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89화 (89/174)

#89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는 걸 이겸이 알면 당연히 걱정하고, 속상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이러는 게 불편하고 싫다는 말을 들으니 자꾸만 상처가 났다. 아무래도 제가 진짜 컨디션이 안 좋긴 한 모양이었다.

“나 이제 그만 올까? 어젠 그래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또 제자리야. 요즘은 네가 나랑 같이 있을 때 계속 울기만 하는 것 같아. 이러려던 건 아닌데.”

“…오늘은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그리고 제가 싫다고 한 건…. 저도 걱정이 돼서 그런 거예요.”

“응, 알아. 우리 이겸이는 착하니까.”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은 권태정이 지끈대는 머릿속과 괜히 약해져 상처가 난 마음을 숨기며 싱긋 웃었다.

“오늘은 일찍 나왔네?

“네…. 좀 일찍 가야 하는 일이 생겨서요.”

“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전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실장님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네? 제 소원이에요.”

“아, 소원은 너무했다. 소원이라는데 안 들어줄 수도 없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음 같아서는 권태정이 집에 가서 정말 쉬는지 안 쉬는지도 눈으로 보고픈 마음이지만, 그럴 수가 없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저렇게 약한 얼굴은 처음이라 더 그랬다.

“…꼭 가서 쉬세요. 전 가 볼게요.”

“응. 조심해서 가.”

“…네…. 실장님도 운전 조심하세요.”

권태정의 끄덕임을 두 눈에 담은 이겸이 뒤돌아 얼른 골목 어귀를 벗어났다.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권태정이 집에 빨리 못 갈 것만 같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다가 나중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었다.

“하아….”

턱까지 차오른 숨에 아침부터 힘이 쭉 빠졌다.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이겸은 광고가 붙은 투명한 벽 쪽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나 이제 그만 올까?’

그 말을 하는 권태정의 얼굴이 너무 아파 보여서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보는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저를 기다리는 게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더 정확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어쩐지 상처를 준 것만 같아 걱정이었다. 이겸은 걱정 위로 또 쌓이는 새로운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도 이제 집에 가서 쉬시겠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버스가 오고 가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권태정을 떠올리던 이겸은 제 앞에 선 버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 제가 타야 하는 버스라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에도 권태정을 향한 걱정은 조금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 *

제가 집에 가서 쉬는 게 소원이라는 이겸의 말을 떠올리며 집으로 간 권태정은 가자마자 겨우 씻기만 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 배어 나온 물기에 베개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났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아….”

눕는 순간 몸이 침대 아래로 확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물에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권태정은 점점 제가 쉬는 숨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씹.”

그리고 그 열이 몸에도 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백 비서가 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태정아. 목요일에 센터 예약해 뒀어.’

‘센터는 왜?’

‘러트 올 때 됐어.’

이겸에게 정신이 팔려 센터에 가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조현준이 몇 번 전화를 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이겸과 함께 있을 때라 받지 못한 기억이 났다. 이겸의 마음을 돌려야 하고,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느라 러트 올 때가 됐다는 것을 아주 완벽하게 잊은 것이었다.

“…씨발.”

이제야 왜 그렇게 한기가 들고, 감정들이 곤두섰는지 이해가 됐다. 권태정은 점점 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이제라도 센터에 가서 주사를 맞을까 잠시 생각도 했지만, 이 꼴을 해서 밖에 나갈 수도 없거니와 우성알파의 경우 한번 터져 나온 페로몬은 주사 따위로 절대 막을 수가 없었다.

워낙 몸에 고인 페로몬의 위력이 세기 때문에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전에, 그러니까 그게 터져 나오기 전에 잠재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를 놓쳐 버리면 약으로는 완전히 러트를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이제 주사를 맞는다고 해도 일주일 날 발정을 닷새로 줄여 주는 정도의 효과가 전부일 것이었다. 권태정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열이 잔뜩 묻은 숨과 함께 욕을 짓씹었다.

페로몬 조절을 잘하게 된 뒤로 늘 미리 짓눌러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해 본 적이 없는 러트의 시작이었다.

* * *

벌써 사흘째 권태정이 보이지 않았다. 권태정이 골목에 차를 세우고 매일 거기서 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날 밤부터 어제,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권태정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이겸은 무척 불안해졌다.

