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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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누구 하나 불러도 되지?”
“…누구요?”
아는 사람을 부른다는 말에 이겸은 경계했다. 혹시 그때 그 피어싱을 한 강지훈의 친구가 나오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아, 유재민.”
“아…. 재민이 형이요.”
다행히 그 친구가 아니라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꽤 자주 같이했던 유재민을 부른다는 것에 이겸은 안심했다. 강지훈과 유재민은 둘 다 베타라 크게 걱정할 게 없기도 하고, 워낙 자주 본 사이라 어색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 끝나고 온대. 근처에 있나 봐. 먼저 가자.”
“네….”
강지훈과 역 근처 치킨집으로 들어간 이겸은 큰 테이블에 앉아 치킨을 주문하는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치킨 두 마리와 생맥주 오백 두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맥주잔을 들어 이겸에게 내밀었다. 이겸은 가볍게 건배한 다음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시원하기는 하지만, 씁쓸하니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맞다. 야, 그때 그 존나 비싼 차 탄 사람 권태정 맞아. 내가 찾아봤는데 그 차 우리나라에 한 대 들어왔고, 그거 권태정이 샀대.”
“…아….”
권태정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크게 내키지 않아도 온 곳에서 권태정 이야기를 들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겸은 맥주의 쓴맛도 잊은 채 잔을 들고 한 모금씩 계속 넘기기만 했다.
“와씨, 그때 사진 찍자 그럴걸.”
“…….”
“그런 차 타고 다니면 기분 존나 째지겠다. 걔 그거 말고도 차 존나 많겠지?”
이겸은 그동안 제가 타고 본 권태정의 차들을 떠올렸다. 권태정의 집에는 아예 차 키가 쭉 놓인 진열장도 있었다. 멍하니 열 개도 넘게 놓여 있던 차 키를 떠올린 이겸이 축 가라앉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아, 그렇게 살면 존나 좋겠다. 돈도 존나 많고, 얼굴도 존나 잘생기고, 우성알파에 키도 개크던데. 뭐 성격이 지랄 맞긴 하다던데 뭐 그 정도야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
“…안 그래요…. 성격도 좋은….”
“어? 못 들었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도 모르게 권태정 편을 들려다가 놀란 이겸이 벌써 반이나 빈 맥주를 몇 모금 더 급히 마셨다. 하마터면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소리 낼 뻔한 걸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야, 근데 너 오늘 좀 받나 보다? 좀 달리네?”
“아….”
이겸은 어느새 반도 남지 않은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질 수 없다는 듯 벌컥벌컥 맥주를 마셔 비운 강지훈이 오백을 두 잔 더 주문했다.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했지만, 강지훈은 괜찮다면서 웃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가 가득 찬 컵이 다시 이겸의 앞으로 놓였다.
“마셔, 마셔. 뭐 어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술도 받는 날 마셔야 달다? 너 소주도 마셔 볼래? 섞는 게 진짜 맛있거든.”
“아니에요. 저 술 별로 마셔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러니까 이럴 때 맛이라도 봐야지. 여기 소주 하나 주세요! 오리지널로요.”
신난다는 듯 웃는 강지훈을 보며 이겸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냥 오지 말고 집에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지 몸이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세상이 흔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겸은 저에게 뭔가 말을 하는 강지훈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 내 말 안 들리지. 연이겸, 야야, 정신 좀 차려 봐.”
“정신….”
“그래, 정신. 아씨, 소맥 세 잔에 맛이 가냐? 뭘 웃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헤헤 웃는 이겸을 보며 강지훈이 유재민에게 부축하라는 듯 손짓했다.
“야, 그쪽 잡아.”
“아, 그러게 아까 내가 그만 먹이라고 했잖아.”
“이럴 줄 알았냐고. 아, 빨리 잡아.”
성질을 내는 강지훈을 보며 혀를 찬 유재민이 이겸의 왼쪽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무겁지는 않은데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자꾸 주저앉으려고 하는 걸 막는 게 쉽지가 않았다.
“야, 얘네 집 어딘지 알아?”
“아, 그… 내 친구네 집 근처인데.”
“병신아, 그게 아는 거냐? 모르는 거지?”
“내가 주소록이야 뭐야. 뭐 당연히 알고 있어야 돼?”
“모르면 술을 작작 먹였어야지. 아, 어쩔 건데.”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인 강지훈이 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이겸을 끌어안는 것처럼 붙잡았다.
“안 되겠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재워야겠어. 야, 택시 좀….”
얼른 택시를 잡으라고 도로를 가리키던 강지훈이 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권태정이었다.
“이리 줘.”
“…네?”
“이겸이 달라고.”
“아…….”
