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97화 (97/174)

#97

“…네?”

이겸의 반응에 크게 웃은 권태정이 백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정도 연결음이 울렸을 때 들리는 백 비서의 목소리는 뭔가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네, 실장님. 이제 좀 괜찮으세요?

“백 비서님 갑자기 거리 두시네요. 잘못한 걸 알긴 아시나 봐요.”

-목소리 들어 보니 제가 딱히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하여튼 넌 얼굴 보면 죽을 줄 알아. 나한테 말도 없이 이겸이를 데리고 와서는 문 열게 하고 튀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변명할 기회를 좀 주라.

제 이름이 나오는 것에 물끄러미 보는 이겸의 뺨을 톡톡 두드린 권태정이 웃으며 괜히 입으로만 불퉁한 소리를 냈다.

“좋아. 한 번 들어 보긴 할게.”

-듣고 나면 절대 내 탓 못 한다. 그건 나중에 말하고…. 먹을 거 필요하지? 저번처럼 몇 가지 사서 가져다줘?

“귀신이네.”

-권태정 비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어떤 거 사다 줄까?

“게살수프랑 초콜릿, 그리고 마레에서 파는 복숭아 무스. 그거랑 그 호텔 한식당 갈비구이 같은 것 좀 알아서 사다 줘. 저녁도 먹여야지.”

메모하는지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릴 거란 목소리가 울렸다. 고맙다고 대답한 권태정이 통화를 마치고 여전히 저를 가만히 보고 있는 이겸의 뺨을 아프지 않게 늘였다.

“왜 그렇게 예쁘게 봐.”

“…제가 비서님께 부탁드린 거예요. 비서님은 잘못하신 거 없으세요.”

“잘못한 거 있지. 아무리 네가 부탁했어도 널 데려오면 안 됐어. 내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저야 이겸과 함께 있어 고통보다 쾌락 속에서 러트를 보내게 되어 좋은 일이었지만, 이겸에게는 이 일이 굳이 겪지 않아도 됐을 일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다.

제가 러트로 힘들어 한다고 반드시 이겸이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 줄 이유는 없는 거니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또 짐승처럼 본능만 남아 달려들고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어떻게든 혼자 참아 보려던 게 허사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백진우의 잘못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화를 낼 생각은 없지만.

“실장님 러트로 힘드시다는 거 듣고…. 제가 꼭 가고 싶다고 계속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신 거예요.”

“왜 이렇게 백 비서 편을 들어? 나 없는 사이에 친해지기라도 했어?”

“그런 게 아니라…. 저 때문에… 괜히 곤란해지신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백 비서에게 심한 소리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 내가 그 정도로 싸가지 없어 보이나. 고개를 갸웃한 권태정이 이겸의 걱정 가득한 눈가에 짧게 입 맞췄다.

“알았어. 화 안 낼게. 원래도 화내려던 건 아니야. 다만 내가 미친놈 됐을 때 널 거기 밀어 넣고 간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제대로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진우는 베타라 잘 모르니까.”

화를 내지 않겠다는 말에 이겸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맺혔다. 또렷하진 않아도 분명 웃음이라 할 수 있는 미소를 가만히 보던 권태정이 가만히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시는 웃는 거 못 보면 어쩌나 걱정했어.”

“…….”

“차에서 지내는 거 알고 완전히 질렸을 거라 생각했거든. 날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거 알지만, 싫다는 짓을 내가 한 거니까.”

“…정말 걱정돼서 말씀드린 거예요. 질렸다거나… 싫었으면 여기 절대 오지도 않았을 거고….”

조금의 거짓도 없는 말이었다. 권태정이 싫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러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까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착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귓가를 지나 뺨에 닿아 있었다. 아무래도 권태정은 제 얼굴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겸은 그런 권태정을 보며 조금 전 그가 한 착하다는 말을 곱씹었다.

“…착해서 온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단 하나의 이유를. 제가 착해서도 전에 제 히트를 함께 보내 준 것에 대한 보답도 아닌 유일한, 너무나도 또렷한 기울어진 마음의 이름을.

“…실장님이… 좋아서….”

“…….”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서, 그래서 온….”

권태정의 유려한 기다란 손가락이 이겸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다리 위에 앉은 채 마주보고 있던 이겸은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며 눈을 감고 맞물리는 입술을 마주 머금었다.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또렷하게 마음에 맺혀 본 적도 없고, 또 맺힐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아주 낯선 감정이 이겸은 싫지 않았다.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제 안에서 권태정이 너무 커져 버렸다. 어디를 봐도 권태정이 있어 혼자서는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토끼 탈을 보기만 해도 권태정이 떠오르고, 카페에서 누군가가 핫초코를 주문할 때면 눈물이 핑 돌았다. 카페 앞에 서는 까만 차만 봐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 괜히 내리는 사람을 유심히 보게 되고, 대문 맞은편에 무너져 내린 벽돌 더미만 봐도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권태정이 제 일상에, 머릿속에… 마음에 들어와 그것들을 전부 꽉 채웠다는 것을 더는, 더는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으응….”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뒷머리를 누르던 권태정의 손이 부드럽게 이겸의 목덜미를 지나 티셔츠 위로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다시 짙어진 그의 페로몬을 느낀 이겸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손에 잘게 몸을 떨었다. 짙고 깊은 향에 또 열이 올라 피부가 화끈화끈한 게 느껴졌다.

