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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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진 구대범이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났다. 권태정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집안에서 입지가 그리 좋지 않은 저와 달리 권태정은 그야말로 로열패밀리의 일원이었다. 저 하나 죽인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로열 캐피털 날아가는 건 그렇다고 쳐도 대국물산까지 흔들리면 저는 집안에서 완전히 끝이었다. 어떻게든 대국물산 회장인 작은아버지 귀에는 이 일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지금은 입을 다물고 권태정의 발밑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쟤 팰 데가 어디 있다고 패. 아니야, 나 안 때렸다? 그냥 내 습관이야, 습관.”
“믿으라고?”
“야, 태정아…. 진짜야. 그리고 오늘은 내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너도 알잖아. 빚 몇억이나 있는데 연락은 안 되고 하면 빌려준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당하고, 화도 나지. 응? 이해하지?”
“그래서 할아버지 돌아가신 데까지 와서 고인 모독에 이 난리를 쳤다고? 못 배우면 원래 이래? 여기까지 수준이 떨어지나?”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는 권태정의 눈치를 슬슬 보며 물러날 곳도 없는 뒤로 몸을 빼 벽에 기댄 구대범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내가 너 진지한 마음인 거 알았으면 이러지도 않았지. 너한텐 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인데…. 미안하다, 응? 작은아버지한테는 좀 비밀로 해 주라. 작은아버지 아시면 우리 다 쫓겨나.”
“사과해, 이겸이한테.”
그것만은 하기 싫었는지 인상을 쓰던 구대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음을 먹은 듯 표정을 풀고 권태정의 뒤에서 넋이 반쯤 나가 서 있는 이겸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건 아닌데.”
이겸은 멍하니 저를 보고 있는 구대범을 바라보았다. 입을 벙긋대기는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표정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구대범은 지금 이겸에게 전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멍한 정신과 함께 빈소가 통째로 이리저리 기울고, 발밑이 확 꺼지며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순간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재벌 아들? 태성가 막내아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말이라 재벌 아들이 뭔지 순간 머릿속에 잘 맺히지도 않았다.
재벌…. 재벌이 뭐더라. 이겸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계속 입을 벙긋대는 구대범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와 함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무너지듯 꺾이는 순간 권태정의 팔이 다가와 몸을 감싸 안았다.
“이겸아.”
“…….”
최악의 상황을 만든 구대범은 슬슬 권태정의 눈치를 보며 뒤로 한두 걸음 도망가며 입을 열었다.
“무튼… 마음 잘 추스르고….”
씨발, 추스르는 거 좋아하네. 미친 새끼가 판 다 깨 놓고. 권태정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구대범을 보다가 품에 있는 이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모든 상황의 수습은 다 저의 몫이었다.
“설명할게.”
“…정말이에요? 정말 실장님이 태성….”
너무 갑작스러워 정말 재벌 아들이냐고, 그 유명한 태성그룹의 아들이 맞냐고 차마 물을 수조차 없었다.
“다 설명할 수 있어.”
“…무슨 설명이요?”
“왜 내가 누군지 얘기 안 했냐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
“…사채업자 아저씨가 말 안 했으면 지금도 저한테 말씀 안 하셨을 거잖아요….”
고개를 저은 이겸이 권태정을 밀어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권태정은 저에게서 멀어지는 이겸을 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계속 숨기셨을 거잖아요….”
떨림이 묻은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권태정은 멀어진 이겸을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이겸은 그런 권태정과 거리를 벌리며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다시 처음만큼의 거리가 벌어진 채 시선이 마주했다.
“…재벌 아들이라고 하면…. 제가 달라붙기라도 할까 봐 그러신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네가 날 깡패로 오해했을 때 아니라고 해야 했는데 그땐…. 그땐 그냥 석 달만 있다가 철거되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고, 널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도 몰랐어. 그래서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오해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럼 그다음에는 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깡패는 싫다고 하는 게 귀엽기도 했고, 그럼에도 저에게 기우는 이겸을 보는 게 좋았다. 언젠가 밝히더라도 그렇게 싫어하는 깡패가 아니라는 걸 알면 이겸이 오히려 마음을 놓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안일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의 해결, 그러니까 철거가 돼야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말할 순간을 뒤로 미뤘다.
허물어져야만 하는 곳이 허물어지는 그 순간, 저는 책임과 사랑을 다해 이겸과 마주할 거고, 바로 그 순간이 모든 것을 말할 적기일 테니까. 그리고 이제 그 적기까지는 겨우 한 달 반이 남아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으니까.”
“…해결이요?”
“그래, 해결. 아직 철거가 안 됐잖아.”
“…실장님이 해결하셔야 할 일이… 결국은 철거라는 거예요?”
이겸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권태정은 다시 성큼 앞으로 다가가며 이겸과의 거리를 좁혔다.
“응. 철거가 돼야 내가 갈 곳 없는 널 온전히 책임이라는 말로 데려갈 수 있고, 너도 날 더 의지할 수 있으니까.”
