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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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잘 어울리네.”
갑자기 병아리가 내는 소리는 왜 내 보라고 한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던 이겸은 권태정이 잡고 있는 제 손 위로 보이는 노란 소매를 본 뒤에야 그 말을 이해했다.
“…옷이 거의 실장님 댁에 있어서요…. 이 옷이 아니면 다 원래 제 옷들이라서….”
“놀리려고 한 말 아니야. 귀여워서 그런 거지. 잘 어울려. 예뻐.”
조수석 문을 열고 타라며 손짓한 권태정이 노란 니트를 보며 계속 웃었다.
사 줄 때도 참 잘 어울리고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햇빛이 쨍쨍하니 좋은 날 그 빛 아래 입고 있는 걸 보니 그때보다 더 만족도가 컸다. 정말 봄나들이를 나온 병아리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어제 술 마셨으니까 국물 있는 거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식당 예약해 뒀어. 뭐 먹을 수 있겠어?”
“…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응, 그럼 거기로 갈게.”
저를 보고 또 웃는 권태정을 마주하고 있던 이겸이 얼른 시선을 허벅지 위로 뚝 떨어뜨리곤 괜히 노란 니트 소매만 늘려 손등을 덮었다. 권태정이 웃는 것을 볼 때마다 심장이 또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 번 완전히 녹아 형체가 없어져 본 적이 있는 마음이 두 번째 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처음부터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녹아내릴 수 있다는 걸 이겸은 알고 있었다.
“…어제 형들이랑 술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실장님이 데려다주신 건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혹시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실수한 거 없어. 넌 주사도 없더라. 조용히 잠만 자던데.”
“정말요? 제가 그렇게 기억 안 날 만큼 취해 본 게 처음이라서요.”
“정말 실수한 거 없어. 너무 얌전해서 다른 놈이 데려가려고 하는데도 모르는 게 좀 문제라면 문제지만.”
권태정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던 이겸이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에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고양이 탈 그게 너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재운다고 하는 걸 내가 뺏어 왔거든.”
“아…. 형도 놀랐을 거예요. 제가 갑자기 취해서…. 집이 어딘지도 모르거든요. 그리고 어제 그 형들은 둘 다 베타라 괜찮아요.”
“그래도 난 싫어.”
제법 단호한 권태정의 목소리에 순간 이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그 자리에서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좋다 싫다 할 자격 없단 건 아는데 그래도 앞으로는 그렇게 기억 안 날 만큼은 마시지 마. 많이 마시고 싶으면 나 불러. 내 앞에서 마셔. 아, 내가 제일 못 미덥나.”
숨을 쉬듯 웃은 권태정이 습관적으로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이겸의 뺨을 살짝 매만졌다. 갑자기 닿은 손길에 놀란 이겸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제야 제가 저도 모르게 이겸을 만졌다는 걸 깨달은 권태정이 얼른 손을 거두었다.
“아, 미안해.”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라서….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
굳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이겸은 또 노란 니트 소매를 늘리며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정말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니 말한 것뿐이라 생각하며.
도착한 곳은 처음으로 권태정과 같이 갔던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이었다. 이겸은 권태정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까지 올랐다. 60층에 다다랐을 때,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밖에 미리 나와 서 있던 직원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권태정에게 먼저 인사한 직원은 이겸을 향해서도 상냥한 말을 건넸다. 이겸은 저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직원에게 똑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 날이 너무 좋아서 채광이 유난히 좋은 방으로 준비해 봤습니다.”
직원을 따라 들어간 방은 정말 밝고 반짝였다. 햇살이 과하게 들어 눈이 부시거나 한 그런 밝음이 아니고, 정말 빛이 예쁘게 부서지며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현실감이 없었다.
“정말 채광이 좋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착석 도와드리겠습니다.”
의자를 빼내 앉는 것까지 도와준 직원이 테이블 한쪽에 놓인 구김 하나 없는 메뉴판을 들어 권태정의 앞에 하나, 그리고 이겸의 앞에 하나 차례로 놓아 주었다.
“물빛 코스면 좋을 것 같은데요. 메인은 채끝으로 바꿔 주시고, 추가 가능한 요리는 전부 추가 부탁드립니다.”
“네, 물빛 코스로 메인은 업그레이드, 추가 요리는 모두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믈리에 추천 와인 곁들이시겠습니까?”
“와인은 괜찮습니다.”
권태정의 말에 상냥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은 직원이 방을 나섰다. 이겸은 금세 조용해진 방 안에서 벽과 식탁을 물들인 예쁜 빛을 보다가 그 빛이 닿은 권태정을 몰래 바라보았다.
“…….”
몰래, 정말 몰래 조금만 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빛이 닿아 밝아진 얼굴과 투명해 보이는 짙은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며칠 동안 그토록 혼자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권태정의 얼굴을 내내 눈에 담았다.
