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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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이 저를 용서하고 안 하고 정할 수 있듯이 구대범의 처분은 제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깡패 새끼니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낡은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던져 버릴까 생각하던 권태정이 제 이야기를 기다리는 백 비서를 보며 다리를 테이블 위로 올려 쭉 뻗었다.
“그게 거기서 다 까발렸어. 태성 아들을 물었으면 빚이라도 갚아 달라고 하라느니 막 온갖 지랄을 해 대는데, 씨발.”
“…최악이네.”
“어. 존나 최악이더라.”
“연이겸 씨가 너 깡패 아닌 거 다 알았겠네? 놀랐겠다.”
“놀라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래서 이겸이 집으로 온 거야. 내 집에서 나와서. 혼자 있겠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 비서가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권태정의 얼굴을 살폈다.
“너도 놀랐겠다. 넌 괜찮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괜찮아.”
“…….”
“집에서 나간다는데 상처받았어. 돈 돌려준다고 하는 말에도 상처받고, 이제 볼 일 없는 것처럼 말하는 거 들으면서도.”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듣는 것 같다?”
“진우야. 난 솔직히 상처받는 게 뭔지 몰랐거든? 여태까지 상처 같은 걸 받고 살 일이 없었잖아.”
권태정은 이겸이 저 때문에 내내 울던 것을 떠올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과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한 채 헐떡이는 장면이 머리에 맺히자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아, 그런데 상처받는 순간 딱 알겠더라. 아, 이거구나. 내가 이겸이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한 거구나.”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철거할 때까지 시간을 달랬더니 착해 빠져서 싫다고도 못 하더라.”
“그럼 일단 잘 해결된 거야?”
“그냥…. 날 일부러 피해 다니지는 않을 거래. 그게 어디야. 다행이지. 아직 철거하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어떻게든 되돌려야지.”
테이블에서 다리를 내린 권태정이 반듯하게 앉아 백 비서를 바라보았다.
“구대범한테 사람 하나 붙이자. 어디서 누굴 만나는지 어딜 다니는지 보고하라고 해. 내가 개지랄 떨어서 이겸이한테 화풀이할지도 몰라.”
“음, 알았어. 바로 붙일게.”
“밤에 경호원도 몇 명 입구에 붙이고. 베타로.”
“알았어.”
또 제가 뭘 해야 할지 생각하던 권태정이 소파 뒤로 몸을 푹 기댔다. 마음 같아서는 이겸의 일거수일투족도 감시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굳이 이겸의 사랑스러운 일상을 보이고 싶지 않아 관뒀다.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아예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 태정아. 목요일에 센터 예약해 뒀어.”
“센터는 왜?”
“러트 올 때 됐어.”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알았어.”
대충 고개를 끄덕인 권태정이 다시 이겸을 떠올렸다. 다시 일을 구한다는데 무슨 일을 구할지, 또 그 고양이한테 전화해서 인형 탈 쓰는 힘든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겸을 향한 짙은 걱정은 너무나도 쉽게 백 비서의 말을 뒤덮었다. 전혀 들은 적도 없는 것처럼 아주 깨끗이.
* * *
반나절을 멍하니 있던 이겸은 해가 지고 방 안이 어둠으로 뒤덮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울지 않으려고 참다가 한참을 또 울어 그런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도 대충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아 냉장고를 연 이겸은 권태정이 전에 사다 둔 오렌지 주스를 한 병 꺼내다가 그 안에 놓인 까만 상자를 바라보았다.
“…….”
이게 뭐지…. 납작한 상자를 꺼내서 연 이겸은 잠시 그 안에 든 예쁜 모양의 초콜릿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초콜릿이거든. 우리 누나가 좋아하는 건데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스트레스 받거나 힘들 때 이거 몇 개 먹으면 싹 다 풀린다고 하더라고.’
히트 사이클을 보내다가 같이 식사를 할 때 권태정이 저에게 보여 준 기억이 났다. 그땐 다시 정신없이 서로를 끌어안느라 이걸 보기만 하고 먹지는 못했던 것까지 떠올린 이겸이 먹기가 아까울 만큼 예쁜 초콜릿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
저를 보고 웃던 권태정을 떠올리며 초콜릿 하나를 집은 이겸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그새 조금 녹아 손끝에 묻은 초콜릿이 꼭 권태정을 보기만 해도 녹아 버리는 제 마음 같았다. 이겸은 입 안으로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울먹였다.
‘나 너 좋아하나 봐.’
어떡해…. 보고 싶어. 머릿속에 권태정이 가득 차는 것과 동시에 마음이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더는 울 힘도, 또 나올 눈물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권태정은 역시 제 예외인 모양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을 보면.
권태정이 없이 이제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보고 싶어지면 도대체 내일은 어떻게 버티고, 또 모레는 어떻게 버텨야 하나 싶었다.
“…….”
바닥에 놓인 초콜릿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이겸은 정신을 겨우 차리고 초콜릿 상자를 닫아 냉장고에 넣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밤새 이렇게 울기만 할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열자 기분 좋은 온도의 바람이 이겸의 젖은 얼굴을 스쳤다. 이겸은 그 문가에 앉아 머리를 문틀에 기댄 채 멍하니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같이 나갔었는데 결국, 다시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말한 한 달 반 뒤에는 또 저 혼자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었다.
