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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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 본 적 없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란 거 알아. 기만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런 꼴이 됐어. 미안하게 생각해. 아니, 이렇게 쉽게 미안하다고 하는 자체도 너한테 진정성 없게 들릴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이겸아. 난 네 마음 우습게 생각한 적 없어.”
이겸의 반응을 보며, 이겸이 오해한 대로 제가 저를 깡패라 칭하며 놀릴 때마다 그 반응이 귀엽고, 예쁘기는 했지만, 결코 우스웠던 적은 없었다. 깡패는 싫다던 이겸이 그래도 저에게는 예외의 마음을 보이며 다가오는 게 사랑스러웠고, 좋았다.
“일단은 그것부터 좀 먹자. 괜히 내가 또 말 시작하면 못 먹을 거 아냐. 불편하게 안 하고 밖에 있을게. 천천히 먹고 다 먹으면 불러 줘.”
“…….”
“울지 말고. 그러다 열 다시 오르면 큰일이잖아.”
얼굴에 닿았다가 이내 아래로 힘없이 떨어지는 시선이 안타까웠다. 권태정은 이겸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보복 운전으로 뉴스에 나왔을 때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 마음 안으로 스멀스멀 퍼졌다. 아니, 아예 태어나서 32년을 살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이겸의 마음을 풀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제대로 듣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제가 실장님 좋아하는 거… 좋아하게 된 거…. 다 아셨으면서….’
소파에 앉은 권태정은 계속 반복해 이겸의 말을 떠올렸다. 상황이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이겸이 솔직하게 말한 마음이었다.
이겸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눈만 마주쳐도 여기저기가 빨개지는 것을 보면서 이겸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제 손길에 조금 더 닿고 싶은 것처럼 다가오고, 입술을 머금을 때마다 달아오른 숨으로 어설프게나마 혀를 비비던 이겸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그래서, 제가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더 문제였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대가리가 맛이 가고, 눈치가 없어서 전혀 몰랐더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이겸을 속여 온 것이었다. 권태정은 밀려드는 자괴심에 무너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제가 혹시 위험한 일을 할까 봐 걱정하는 이겸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저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변명을 해서는 안 되는 새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이겸을 놓칠 수는 없었다. 저는 여전히 이겸을 좋아하고, 이겸도 아직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다. 제 모든 것을 다 태워서라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한 생각 사이로 발소리가 들렸다. 권태정은 트레이를 들고 방에서 나오는 이겸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지.”
“…이제 괜찮아요.”
죽은 얼마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기는 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약을 담아 준 통도 비어 있는 것을 본 권태정이 트레이를 받아 식탁에 놓고 이겸을 바라보았다.
“지금 갈 거야?”
“…네.”
“옷부터 갈아입어.”
“짐은….”
“내가 챙겨서 따로 가져다줄게. 아니면 지금 챙겨서 저녁에 가도 되고.”
“…짐 부탁드릴게요.”
그 말이 꼭 여기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렸다. 권태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확인한 다음에야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이겸을 보며 낮게 숨을 내쉰 권태정이 침음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 * *
집으로 가는 차 안은 고요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또 뻔뻔하게 굴려면 얼마든지 굴 수도 있지만, 안 그래도 저에게 실망하고 충격을 받았을 이겸에게 만회를 해도 모자랄 판에 굳이 미움을 더 살 필요는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 십 분이면 철거촌에 도착할 것이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이겸이 뒤도 안 보고 내려 들어가 버리면 정말 말 한마디 할 시간도 벌지 못할 것이었다. 권태정은 운전하며 흘끗 이겸의 눈치를 살폈다.
“혼자 지내는 거 정말 괜찮겠어?”
“…네. 지내다 보면 적응될 거예요.”
“무서우면 언제든 말해. 바로 갈게.”
“…….”
예전처럼 아주 작은 대답이라도 매달리지 않는 게 속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가 대답하지 않아도 난 네가 위험한지 아닌지 계속 살필 거라고, 신경 안 끌 거라고, 네 옆에서 떨어질 생각 없다고 속으로 말한 권태정이 큰길에서 우회전해 다람동으로 가는 마지막 큰길로 들어갔다. 이제 오 분이면 이겸의 그 골목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오 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났다. 권태정은 간만에 오는 철거촌으로 들어가 오늘따라 더 짜증 나게 보이는 빨간 컨테이너를 지났다. 낮이라 불이 꺼진 익숙한 가로등 아래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자 조수석에서 안전벨트 푸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그 작은 소리에 권태정의 온 신경이 몰렸다. 못다 한 이야기를 지금이라도 좀 하자고 해야 할지 아니면 변명을 조금 더 들어 달라고 하며 잡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저…. 아르바이트 다시 시작할 거예요.”