식탁 위에 놓인 기다란 손가락과 손목에서 빛나는 시계, 빈틈없이 닫혀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와 울대뼈, 그리고 누구라도 한 번 보면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얼굴까지 꼼꼼히 눈에 담던 이겸은 눈이 마주치는 것에 놀라 얼른 시선을 내렸다.
“다 봤어?”
“…….”
“더 봐도 되는데.”
턱을 괴고 노골적으로 이겸을 본 권태정이 싱긋 웃었다. 대놓고 빤히 얼굴을 감상하다가 들킨 게 이제야 부끄러워 귀와 목덜미, 뺨이 화끈거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권태정이 새로 산 휴대폰을 설정해 줄 때 폰 화면이 아니라 권태정의 얼굴을 봤을 때, 그때도 권태정은 지금처럼 더 봐도 된다고, 이제 볼 만큼 본 거냐고 웃으며 말했었다.
“…….”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아니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권태정의 얼굴을 보며 멍해진 걸 세 보라고 하면 두 손이 부족할 정도니까. 이겸은 계속해 닿는 권태정의 말에도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겸아, 나 안 봐 줄 거야? 보고 싶은데. 나 좀 봐 줘.”
“…….”
“보고 싶었어, 정말.”
“…실장님은 저 보셨잖아요.”
“멀리서 봤잖아. 말도 못 걸고, 아는 척도 못 하고. 다른 새끼가 너 보고 웃는 것도 그냥 보고만 있고, 네가 웃는 것도 보기만 하고.”
이겸은 제가 언제 다른 사람을 보고 웃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특별한 건 기억이 나지 않고 그냥 카페에서 주문을 받거나 음료를 내줄 때 친절한 모습을 보이려 웃었던 것만 소소하게 떠올랐다.
“…손님한테 친절하게 보여야 하니까 웃은 거예요.”
“그거 말고. 어떤 새끼가 너한테 명함 줬잖아. 그때.”
명함이란 말에 잠시 또 생각하던 이겸이 그 순간을 떠올리고는 아…. 소리를 냈다. 알파 손님이었는데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물으며 이야기라도 해 보고 싶으니 괜찮으면 연락을 달라고 명함을 준 적이 있었다. 새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권태정과 할아버지의 생각으로 워낙 정신이 없을 때라 그냥 웃으면서 거절을 했었다.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며.
“…명함은 버렸어요.”
“연락 안 했어?”
“안 했어요.”
“번호 알려 주지도 않았고?”
“…네. 어차피 만날 생각도 없고, 얘기할 마음도 없는데 알려 줄 필요 없잖아요.”
턱을 괸 채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이겸을 물끄러미 보던 권태정이 팔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짐짓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다른 사람 만날 생각도 없고, 얘기할 마음도 없는 거.”
“…….”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어.”
목덜미와 귀 끝에서 느껴지던 홧홧함이 이제는 몸까지 내려와 여기저기가 뜨거웠다. 이겸은 열이 오른 손끝을 괜히 허벅지 위에 꾹 누르며 작게 목소리를 냈다.
“…실장님 때문… 맞아요….”
어떻게 아닐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다시 마주해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왜 속상하고, 왜 서운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리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젯밤이 너무 아쉬워서 자꾸만 어땠는지 묻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싶을 만큼…. 간절한데 어떻게 실장님이 이유가 아닐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이겸은 뒤에 더 하고 싶은 말을 혀끝으로 녹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저만큼 소리 내어 말한 것도 이겸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마음을 소리 낼 용기, 권태정과 눈을 맞출 용기, 그를 만나러 갈 때 그가 사 준 옷을 입을 수 있는 용기. 누군가가 보기에는 무척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이겸에게는 아니었다.
“내가 이기적이라 많이 서운하게 한 거 알아. 그땐 아는 척만 했었는데 지금은 진짜 알아. 알게 됐어.”
“…….”
“되돌릴 거야. 네가 다시 날 믿을 수 있도록.”
“…….”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네가 날 다시 바라보게 할 거야. 내가 아니면 안 되게.”
권태정을 바라볼 때면 늘 마음이 일렁였다. 꼭 마음에 바다가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간질이는 물결의 움직임을 느끼며 하늘을 물들인 낙조를 바라보다 보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지곤 했다.
이겸은 제 마음 안에서 일렁이는 잔잔한 물결 같기도 하고, 또 파도 같기도 한 권태정을 보며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언젠가부터 제 안에서 이는 파동의 모든 이유는 전부 다 권태정이었다.
“전에는 너랑 뭘 하고 싶은 건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 당장 눈앞엔 매일 네가 있고, 그냥 그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재밌고 좋아서 굳이 심각하고, 진지한 생각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
“그랬는데 거기부터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남은 시간이랑 그동안 같이 보낸 시간이 전부 진창에 처박히려는 걸 보는데…. 와, 씨발. 이건 아닌데 싶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이겸의 얼굴을 보며 며칠 내내 울기만 하던 그때를 떠올린 권태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겸이 울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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