의 미간이 확 찌그러졌다. 권태정은 그대로 이겸의 몸까지 안아 함께 상체를 세워 앉았다. 이겸은 화가 난 것 같은 권태정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내가 내 애 가진 널 버릴까 봐 걱정이 된다는 거야?”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이겸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소 과격하게 요약된 말이기는 하지만, 아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 없을 거라는 거 알아요. 아는데 가능성 없는 일까지 생각을 해 봐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해 본 거예요. 실장님이 그러실 것 같아서 그런 건 정말 아니에요.”
“…….”
“정말이에요….”
순간 확 치솟은 서운함을 누그러뜨린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겸의 말이 맞았다.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긴다는 건 일어나지 않을 일까지 생각해 보면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저처럼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 눈앞의 서운함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니까. 애 가졌다고 하면 재벌가에서 돈 주고 떠나라 그러고, 애만 달라 그러고 뭐 그런 거.”
“…….”
“우리 부모님 그런 분들 아니야. 책임을 안 지면 쫓아내도 책임진다는데 뒤에서 손쓰거나 너한테 막대할 분들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뭐 물론 혼이야 나겠지.”
혼난다는 말에 금세 얼굴에 걱정이 어리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주물렀다.
“너 말고 나. 어린 너한테 노팅한 거 알면 당연히 욕먹겠지. 뭐 그건 각오하고 있고.”
“…….”
“정말 만약에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시거나 네가 걱정하는 행동을 하실 땐 내가 부모님 안 봐.”
“…….”
“다 버리고 너한테 갈 거라고. 어떤 경우에도 내가 널 혼자 두는 선택지는 없어. 그러니까 그건 정말 걱정하지 마.”
분명한 말에 마음으로 묵직한 안도가 찾아들었다. 이겸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권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버리는 건 좀 그런가?”
“네?”
“빈털터리는 매력 없잖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집을 등지고 나온다고 해도 조금 전 제가 말한 빈털터리가 될 일은 없었다. 제 이름으로 된 재산이 아주 많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나온다고 제 이름으로 된 제 재산까지 놓고 나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이겸을 평생 돈만 쓰다가 지쳐 제발 일을 좀 하고 싶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겨서 실장님이 다 버리고… 저한테 오시면….”
“…….”
“…제가 일 열심히 해서 실장님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제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하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귀엽고 다정한 말이라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지 않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이 마음에 너무나 세게 박혀 버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만큼. 권태정은 매끄러운 눈동자로 이겸을 보다가 가만히 작은 몸을 제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물론 그런 일 없어도… 행복하게 해 드릴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눈만 마주쳐도 행복한데 뭘 또 다짐까지 해.”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이겸아. 그거 프러포즈인 건 알지?”
프러포즈란 말을 잠시 생각하던 이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프, 프러포즈요?”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게 프러포즈지. 아니야? 나랑 결혼은 좀 별로야? 결혼까지 하기엔 좀 철없어 보여?”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이겸은 단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나이도 형편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권태정이 말한 결혼이라는 말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난 너랑 할 건데.”
“…….”
“좀 전에 프러포즈도 받았고.”
싱긋 웃은 권태정이 이겸을 보며 두 팔을 벌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안겨 든 이겸이 어느새 너무나 익숙해진 기분 좋은 페로몬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저도… 실장님이랑… 할 거예요.”
품 안에서 울리는 작은 목소리에 웃음 지은 권태정이 이겸의 머리칼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의 틈도 없이 이겸을 완전히 옭아맸다. 그 단단한 팔과 몸에 완전히 갇힌 채 완벽한 안정감과 마주한 이겸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고마워.”
“…….”
“네가 날 좋아한 거 후회하지 않게 할게.”
귓가에 달라붙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어깨 위로 얼굴을 묻어 숨기며 눈을 감았다.
온몸으로 단단히 느껴지는 너무나 분명한 행복에 휩싸인 채.
* * *
아침 일찍 이겸을 데리고 센터에 간 권태정은 놀라 멍해진 조현준을 보다가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정신 차려.”
“…어…. 어? 아, 어….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임신해도 무리가 없을지 알고 싶다고.”
“아…. 어, 임신. 그래, 임신…. 어, 그럼 일단 혈액 검사부터 해 볼까요? 혹시 식사하셨어요?”
“어제저녁 8시 이후로는 먹은 거 없어.”
이겸에게 물었는데 권태정이 답하는 게 어이없어 흘끗 본 조현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곧 노크와 함께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조현준은 간호사에게 혈액 검사를 부탁했다.
“이겸아, 같이 갈까?”
“괜찮아요.”
“조심해서 다녀와.”
“…네.”