“…….”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어떤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안일한 생각으로 재미 삼아 벌인 일이 눈덩이가 되어 저에게 굴러 내려오는 것을 본 권태정은 피하지 않고, 그 눈덩이를 마주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제가 부서진다고 해도 이제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내가 이겸이 너랑 같이 있으려면 나한테는 철거라는 과정이 꼭 필요해. 그래서 해결이 되면, 철거가 되면 말하려고 했어.”
“…제가 실장님 아니면… 갈 데가 없게 됐을… 때요?”
“응. 너한테 나만 남게 됐을 때.”
지나친 솔직함은 숨기는 것만 못할 수 있다는 걸 권태정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 눈앞의 이겸을 달래자고 또다시 모호한 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오해할 상황이라는 거 알아.”
“…오해요?”
“응. 내가 이렇게 말은 해도 결국, 태성 아들이니까 태성에서 하는 재개발 공사가 제일 중요할 거고, 그걸 위해서 널 이용했다고.”
이용이라는 말은 갈가리 찢어진 이겸의 마음을 더 잘게 찢고, 뭉그러뜨렸다. 이겸은 주저앉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버텼다.
“…아니에요?”
“아니야. 처음엔, 그래…. 처음에는 일부러 다가간 게 맞아. 다가가서 친해져야 철거촌에서 나가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
“또….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으니까.”
“…아…. 방송….”
권태정에게 방송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겸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저를 카페로 찾아왔던 날, 저에게 누군지 묻던 권태정부터 방송국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을 자신이 다 해 줄 수 있다고 말하던 것도…. 카페를 그만두고, 다람동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한 것도 전부 다.
그리고….
처음에 권태정이 저를 왜 집까지 찾아왔는지, 또 왜 일부러 저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연회장에서 도와준 것도, 또 석 달 동안만 같이 놀자고 했던 것까지…. 전부 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방송. 철거에 방해가 되는 방송에 제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이겸은 멍하니 초점이 흐트러진 눈동자를 감았다가 떴다.
아…. 그랬던 거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나 같은 사람한테 잘해 줄 때 알았어야 하는 건데. 더 의심하고, 경계했어야 하는 건데. 자꾸 나한테 뻗는 손이랑 나를 보고 웃는 얼굴에 마음이 풀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방송… 때문에…. 방송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래서 같이 있으면 돈까지 준다고 하신 거예요?”
“미안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이 널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였고, 그땐 그렇게 해서라도 널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너한테도 나쁠 거 없다고 생각했어. 넌 돈이 필요했고, 난 네가 내 눈앞에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권태정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지러워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권태정을 이해하려 드는 제가 싫었다.
누가 두드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리는 머릿속에 눈을 감은 이겸이 다시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움직임에 놀란 권태정이 얼른 다가가 이겸을 부축했다. 이겸은 그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단단하고 힘이 센 권태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안 되겠다. 방으로 가서 좀 눕자.”
“…놔주세요.”
“이겸아.”
“……제발요.”
권태정의 따뜻한 손이, 단단하게 저를 받치는 그 느낌이 퍼지는 순간 이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평생을 저와 함께 있던 할아버지의 죽음과 한 달 조금 넘게 본 사람과의 거짓된 시간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만큼 똑같이 슬플 수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겸의 이해와 상관없이 마음은 아프고, 눈물은 계속해서 흘렀다. 저도 저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울지 말라는 소리도 나오지 않고, 화를 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방까지만 같이 가. 너 이러다 쓰러져.”
이 순간에도 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있는 권태정이 좋았다. 머리 위로 닿는 낮은 목소리도, 지금까지의 시간이 사실은 다 거짓은 아니었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다정함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외면하기에 이겸은 너무나 약했다.
접객실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침실로 들어간 권태정은 이겸을 침대에 눕혔다. 나가서 빈소에 있어야 한다고 몸을 일으키는 이겸을 다시 눕히자 완전히 힘이 빠진 이겸이 축 늘어졌다.
권태정은 겨우 눈만 느릿하게 깜빡이며 계속해 우는 이겸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손길에 이겸이 고개를 돌려 피했다.
“…방송 안 할 거예요. 약속할게요.”
“…….”
“그러니까 이제…. 실장님도 더는 안 오셔도 돼요.”
“이겸아.”
“그때 주신 돈들은 제가 빚도 갚고…. 억제제 사느라 좀 썼어요. 남아 있는 건 바로 드리고, 제가 쓴 건 일 해서 다 드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돈을 왜 다시 나한테 줘.”
“…그 돈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저도 죄송해요. 실장님께 뭐라고 할 자격 저한테 없어요. 그 돈 받았으니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정말 큰돈이 들어왔을 때는 제안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보다는 저를 도와주려고 돈을 줬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좋아하고, 기대는 마음이 생겨 버려 처음에 나눈 3개월만 놀자는 그 말을 자꾸 잊게 됐다. 그건 제 잘못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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