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82화 (82/174)

#82

“책임이란 말은 널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어서 한 말이야. 지금보다 더 좋은 집에서, 더 많이 누리면서 살게 해 주고 싶었어. 그렇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의 책임엔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어.”

제가 간절히 기대고 매달리고 싶던 것이 뭔지 권태정은 알지 못했다. 이겸은 기어이 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울었다. 마음을 잔뜩 채운 감정이 울컥울컥 넘쳐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겸아.”

서럽게 우는 이겸을 보며 권태정은 이름만 겨우 몇 번 부를 뿐 그 어떤 말도 더 잇지 못한 채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솔직한 말이, 마음이 자꾸만 이겸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흐윽, 제가 바란 건…. 좋은 집도, 뭔가를 더… 누리는 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저 같은 사람을…. 실장님처럼 좋은 분이… 좋은 분이 저를…. 좋아해 주시는 게 너무 좋아서….”

“…….”

“같이…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저는 실장님만… 정말 실장님만 있으면 다 괜찮았는데….”

울음이 잔뜩 묻은 이겸의 말을 들은 뒤에야 권태정은 제가 이겸을 아주 많이 서운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깡패가 아니라 재벌이라는 걸 알면 싫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부터 잘못되었다는 것도.

“이겸아, 나는….”

“…제가 속상한 건…. 제가 믿고 좋아한 실장님이… 이제 더는 없다는 거예요.”

“…….”

“실장님께서는… 달라진 게 없다고 하셨지만, 전…. 아니에요. 너무 많이…. 아니, 모든 게 다 달라진 것 같아요.”

“…….”

“…안녕히 가세요.”

손으로 뺨과 눈가를 문질러 닦은 이겸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권태정은 멍하니 차에서 멀어지는 이겸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에서 내려 달려가 대문 앞을 막아섰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겸을 보는 게 너무나 괴롭고 아팠다.

“미안해.”

“…….”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고 너한테 말하는 그 순간에도 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직업 정도 바뀐 거라고…. 그냥 또 그렇게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거야.”

“…….”

“미안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말 듣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단 걸. 그리고 내가 말하는 그 책임이 널 오히려 네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제 마음이 너무 앞서 있었다는 걸 이제야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겸을 편하게,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생각에 정작 이겸의 마음은 살피지 못하고 제 마음만 멋대로 퍼부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사랑의 의미로 말한 ‘책임’이 이겸을 더욱 작아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랐던 걸까. 권태정은 진심으로 제가 한심했다.

“내가 누군지 말할 기회를 줘.”

“…….”

“부탁이야.”

권태정을 피해 대문으로 다가가려던 이겸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요해진 골목에 고인 따뜻한 바람이 젖은 뺨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불어왔다. 이겸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을 들으려 기다려 주는 것에 안도한 권태정이 머릿속에 맺힌 것들을 소리 냈다.

“이름은 권태정, 서른둘. 태성그룹에서 나왔어. 구대범이 말한 것처럼 태성 회장 아들이고, 회사에서 직함이 실장이었어. 지금은 사고 쳐서 잘렸지만. 여긴 사건 사고 없이 철거만 무사히 진행되면 다시 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온 거고.”

진중한 목소리가 골목 안으로 울렸다. 이겸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시선은 무척 진지하고, 곧았다. 아주 조금의 여유나 장난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철거촌의 악몽이라는 그 방송 나가면서 난리 났었잖아. 용역들 싹 쫓겨나고 공사도 중단되고. 겨우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철거일 잡아 놨는데 방송국에서 또 철거촌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거야. 그 중심에 네가 있단 걸 알게 됐고, 석 달 동안 네가 허튼짓 못 하게 하는 게 내 일이었어.”

권태정은 천천히 하나씩 이겸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처음부터, 아니, 적어도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소리 냈으면 더 좋았을 것들을.

“처음에는 전부 다 기억했거든.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뭘 하러 왔는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널 만나는 이유가 달라졌어. 너한테 접근한 이유도 잊고, 왜 너랑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다 잊었어.”

“…….”

“그럴 정도로 너랑 보내는 시간이 좋았어. 석 달이 지나지 않기를 바랄 만큼. 회사도, 내 자리도 다 잊고 너만 보였어.”

“…….”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남은 시간, 한 달 반 동안만이라도 만나 줘. 그 마지막 날 물었을 때 네가 싫다고 하면 그땐 더 괴롭히지 않을게.”

이겸은 제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권태정이 저를 속이고 놀려 왔다는 걸 알았을 때도 매몰차지 못했던 마음이 지금이라고 완전히 돌아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부러 안 만나려고… 피하지는 않을게요.”

한참 뒤에 나온 이겸의 대답에 권태정은 무너지듯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숙여 두 손으로 꺾인 무릎을 짚었다.

