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98화 (98/174)

#98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

“이제 힘든 일 없을 거야. 있어도 내가 다 해결할 거니까 이겸이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좋은 것만 생각해. 바라는 것도 다 말하고.”

“저는… 실장님이랑…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보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권태정은 이겸의 말에 쉽게 대답을 찾지 못했다.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겸은 그런 답을 바란 걸 수도 있지만, 권태정은 조금 더 신중하고 싶었다. 이겸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불안해 보이는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또 깊게 안아 주고 싶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동안 봐서 알겠지만, 나 좀 이기적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당연하고 익숙해. 굳이 남한테 헌신적이어야 할 이유도 못 느끼고, 누군가를 좋아할 에너지로 일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어.”

“…….”

“그랬는데 널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에너지와 일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알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주는 게 더 기분 좋다는 것도 알게 됐어.”

이겸은 흔들림 하나 없는 권태정의 눈동자와 목소리를 조금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단단하고 분명한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졌어. 난 차에서 지낸 거 후회 안 해. 너랑 가까이 있어서 난 좋았거든. 집에 있는 것보다 마음도 편하고.”

“…….”

“넌 내가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고 살던 모든 걸 뒤집어.”

“…….”

“세상이 뒤집히면 힘들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 사실 원래의 내가 남들이랑 다르게 뒤집혀 있던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네가 날 원래대로 돌려준 거야. 이겸이 네가.”

“…….”

“뒤집힌 내 세상에는 너밖에 없어.”

나직한 목소리를 이겸의 마음으로 소리 낸 권태정이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울먹이는 이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곧 너무나 익숙하게 마주 물린 입술 사이로 따뜻함이 번졌다. 혀를 쓰지 않고 입술만 머금던 권태정이 부드럽게 닿는 혀를 문지르며 깊게 키스했다.

그 순간 몸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꼭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저의 정신이 이겸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서로가 뒤섞이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좋아 권태정은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깊게 혀를 섞었다.

“하아….”

“나가고 싶다고 해도 이제 못 나가. 오래 보고 싶다는 말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안 놓친다는 거, 안 놔준다는 거 장난으로 한 말 아니야.”

“…….”

“난 내가 좋아하는 거에 애착이 강하거든. 사람한테 그래 본 적은 없는데 이겸이 너 보면서 알았어. 아, 사람한텐 더 하는구나.”

“…….”

“싫어? 적당히만 좋아할까? 말만 들어도 무섭고 질려?”

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 더한 말이 나왔다고 해도 저는 무섭지도, 또 질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권태정의 마음을 적당히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가득, 온몸을 감싸 끝없이 녹일 만큼 전부 다 받고 싶었다.

뒤집힌 권태정의 세상 안에서.

바보처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에게 닿는 마음을 또 계속해서 권태정에게 흐르는 마음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진 마음을 오롯이 권태정에게 보이고 싶었다.

처음이라 서툴고, 예쁜 하트 모양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보여 주고 싶었다. 처음 만든 저의… 사랑을.

“…많이… 많이 좋아해 주세요….”

씨발, 진짜 존나 예쁘네. 과격한 표현을 차마 이런 분위기에 소리 낼 수 없어 속으로만 말한 권태정이 고개를 기울여 다시 입술을 찾았다. 많이 좋아해 달란 말이 사랑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러트와는 전혀 상관없는 발기였다.

“아….”

아직 몸 안에 든 성기가 더 커져 내벽을 가득 늘리는 느낌에 앓는 소리를 낸 이겸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떨리는 이겸을 안아 소파에 눕힌 권태정이 그대로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친 뒤 허리를 움직였다. 저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못하는 얼굴을 보며 권태정은 몇 번이고 발기했다. 권태정 역시 몸을 섞는 내내 이겸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알았어, 많이 좋아할게.”

“…네…. 많이….”

“존나 많이?”

차마 그 말은 소리 내기가 어려운지 입술만 달싹이던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달아오른 숨을 내쉬며 이겸의 안으로 사정했다.

제가 사정할 때마다 움찔대는 이겸이 사랑스러워 권태정은 한참이나 그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늘 알 수 있게 더 많이 말하고, 또 더 많이 보여 줄게.

“…….”