“하아…. 흐으, 으응….”

허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든 이겸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권태정을 느끼며 느릿하게 몸을 내렸다. 원래의 자리로 들어오듯 내벽을 문지르며 깊게 들어오는 느낌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아…….”

긴 신음과 함께 이겸의 몸이 약하게 떨렸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다시 제 혀를 물리고 허리를 움직였다. 위아래로 몸이 들썩일 때마다 어긋난 입술 사이에서 혀끝이 문질리며 쾌감을 더했다.

“으응, 응…. 아….”

잔뜩 기분 좋은 쾌감이 이겸의 몸을 휘감았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의 쾌감이라 금세 머릿속이 흐트러졌다. 배 속 깊은 곳까지 들어온 성기가 정확히 느끼는 곳을 짓뭉갤 때마다 이겸의 성기 끝에서 물이 조금씩 흘렀다.

“이겸아.”

권태정이 부르는 제 이름 하나로도 더 쾌감이 짙어지는 것을 느낀 이겸이 겨우 눈을 떠 저를 보고 있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보며 속상한 마음이 든 적은 있었어도 한 번도 미운 적은 없던 얼굴이었다.

“아…. 이겸아. 연이겸.”

이겸의 어깨와 가슴에 입 맞춘 권태정이 조금 더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살짝 올라갔던 몸이 내려앉으면 권태정의 몸은 올라붙었다. 애액이 흐르며 찔꺽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움직임이 더 거세졌다. 권태정은 이겸을 가리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를 벗겨 대충 소파 옆으로 던졌다.

“아…! 읏, 응! 하으읏, 아….”

세게 깊은 곳을 짓누른 순간 이겸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마른 배가 경련했다. 너무 느껴 어쩔 줄 모르는 이겸의 얼굴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말간 피부와 쾌감으로 붉게 물든 눈가와 귓가, 달아오른 숨을 머금어 떨리는 입술을 차례로 보던 권태정은 이겸의 몸이 혼자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더 아래로 떨어뜨렸다.

“…씨발.”

쾌감의 여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이겸의 허리가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잔뜩 느끼는 곳을 짓눌린 채 혼자 돌아가는 허리를 보던 권태정이 인상을 썼다. 제 자지를 문 채 혼자 허리를 돌리며 깊은 곳을 자극하는 이겸이라니…. 지나친 자극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권태정이 슬쩍 혀끝만 내밀어 이겸의 유두를 핥자 듣기만 해도 사정할 것 같은 신음이 터졌다. 다시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낀 권태정이 집요하게 유두를 입 안에 넣고 빨아 댔다. 혀로 굴리기도 하고, 주위를 문지르다가 세게 빨아들일 때마다 이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으응…. 응….”

“하….”

이겸의 모습을 잠시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떼지 않은 채 권태정은 한 번씩 허리를 쳐올려 이겸을 더 깊이 자극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릴 만큼 큰 자극이 허리를 중심으로 퍼질 때마다 이겸의 몸이 녹아내렸다.

“이겸아. 기분 좋아?”

“…으응, 좋아요…. 아, 좋아….”

소파에 닿은 하얗고 깨끗한 발이 움츠러들고 발가락이 말려들었다. 이겸은 권태정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또 물을 흘렸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게 허리를 쳐올린 순간 길게 신음하며 말도 안 될 정도의 강한 쾌감과 마주했다.

“아아…….”

뒤로 몸을 젖혔다가 저를 당기는 손길에 권태정의 품으로 안겨 든 이겸은 한참이나 몸을 떨었다. 등이나 허리, 목덜미에 권태정의 손이 닿기만 해도 쾌감이 그쪽으로 옮겨붙으며 화끈거렸다.

숨을 고르며 권태정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 이겸이 두 팔로 가득 권태정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나는 마른 꽃잎 향이 좋아 자꾸만 마음이 일렁였다.

“좋아해.”

“…….”

“좋아해, 이겸아.”

일렁이는 마음 안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든 이겸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권태정을 담았다.

“널 만난 뒤로는 종일 네 생각만 해.”

“…….”

“처음부터 그랬어. 좋아하기 전에도. 물론 그게 다 순수한 생각이었다곤 못 하지만.”

작게 웃은 권태정이 정신없이 저만을 바라보는 예쁜 눈동자를 보며 웃음 지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만 알아줬으면 했는데.”

“…….”

“고마워.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

“처음이야. 좋아한다는 말에 매달리고 싶은 거.”

“…….”

“절대, 절대 안 놓쳐. 안 놔줄 거야. 그 말 내 거야, 이제.”

내 거야. 전부. 귓가에 닿아 스미는 말이 너무나 좋아 온몸이 다 저릿했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말과 놓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권태정의 단단한 두 팔처럼 이겸의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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