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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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좀 자고 다시 하자. 이러다 큰일 나. 우니까 열나잖아.”
미열이 오른 이겸의 이마와 뺨에 손을 댄 권태정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보며 침음했다. 이런 식으로 이겸이 알게 될 줄은 몰랐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큰 슬픔이 있는 날, 그것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엄청난 것을 알게 된 이겸의 마음을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가세요, 실장님….”
“우리 아직 얘기 다 안 했어. 그리고 넌 지금 아프고.”
“…….”
“그런데 널 혼자 두고 가라고? 나 네 보호자야. 혼자 두고 안 가.”
“…실장님이 왜 제 보호자예요?”
“그게 싫으면 네가 널 보호해.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면 그때 나랑 다시 얘기하고. 그때까진 내가 네 보호자야.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훌쩍인 이겸이 권태정에게서 등을 돌려 벽을 보고 누웠다. 이겸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준 권태정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작게 떨리는 마른 어깨를 바라보았다.
“날 싫어해도 좋고, 욕해도 돼. 화내고 때려도 돼. 숨긴 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
“나한테는 다 해도 되는데 자책은 하지 마. 넌 잘못 없어.”
“…….”
“나까지 힘들게 해서… 미안해.”
권태정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싫고 벅찼다. 이겸은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밖에 있을게. 이런 일 벌여 놓고 편히 자라는 말하는 것도 염치없는 거 알아. 그래도 너만 생각해. 내일 발인이라 종일 힘들 거야. 지금 이런 상태로는 버티기 힘들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쉬어. 널 위해서.”
여전히 다정하지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니 감정이 울컥울컥 넘쳤다. 이겸은 권태정이 방에서 나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 안에서 작게 소리 내어 울었다. 정말 혼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가 떠난 날, 마음을 다 기대어 버린 권태정의 진심까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겸은 모든 게 너무 무섭기만 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제가 혼자 바로 설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혼자 지내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하고 불안했다.
“…….”
그중 가장 두려운 것은 권태정의 진심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또 저를 보며 웃어 준 것도 전부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 낸 마음일까 봐 겁이 나 숨이 막혔다.
그래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연극은 모두 끝났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으니 더는 볼 일이 없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 피하고 싶었다.
가라고 했지만, 가지 않기를 바랐고, 그가 저의 보호자라 말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완전히 권태정을 향해 기울어진 마음을 다시 들어 올릴 방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무거운 마음을 제자리로 돌릴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떡해. 이겸아. 나 너 좋아하나 봐.’
마음이 내려앉던 순간의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겸은 권태정이 저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전부 거짓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권태정이 저에게 보인 마음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눈물에 흠뻑 젖은 눈동자는 그간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매끄럽게 빛나다가 이내 그 순간의 감정을 모아 밀어냈다. 내내 우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권태정은 조금도 마음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게 너무 이상하고, 한심하면서도….
“…….”
다행이었다.
* * *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이겸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이겸이 잠들고 한참이 지나 새벽이 되었을 때에야 권태정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 잠든 이겸을 살폈다.
많이 울어 짓무르듯 붉어진 눈가가 안쓰럽고, 며칠 사이에 더 말라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권태정은 벽을 보고 누운 채 지쳐 잠든 이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머리를 만져 주고 싶기도 하고, 달래듯 뺨을 쓸어 주고 싶기도 하지만, 지금 이겸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먹은 거라곤 겨우 국에 밥을 말아 먹은 몇 숟가락이 전부고, 또 믹스 커피 한두 모금이 전부였다. 그런 상태로 잠까지 더 못 자면 정말 큰일이 날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실장님도 더는 안 오셔도 돼요.’
더는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겸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었다. 그런 말이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만 한 것과 실제로 들은 것은 너무나 달랐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이 일을 해결하고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겸의 말을 들은 뒤에는 이겸이 최대한 상처를 덜 받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저의 상황이나 해명, 억울함, 진심 같은 것은 나중의 일이고, 일단은 이겸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제가 기만했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목적이 분명했고, 그 목적을 이루고자 다가간 것도 명백한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겨 버린 진심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불쑥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누군가를 웃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저를 보며 옅은 미소만 지어도 기분이 좋아지고 종일 그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말로 용서받을 수도 없고, 제가 한 일을 정당화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감정은 정말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그 이상의 감정을 머금고, 동정에 가깝던 감정이 조금 더 사적인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하며 처음의 계획이 모두 틀어져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이겸과 ‘왜’ 만나는지에 대한 것도 잊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나는 게 전부지 거기에 공적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론적으로 제가 이겸에게 접근한 이유는 방송을 막기 위해서가 맞고, 또 태성그룹의 막내아들이라는 걸 숨긴 것도 맞으니까.