“…….”
변두리 허름한 고시원의 창이 없는 방이나 달동네 단칸방 정도면 그래도 혼자 지내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차피 들어가 잠만 잘 테니 그보다 좋은 곳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창이 있으면 조금 더 좋지 않을까. 덜 답답하기는 할 텐데. 가만히 창이 없는 방을 떠올리던 이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이 있는 방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사치이고 욕심이었다. 언제 이렇게 분수를 모르게 되었을까.
“…….”
다시 제 위치를 똑바로 보고 주제 파악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또 권태정이 마음에 맺혔다. 제가 머리와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제 분수와 맞지 않는 존재였다.
저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서 감히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들었다. 그런데도 쉽게 마음 밖으로 밀어낼 수가 없어 더 아팠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겸이 젖은 뺨에 닿는 따뜻한 바람에 울먹였다.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데, 이제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또 권태정이 보고 싶었다.
얼굴에 닿는 따뜻함이 꼭 권태정의 손길 같아서. 언제라도 초록색 대문이 열리고 그가 저에게 다가올 것만 같아서. 그래서 이겸은 한참이나 문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주 조금도.
* * *
운전석을 뒤로 조금 젖힌 권태정이 몸을 기대었다. 너무 조용한 게 어색해 틀어 둔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사연이 이어졌다.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나친 적막함을 누르는 일은 확실하게 해냈다.
원래는 컨테이너에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온 곳은 이겸의 집이었다. 술에 취해 찾아온 저를 향해 이겸이 달려왔던 바로 그곳에 차를 세우고 밤을 지새울 준비를 했다.
솔직히 이 적막하고 치안이 좋지 않은 곳에 이겸을 혼자 두고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데 제가 뭘 믿고 집에 간단 말인가. 이겸이 저를 보고 다시 웃어 줄 때까지 이제 제집은 이 가로등 아래였다.
아까부터 전화를 해 보고 싶기도 하고, 찾아가서 혼자 있을 수 있는지 다시 묻고 싶기도 한데 괜히 제가 그 마음을 들쑤시는 게 될 것 같아 가까스로 참는 중이었다. 그래도 며칠 정도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맞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권태정은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며 인기척 하나 없는 창밖으로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금방이라도 이겸이 골목에서 나와 저에게 올 것만 같았다.
“하….”
솔직히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마음도 여리고, 몸도 아직 괜찮지 않은 애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굳이 묻지 않아도, 또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어 더 그랬다.
흔적들은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도 또 저도 그 집에 없다는 것에 이겸은 아주 많이 외롭고 아플 것이었다. 혼자 또 많이 울다가 쓰러지면 어쩌지. 아니 이미 쓰러져 있는 거 아니야? 권태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
문을 두드리려고 손까지 들었지만, 혹시 자고 있는 이겸을 제가 깨우게 될까 봐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권태정은 한숨을 내쉬며 문 맞은편 벽돌 더미에 주저앉았다. 골목 어귀도 이겸과는 너무나 멀었다. 그리고 여기도 멀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이겸과 함께 있고 싶었다.
팔베개를 해 주면 제가 힘들까 봐 걱정하고, 마주 보게 되는 게 부끄러워 귀가 빨개지는 이겸이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입술을 머금으면 제 옷자락을 쥐고, 따뜻한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면 완전히 품에 갇히는 이겸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씨발,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깡패 새끼로 태어나지. 그럼 이겸이가 그렇게 울지는 않았을 텐데. 구두로 괜히 모래를 문지른 권태정이 허물어진 담벼락에 머리를 기댄 채 굳게 닫힌 야속한 대문에 눈을 맞췄다.
저 문이 열리고 이겸이 저에게 달려올 것만 같아서. 그래서 권태정은 새벽이 깊어지도록 조금도 대문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 저에게 올지도 모를 이겸을 기다리며.
* * *
아르바이트할 곳을 알아보던 이겸은 제가 그만둔 카페에서 월, 화, 수 사흘 동안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다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평일 전부도 아니고, 사흘만 그것도 오후 타임에 일을 해야 하는 게 애매해 일할 사람이 구해지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이겸이 다시 와서 다행이라며 기뻐하는 사장님을 보며 이겸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하던 카페 자리를 찾은 다음에는 강지훈에게 연락해 다시 일을 할 수 있다고 알렸다. 강지훈은 크게 반가워하며 이겸에게 이것저것 일을 소개해 주었다.
예전에 하던 것처럼 대부분 새로 오픈한 가게의 오픈 행사를 돕는 일이나 동네 예식장 아르바이트, 하객 아르바이트 같은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겸은 좋았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에는 권태정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 존나 배고프다. 야,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맥주 존나 마시고 싶어.”
원래라면 그냥 집에 간다고 했겠지만, 요 며칠 일찍 집에 가서 밤새 할아버지와 권태정 생각만 하며 잠들 수 없는 경험을 한 이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고 들어가 쓰러지듯 잠드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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