막막한 적요 속에서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이겸이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권태정은 이겸이 저에게 먼저 말을 해 줬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돈은 남은 것부터 일단 돌려드릴게요.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엄밀히 말하면 그 돈은 우리가 한 계약의 대가야. 내가 돈으로 네 시간을 산 거니까 돌려줄 필요 없어. 나한테 돌려준다고 할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같이 있어 준 값을 마저 지불하라고 해야지.”
“…….”
“난 널 협박해서 강제로 네 시간을 돈으로 샀고, 넌 얼결에 나한테 끌려다니다가 그 대가를 받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그건 돌려줄 필요 없어. 네가 그걸 나한테 줘도 난…. 네 시간을 돌려줄 수 없으니까.”
협박해서, 강제로, 얼결에, 끌려다니다가. 권태정이 한 말을 듣던 이겸이 가슴에 콱 박히는 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협박으로 듣지도 않았고, 또 강제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아팠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권태정과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따뜻했다.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상냥하게 대해 주나 이상할 만큼. 그리고 그 생각을 넘어 좋아하게 될 정도로.
“아르바이트 다시 하고 싶으면 해.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돼. 날 원망해도 좋고, 미워해도 돼. 욕해도 되고, 때려도 돼.”
“…….”
“대신 하나만.”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겸이 제 말을 들어줄 마지막 기회. 권태정은 마지막 말에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눈동자 안에 고인 감정은 다정했던 얼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한 달 반 만났어. 철거촌 주민이랑 깡패로. 물론 그 안엔 네 오해도 있고, 내 거짓말도 있어. 쉽게 잊을 수 없는 것도 있고.”
이겸은 권태정과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장면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모든 의미가 되어 버렸을까. 이겸은 울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한텐 아직 한 달 반이 남았어.”
“…….”
“여기 무너질 때까지 놀자고 했잖아. 그 석 달 중에서 절반 정도 남았는데…. 피하지 말고 나 만나 줘.”
만나 달라는 권태정의 말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농담일 거라고, 또 저를 놀리는 거라고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가 없게 말은 무겁고, 권태정은 무척 진지했다.
“…만나도 불편할 거예요. 실장님도… 저도….”
“응. 당연히 며칠 전처럼 편하게 지내긴 힘들 거야, 알아. 내가 한 짓이 있는데. 그래도 다시 그렇게 만들 거야. 나한텐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내가 널 좋아하고, 네가 날 좋아하게 됐던 딱 그만큼의 시간이 있잖아.”
“…….”
“피하지만 마. 내가 정말 싫어진 게 아니라면.”
싫어졌다고,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하면 다 끝날 일이라는 것을 이겸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말 하나로 정말 관계가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면 화를 내기라도 했을 텐데 너무나도 잘 알아서 이겸은 싫어졌다는 말도, 남은 한 달 반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는 말도 소리 낼 수 없었다. 정말 여기에서 권태정과의 모든 시간이 다 끝날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이었다.
“네가 싫다고 하면 그땐 정말 협박할 거야. 애초에 우리가 약속한 시간은 석 달이었으니까. 내가 좋든 싫든 약속은 지키라고.”
조금 뻔뻔하게 말한 권태정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여 눈에 불만이 조금 차오른 이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안일했어. 깡패는 안 좋아할 거라는 네 말 들으면서 난 깡패 아니니까 됐다고 생각했거든.”
“…….”
“내가 누군지 알면 네가 안도할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깡패가 아니니까. 그냥 해프닝 정도로 지나갈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
“…….”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알던 내가 그냥 깡패가 아니게 됐을 뿐이야. 난 널 여전히 좋아하고, 또 책임질 거야.”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왜 저에게 누구인지 솔직히 말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아직 해결된 게 없어서 그랬다고 말하던 권태정이 떠올랐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권태정이 생각하고 있는 게 다른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서로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달라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다.
“…달라진 거 있어요.”
“…….”
“…저는… 실장님이 깡패여서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매일 생각했어요. 그 생각을 하면서도 실장님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그만큼 믿었으니까요.”
“…….”
“그런데 이제 전 실장님 진짜 누구신지도 잘 모르겠고…. 실장님이 말씀하시는 그 책임이라는 말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더 고일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마음에 가득 차 일렁였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흔들리던 감정은 이미 흠뻑 젖어 본 적이 있는 눈동자를 택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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