“…….”
흘러내린 이불을 어깨 위까지 올려 준 권태정이 고요하다 못해 쓸쓸하게 느껴지는 방 안으로 흐르는 이겸의 숨소리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또 관계를 명명하진 않았지만, 연인과 다름이 없이 입을 맞추고, 또 체온을 마주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그게 전부 꿈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권태정은 그 어떤 아쉬움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꿈처럼 예쁘고, 깨지기 쉬운 부드러운 순간을 깬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기에.
그래서 권태정은 그저 가만히 고요 속에서 혹시 끊길까 싶어 두려운 마음으로 연약하게 이어지는 이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는 새벽이 지나 야속한 아침이 올 때까지. 아주 한참이나.
* * *
발인은 권태정과 백 비서, 그리고 간병인만 참석해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겸과 고인을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 함께 화장터에서 봉안당까지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백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권태정은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 만큼 지친 이겸을 부축해 현관을 들어섰다.
“…저 집에 갈게요, 이제.”
“…….”
“방송 안 하기로 약속드렸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이제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들이 입술까지 닿았지만, 권태정은 그 말들이 전부 힘든 이겸을 더욱 무겁게 짓누를 것이라는 걸 알기에 소리 내지 않았다. 지금은 이겸이 더 상처받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집에 가서 뭘 어쩌려고 그래. 내가 거기 있게 해 줄 것도 아니잖아. 거기 같이 있어도 된다고 하면 가고.”
“…혼자 있고 싶어요.”
“알아. 마음 아는데 사흘만이라도 여기서 쉬다가 가. 어제 말한 것처럼 네가 널 보호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해서.”
“…보내 주세요.”
이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종일 너무 많이 울어 이제는 울 기력이 없었다.
“그럼 하루라도 여기 있어. 씻고 푹 자, 그리고 일어나서 저녁 먹고 또 자.”
“…….”
“그런 다음에 내일 일어나서 또 밥 같이 먹고 그다음에 가. 데려다줄게.”
권태정에게 더 강력히 집으로 가겠다고 주장을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겸은 포기한 채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새 익숙해진 손길로 갈아입을 속옷과 편한 옷을 꺼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네.”
“옆에 있으면 안 될까. 욕실에서 넘어지면 큰일인데.”
“…괜찮아요.”
욕실로 들어가는 이겸을 본 권태정이 작게 한숨지었다. 그리고 욕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못한 곳에서 혹시라도 큰 소리가 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나도록 이겸은 나오지 않았다. 권태정은 초조한 듯 욕실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장 샤워실에서 씻는 게 편치 않아 집에서 더 꼼꼼히 씻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오십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고 조용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결국, 한 시간을 찍었을 때 권태정은 욕실 문을 노크했다. 두 번, 네 번, 여섯 번. 열 번을 노크해도 아무 답도 없어 문을 열었을 때 권태정은 샤워부스 안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은 이겸을 마주했다.
“…씨발.”
놀라서 들어간 권태정은 위에서 계속 쏟아지는 물을 껐다. 뜨거운 물 때문에 온도가 높아지자 어지러워 쓰러진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넘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권태정은 혹시 다친 곳이 있나 먼저 살피고 이겸을 커다란 수건으로 싸서 안아 들었다.
“이겸아.”
침대에 눕히고 추울까 싶어 이불까지 덮어 준 권태정이 부드럽게 이겸의 뺨을 쥐었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만져도 죽은 듯 축 늘어진 얼굴을 볼 때마다 불쑥 겁이 밀려들었다.
“이겸아. 내 말 들려?”
계속 말을 걸어도 이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권태정은 창백해진 이겸을 보다가 휴대폰을 찾아 조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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