멍하니 권태정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강지훈은 저에게 기댄 이겸을 정말 빼앗아가듯 데려가는 권태정을 보며 눈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제가 취해서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기도 하고, 꾹 감았다가 뜨기도 했는데 분명히 전에 본 그 권태정이 맞았다. 혹시나 해서 옆을 보니 유재민도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권태정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저기! 이겸이랑 잘 아는 사이세요? 취한 애 그렇게 막 데리고 가시면!”
품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안기는 이겸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 부축한 권태정이 귀찮다는 듯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나 누군지 몰라?”
“…아, 아는데요.”
“내일 이겸이랑 연락 안 되면 나 신고해. 그럼 될 거 아냐.”
저를 멍하니 보는 두 시선을 무시한 권태정이 이겸의 머리칼을 쓸어 주고는 넘어지지 않게 잘 부축해 차로 데려갔다.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태운 다음 안전벨트를 채우고, 시트까지 뒤로 조금 젖혀 준 권태정이 차 문을 닫았다.
아직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차에 타기 전 흘끗 보니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저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애가 이렇게 취할 때까지 술을 먹인 놈들의 배라도 걷어차고 싶지만, 이겸에게 미움받을 짓은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운전석에 올랐다.
“…실장님….”
저를 부르는 소리가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 얼른 몸까지 조수석으로 비튼 권태정이 시트에 기댄 채 저를 보고 있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응, 이겸아. 괜찮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왜 이제… 오셨어요….”
취해서 말이 느리고 발음이 조금씩 뭉그러지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권태정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겸의 목소리와 마주한 채 아무 말도 잠시 하지 못했다.
“…기다렸는데에….”
잠이 잔뜩 묻은 눈이 감기며 이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권태정은 잠든 이겸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며칠 동안 이겸이 걱정되어 따라다니며 어디에서 일을 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는지 알파 새끼들이랑 트러블은 없는지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맞추며 닿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날 기다렸어?”
술에 취해서 그냥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권태정은 이겸의 말에 마음을 기대었다. 제가 닿고 싶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만큼 이겸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조금 더 이겸의 뺨을 매만지던 권태정이 떼고 싶지 않은 시선을 겨우 떼어 앞을 바라보며 핸들을 잡았다. 강제로 이렇게 떼지 않으면 조수석으로 아예 넘어가게 될 것만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은 권태정이 이겸이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제집으로 가서 편히 재우고 싶어 고민하던 권태정은 술에서 깬 이겸이 불편해할 것 같아 그냥 다람동 이겸의 집으로 향했다.
잠들어 제대로 설 수 없는 상태인 이겸을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까지 가는 동안 권태정은 참 기분이 좋았다. 이겸과 붙어 있을 수도 있고, 또 상상으로만 몇 번을 넘었던 문턱을 드디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문을 열자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가 보였다. 정리를 하고 나와 평평하게 펴진 요와 이불 위로 베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
이겸의 베개 옆에는 제 옷이 있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입고 잘 옷 한 벌은 두고 가야겠다고 전에 여기 놓고 간 옷이었다.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옷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이불을 걷고 이겸을 눕혔다. 옷을 편하게 갈아입히면 좋겠는데 지금의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겉에 걸친 얇은 남방과 양말 정도만 벗기고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으음….”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이겸이 손을 움직였다. 그걸 본 권태정이 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아래로 더 기울였다.
“어디 불편해? 물이라도 좀 마실래?”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연 권태정은 든 게 거의 없이 빈 안을 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냉장고 안에는 겨우 주스 몇 병과 초콜릿 박스, 그리고 물 두 병이 전부였다.
어떻게든 여기를 좀 더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권태정이 생수 병마개를 돌려 열었다. 그리고 컵에 반쯤 따르며 몸을 돌렸다.
“이겸아, 물 좀 마시고….”
고개를 든 권태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제 옷을 끌어안고 잠든 이겸이었다. 조금 전까지 베개 옆에 놓여 있던 옷이 어느새 이겸의 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좀 전에 손을 더듬은 것이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는 제스처가 아니라 제 옷을 찾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권태정은 양손에 물병과 컵을 든 채 한참이나 제 옷을 품에 꼭 안고 잠든 이겸을 바라보았다.
“…….”
안쓰러운 중에도 이겸이 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저를 기다렸다는 말이 술김에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권태정은 얼른 이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이겸이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며칠 나타나는 걸 자제했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제 옷을 끌어안고 지낸다는 걸 알았다면 외롭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도 제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냥 전화할걸. 다시 여기서 일하는 거냐고 카페에도 가고, 데려다준다고 수작도 부릴걸.”
배려한답시고 흘린 며칠의 시간이 아까워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권태정은 겨우 심호흡을 하고 이겸이 안고 있는 제 옷들을 당겨 가져왔다.
제가 입지 않고 한참이나 여기에만 있던 거라 이제 옷에서 페로몬 향이 거의 다 사라졌을 것이었다. 권태정은 옷을 안은 채 페로몬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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