“혼자라는 생각 안 들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웃음 지으며 손을 들어 잘생기지 않은 구석이 없는 권태정의 얼굴을 매만졌다. 저를 보는 눈, 반듯한 콧날과 늘 마음을 채워 주는 다정함이 흐르는 입술.

온통 시선을 뗄 수 없는 것들뿐이라 이겸은 한참이나 권태정의 얼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결까지 멋있어 보이는 눈썹과 속눈썹까지 만져 귀찮을 텐데도 권태정은 군소리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찡그리거나 얼굴을 피하지도 않고, 내내 기꺼이 얼굴을 내어 주었다.

이겸은 가끔 권태정이 제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물거나 그 위에 입을 맞출 때마다 사르르 웃었다.

그리고 권태정은 그 웃음을 마주할 때마다 더 많이 좋아해 달라고 울 것처럼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많이… 많이 좋아해 주세요….’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제 모든 것을 내던지겠다고. 이 얼굴이 웃을 수만 있다면, 저의 뒤집힌 세상에서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저는 이제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 * *

러트와 전혀 상관없는 섹스를 밤새 나누고, 아침에 씻으면서까지 몇 번이나 더 한 뒤에야 권태정은 몸을 떼어 냈다.

이대로 이겸과 내내 몸을 붙인 채 살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떨어진 권태정은 저에게 성기를 빨리며 쌕쌕 달아오른 숨을 내쉬는 이겸의 뺨을 귀엽다는 듯 두드렸다.

일어나는 저를 향해 고개를 들어 보는 얼굴이 너무 예뻐 또 구멍을 잔뜩 혀로 괴롭히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제 욕구 때문에 겨우 씻고 나온 이겸을 또 괴롭혀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집에서 좀 푹 쉬자. 맛있는 것도 먹고.”

“네….”

숨을 고르며 대답한 이겸이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놓인 권태정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실장님, 전화 왔어요.”

“어? 어, 잠깐만.”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한 권태정은 누나 이름이 뜨는 것을 보곤 전화를 받았다. 심각한 건 아니고 회사 일 중에 의견을 듣고 싶은 게 있어 걸었다는 누나의 말에 권태정은 이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어.”

“네….”

방에서 나가는 권태정의 뒷모습을 보던 이겸이 몸에서 힘을 풀며 침대 위로 추욱 늘어졌다. 겨우 이불만 끌어 몸 위로 덮자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노팅을 했으니까 아이가 생길 수도 있어.’

그때 권태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겸은 반쯤 감기던 눈을 떠 모로 누워 권태정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러트라는 권태정에게 오며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만약 생각을 했더라도 제 선택은 그대로였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생긴다는 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권태정의 말대로 저는 아직 너무 어렸다. 혼자 생활을 하고, 삶을 이끌어 갈 정도의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울 정도의 나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솔직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겸은 권태정의 빈 베개를 물끄러미 보다가 습관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나야 좋지만, 이겸이 넌 아직 어리고 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을 거라 마냥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권태정은 저에게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일도 많을 거라 마냥 좋은 일이 아닐 거라 말했지만, 이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런 것보다도 제가 아이를 책임질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물론 권태정이 있지만, 만약, 정말 만에 하나라도 제가 혼자 아기와 살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숨을 폭 내쉰 이겸이 이불을 입술 위까지 끌어올렸다.

“…….”

그렇다고 아이 생기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저의 아이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걱정되는 게 많고, 또 조금 무섭기도 해서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안 잤어? 재워 줄까?”

방문이 열리며 들리는 목소리에 이겸은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오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복잡하고 걱정이 가득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침대에 오르는 권태정에게 다가간 이겸이 저를 안아 오는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안 좋아졌어?”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이겸이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아…. 그 생각하고 있었어?”

“네….”

“이겸아. 난 어떤 경우에도 네가 우선이야. 네가 괜찮다고 해도 아직 스물인데 임신하긴 너무 이른 게 사실이고.”

가만히 말을 듣던 이겸이 다시 권태정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뭐가 걱정스러웠는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혼자만 생각하고, 혼자서 정리하면 권태정은 제 마음을 알지 못하니까.

“…실장님만 생각하면… 전 아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아요. 실장님께서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거니까요…. 그런데 제가 걱정되는 건….”

“응. 걱정되는 건.”

“…전 실장님이랑 어울리는 위치의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제가 혼자… 키워야 할 일이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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