혹시나 해서 밤에 골목 어귀에 나가 보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컨테이너에 가 보기도 했지만, 권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해 봐도 연결음만 가다가 끊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나 이제 그만 올까?’

머릿속을 맴돌던 말은 이제 마음까지 완전히 채워 버렸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 싫다고나 하고, 그러지 말라고만 한 저에게 이제 완전히 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심장이 쿵 떨어졌다.

“…….”

저 때문에 고생하는 게 걱정이 되고 싫어서 울컥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떤 마음으로 한 말인지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떨어진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에 손가락 끝만 꾹꾹 깨물고 있던 이겸이 안 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집을 나섰다.

컨테이너에 가 봐도 권태정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파 보였는데 혹시 많이 아파서 오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어 자꾸만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겸은 새빨간 컨테이너로 다가가 잠겨 열리지 않는 문손잡이를 쥐었다.

“…어쩌지….”

고개를 살짝 숙여 문에 머리를 기댄 이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바퀴가 모래를 밟으며 구르는 소리에 얼른 몸을 돌려 컨테이너로 다가오는 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린 것은 권태정이 아니라 그와 함께 다니는 백 비서라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연이겸 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저… 실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해서요. 연락도 안 되고…. 오지도 않으시는 것 같아서….”

“아…. 태정이요. 어, 그게…. 태정이가 좀 많이 아파요.”

머뭇대다가 말하는 백 비서의 말에 이겸의 눈이 커졌다. 평소와 달리 아파 보이던 얼굴에 혹시 아픈 건 아닐까 걱정은 했었지만, 정말 그렇다고 하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것도 많이 아프다니 더더욱.

“…어디,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제가 며칠 전에도 아파 보이셨거든요. 얼굴도 창백하시고….”

“며칠 됐어요. 집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며칠은 더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제가 뭘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일이라….”

“감기 걸리신 거예요? 아니면 몸살이나….”

“아, 그게…. 태정이 알파인 건 아시죠? 러트가 왔어요. 원래 오기 전에 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걸 잊고 안 가서 심하게 온 모양이에요. 오랫동안 러트 안 오게 쭉 관리하며 지냈거든요. 그렇게 누르다가 한번 확 터지니까 정도가 심한 모양인데….”

러트라는 말에 이겸은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날, 그러니까 차에서 밤을 지새우는 권태정과 마주쳤던 날, 그의 페로몬 향이 유난히 더 짙게 느껴졌던 게 떠올랐다. 이제야 그게 이해가 됐다.

“…….”

모르면 몰라도 권태정이 러트에 혼자 힘들어하고 있다는데 제가 모른 척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버티는 것보다 오메가가 있으면 더 빠르게 안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제가 갑작스러운 히트 사이클 때 권태정이 있어 큰 안정을 느끼고,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던 것처럼 저도 권태정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이겸은 손을 마주 쥔 채 손끝을 만지작대다가 조그맣게 목소리를 냈다.

“…저기 비서님….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말씀하세요.”

“…저…. 실장님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태정이한테요?”

“네…. 꼭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저 좀 도와주세요.”

백 비서는 잠시 이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단순히 관리자와 주민이 가질 수 있는 감정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 저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둘이 얼마나 깊어진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권태정이 그동안 한 이야기만 종합해 봐도 연인에 가까운 사이인 건 분명하니까.

하지만 지금 권태정은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말이 좋아 예민이지 그 어떤 단어로도 전부 담을 수가 없을 만큼 감정이 곤두선 상태라 절대 건드리면 안 될 상황이었다.

미리 러트를 막는 주사를 맞아도 권태정은 러트 기간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고는 했다. 막아도 그 정도인데 막지 못하고 혼자 러트를 버티고 있을 권태정이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는 백 비서도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어, 지금 말고 며칠 뒤에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태정이가 엄청 힘들고 예민할 때라….”

“…그럴 때… 혼자 보내지 않고 오메가랑 보내면… 더 빨리 가라앉는다고… 들었어요.”

“아…. 네, 그건 그렇지만….”

이겸이 오메가인 것을 모르는 백 비서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웠다. 갑자기 오메가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다.

“…그러니까 제가 가면… 실장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겸 씨가 왜…. 어, 아…. 잠깐만요. 지금 그러니까….”

더듬더듬 뭔가 부끄러운 치부를 보이듯 구는 이겸을 바라보던 백 비서가 설마 하는 눈으로 이겸을 바라보았다.

“…혹시 오메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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