안 그래도 상처받은 애한테 더 강한 협박을 해서 기어이 씨발놈까지 되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에 나온 이겸의 대답에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서 힘이 다 빠졌다.

“그거면 돼. 고마워.”

“…그, 그 말이…. 실장님을 다시 믿고, 또…. 계속… 좋아…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더듬지 않고, 또 떨지 않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또 바보처럼 더듬어 버려 창피했다. 이겸은 얼굴과 귓가, 목덜미로 몰린 홧홧함이 곤란했다. 빨개진 걸 권태정이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도망가 숨고 싶었다.

“마음 바라면 안 되는 거 알아.”

“…….”

“그래도 노력해서 네 마음 다시 가져 보려고.”

“…….”

“네가 다시 날 보고 웃었으면 좋겠어.”

이겸은 어쩔 줄을 모른 채 손만 만지작댔다. 점점 귓가가 더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을 더 보이고 싶지 않아 뒤돌아 대문 아래에 있는 비상 열쇠를 집어 든 이겸이 슬쩍 몸을 돌려 권태정의 팔에 눈을 맞췄다.

“…그럼 전… 이제 들어갈게요.”

“응.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냥 하는 말 아냐.”

“…안녕히 가세요.”

여전히 저에게 닿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이겸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 문을 열었다. 한동안 열지 않았던 대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겸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잠갔다.

“…….”

곧 밖에서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대문에 기대선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같이 있지 않겠다고 한 것도 저고, 가라고 한 것도 저인데 멀어지는 발소리가 마음이 아파 바보처럼 눈물이 났다.

“…….”

눈가를 문질러 닦은 이겸은 대문에 기댄 채 제가 평생을 지낸 너무나도 익숙한 집을 바라보았다. 여기로 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귀소 본능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편안함 대신 마음을 가득 채우는 허전함에 마음이 아팠다.

이 집에는 이제 저 하나만 남았고, 돌아올 사람도 없었다. 이겸은 할아버지도 없고, 권태정도 없는 방을 한참이나 대문에 기대어 서서 바라만 보다가 겨우 걸음을 떼었다.

수도 없이 열었던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텅 빈 방이 나타났다. 늘 할아버지의 이부자리가 있던 곳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 이겸은 권태정과 제가 함께 몸을 붙이고 잤던 방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

방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벽걸이 TV, 좋은 이불 그리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두고 가자고 해서 제 옷 위에 잘 개어 올려 두었던 권태정의 옷을 보는 순간 물기에 젖은 숨이 입 안에 맺혀 떨렸다.

더는 울고 싶지 않았다. 제가 계속 울면 할아버지가 편히 지내시지 못할 것만 같아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울면 마음이 자꾸 약해져 권태정이 떠오르는 것도 곤란했다.

눈물을 참고 심호흡을 한 이겸이 용기를 내어 아무도 없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벽에 기대고 앉아 할아버지가 누워 계시던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

이 방 안에만 계속 있다가는 매일 아주 긴 하루를 보내며 슬픔에 잠식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일, 일을 다시 해야 했다. 카페 일이든, 토끼 탈을 쓰는 일이든 상관없었다.

빚 갚을 생각만 하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슬픔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도 무뎌지게 될 것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네가 다시 날 보고 웃었으면 좋겠어.’

……없으니까.

* * *

얼굴이 조금 더 말라 한층 더 예민해 보이는 권태정을 본 백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앉았다. 집이 아니라 컨테이너에 있다고 해서 놀라 달려와 본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태정아, 너 여기서 뭐 해? 왜 나왔어.”

“이겸이가 집에 간대서.”

“연이겸 씨가? 아…. 할아버님 물건 정리하러?”

“뭐 그런 것도 있고. 음, 아…. 넌 모르겠구나. 그때 집에 잠깐 갔었지. 대단한 걸 놓쳤네, 백진우.”

소파 뒤로 몸을 기대는 권태정을 보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한 백진우가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 집에 가고 나서 이겸이 밥 먹이고, 내가 상조회사 분들 다 보냈거든. 아침에 다시 오시라고.”

“어.”

“빈소에 나랑 이겸이 둘이 있는데 구대범이 왔었어.”

“뭐? 구대범이 거길 어떻게 알고? 아니, 거길 왜 와?”

“이겸이 폰 바꿔 줬잖아. 카페도 관두고. 집까지 옮겨서 연락이 안 되니까 눈깔이 돌아서 왔더라고.”

덤덤히 말하지만, 권태정의 머릿속은 결코 덤덤하지 않았다. 물론 시작은 저를 깡패로 오해한 이겸이 귀여워 계속 오해하게 놔둔 저의 잘못이지만, 그걸 그 자리에서 그딴 식으로 떠든 구대범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제 잘못은 제 잘못이고 구대범의 잘못은 구대범의 잘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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