과하다 싶을 만큼 이겸을 챙기는 권태정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 조현준이 나가기 전 저에게 꾸벅 인사하는 이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에 아파서 창백한 걸 봤을 때도 감탄사가 터질 얼굴이었는데 멀쩡할 때 보니 말문이 다 막혔다. 아니,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나 싶을 만큼 예뻐 저도 모르게 자꾸 신기해서 보게 될 정도였다.
“뭘 자꾸 봐.”
문이 닫히자마자 터져 나오는 권태정의 볼멘소리에 혀를 찬 조현준이 책상을 가로지르듯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갑자기 임신이 다 뭐야?”
“노팅했어.”
“…뭐? 와, 이거…. 와, 권태정…. 그런 건 관심도 없는 척 굴더니, 노팅…. 와. 러트 주사 맞으라고 그렇게 연락해도 씹더니 다 생각이 있었구나.”
“그런 거 아니야. 좀 신경 쓸 일이 있어서 러트 올 때 된 걸 완전히 잊고 있었어. 알았을 땐 이미 터진 뒤였고.”
이겸의 집 앞에 차를 세워 두고 밤에 지키다가 아침에 되면 부리나케 피하는 매일을 보내느라 네 연락 같은 걸 받을 정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대충 얼버무린 권태정이 눈을 게슴츠레 뜬 조현준을 바라보았다.
“아, 뭐.”
“만약에 정말 임신 되면 낳을 거야?”
“뭔 개소리야. 안 낳아, 그럼?”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헛숨을 내쉰 조현준이 들고 있던 펜을 놓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진짜 낳는다고?”
“응.”
“결혼할 거야?”
“응. 프러포즈도 받았어.”
프러포즈란 말에 입을 쩍 벌린 조현준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권태정은 다리를 꼰 채 책상을 똑, 똑 두드렸다.
“야. 정신 차리라고.”
“회장님도 아시고?”
“아니. 아직 모르시지. 나 장난으로 이러는 거 아냐. 단순히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고. 나 이겸이 좋아해.”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에 조현준은 권태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제 친구가 진짜 저 어린애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었다.
머리채를 잡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 할 때도, 또 억제제를 대신 타러 왔을 때도, 아프다고 집에 눕히고 안절부절못하는 걸 볼 때도 이렇게 진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게 다 진짜였다니.
“권태정이 제일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잖아. 아무튼 앞으로 이겸이도 여기 다닐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일단 알았어. 혈액 검사 결과 빠르게 뽑아 볼게. 한 세 시간 정도 걸릴 거야. 나오면 연락할게.”
“어. 이제 뭐 먹여도 되지?”
“엉.”
고개를 끄덕이는 조현준을 보며 권태정이 뭔가 생각난 듯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가족들한텐 말하지 마. 누나랑 형도 여기 다니니까 만날 거 아냐.”
“말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나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념 있는 척하네.”
“나 돌팔이라고 하는 건 너밖에 없어. 재벌 나부랭이야.”
어이없다는 듯 조현준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원장실을 나서 전에 간 적이 있는 채혈실로 향했다. 그 앞에 서서 조금 기다리자 소매를 걷고 피 뽑은 자리를 거즈로 누른 이겸이 나와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실장님….”
“응, 다 한 거야? 아팠지.”
“조금 따끔했어요.”
따끔했다면서 팔을 보여 주는 이겸의 뺨을 빨고 싶다 생각한 권태정이 침음했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권태정이 병원에서 예쁜 애를 물고 빨았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게 없기에 지금은 좀 참기로 했다.
“피 뽑았으니까 저녁에 고기 먹자. 안 그래도 요즘 무리해서 힘들 텐데 피까지 뽑히고….”
불만스럽게 조현준의 방을 돌아본 권태정이 보호하듯 이겸의 허리를 가볍게 팔로 감쌌다. 그 순간 이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심장이 마구 뛰고 울렁이는 것에 놀란 이겸이 손을 올려 그 심장 위를 꾹 눌렀다. 손바닥으로 두근두근한 박동이 느껴졌다.
“어디 불편해? 아파?”
“아…. 아니에요.”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라 고개를 저은 이겸이 제 어깨를 감싸 안는 권태정의 팔 안에 갇힌 채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권태정의 팔과 손이 닿은 곳이 내내 화끈거렸다.
“결과 나오면 연락 준다니까 근처에서 브런치 먹자. 배고프겠다.”
“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조수석에 올라 다시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권태정을 보면 늘 떨리고 긴장이 되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는 평소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깊은 스킨십을 한 것도 아니고,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심장이 울렁이며 마구 뛰었다.
“…….”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지…. 운전석에 오르는 권태정을 보며 여전히 쿵쿵대는 심장 위를 누른 이겸이 가만히 웃음 지었다. 이 거센 일렁임이 조금은 진정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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