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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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고민 있나 해서.”
이겸은 저에게 복숭아 무스를 덜어 내미는 권태정을 보다가 접시를 받았다. 그리고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무스를 한 입 먹었다.
“고민… 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생각이 가끔 들어서요.”
“이렇게 지내는 게 뭔데?”
“음….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지내다 보니까 그게 어색하기도 하고…. 실장님께서는 두어 달 그렇게 지내도 된다고 하셨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됐나 봐요.”
권태정은 어느 정도 이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성그룹의 어마어마한 빌딩,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빨간 컨테이너로 왔을 때의 제 심정과 비슷할 것 같았다. 제가 늘 보내던 하루와 너무나도 하루가 이어지면 불안함이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지내는 게 싫은 건 아니지?”
“그럼요.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요…. 모든 게 전보다 더 좋은데…. 싫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마음이 조금 불안한데…. 왜 불안한지 잘 모르겠어요.”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권태정이 잔을 내려놓고 이겸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틀어 앉았다.
“네 말대로 적응이 아직 안 돼서 그래. 누구나 새로운 곳에 가면 적응 기간이 필요하잖아. 나도 회사 처음 들어가고 한 달은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받고 그랬어. 처음 여기 집에 들어왔을 때는 한 일주일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적응이 안 돼서.”
“…….”
“다람동 빨간 컨테이너는 아직도 잘 적응이 안 돼. 눈에 익어 전보다 덜 거슬릴 뿐이지.”
“…….”
“작게 보면 집이 달라진 거고, 크게 보면 널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게 달라진 거잖아. 잠자리도 달라지고, 더는 일을 안 해도 되게 됐고, 하다못해 폰 기종까지 달라졌는데 당연히 적응 기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이겸은 권태정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장난기가 많아 저를 잘 놀리고 당황하게 하기도 하지만, 한 번씩 저보다 훨씬 더 경험한 게 많고, 또 생각한 게 많아 어른스러운 모습이 보일 때면 제 마음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확 더 기울었다.
“여기 한 달을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이 주 정도 있었잖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계속 적응 안 되면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너무 넓어서 안 되는 거면 좀 좁은 데로 이사 가면 되는 거고.”
제가 뭐라고 저런 생각까지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적응을 하든 말든 놔두거나 배부른 소리를 한다 생각하고 넘어갈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권태정은 달랐다. 생색을 내지도 않고, 뭔가 보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겸은 그런 순간에 권태정이 어른이라는 것을 느꼈다.
“혹시 잠도 잘 안 오고 그래? 나 잘 때 새벽에 깨서 밤을 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잠은 잘 자요. 제가 실장님보다 매일 늦게 일어나잖아요. 침대가 너무 편하고, 이불이 너무 포근해서…. 매일 꿈도 안 꾸고 너무 편하게 자요.”
“그럼 다행이고. 음, 그럼 뭐 나랑 매일 같이 있는 게 혹시 불편해? 개인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싶다거나 하면 말해.”
“아니에요. 말도 안 돼요.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서 그러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실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솔직한 이겸의 말에 웃은 권태정이 소파 헤드에 팔을 올리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괴었다.
“그럼 이제 나랑 있어도 안 어색하단 거네.”
“…처음보다는….”
“그럼 이제 나 좋아해?”
“…….”
“말하기 부끄러워? 그때 자면서는 나한테 그랬잖아. 실장님 좋아해요.”
“제, 제가 언제….”
그런 적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이겸의 머릿속으로 히트 때가 스쳐 지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신기하게 권태정이 저에게 물었던 게 너무나도 선명히 떠올랐다.
‘이겸아. 대답해 봐. 나 좋아해?’
그리고 저는 그 질문에 분명히 좋아한다고 권태정에게 대답했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얼굴과 몸 여기저기가 화끈한 느낌에 이겸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건…. 저, 정신이 없을 때라….”
“아, 정신없을 때라 그냥 실언한 거다?”
정신이 없을 때 한 말인 건 맞지만, 또 완전히 실언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니까. 다만 그렇게 좋아한다고 노골적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은 정신이 없어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그런 게 맞았다. 맨정신으로는 부끄러워서 좋아한다고 그렇게 대놓고 매달리며 말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실언까지는 아닌데….”
“정신없어서 그냥 한 말인데 내가 너무 의미를 뒀나 봐.”
“…….”
“네 말 이해했어. 그냥 잊을게, 나도.”
소파 헤드에 걸치고 있던 팔을 내린 권태정의 몸이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이겸은 어쩔 줄을 모른 채 그런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정말 실언이라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권태정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겸은 들고 있던 디저트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권태정이 있는 쪽으로 살짝 더 붙어 앉았다.
“실장님….”
불러도 별 반응 없이 TV 화면만 보는 권태정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이겸이 손을 들어 권태정의 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제가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땐 정신도 없고, 부끄러운 것도 덜해서…. 말한 것 같아요.”
“…….”
“…실언을 했다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 그런 말은 아무한테나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권태정의 마음을, 오해를 풀고 싶어 말을 하기는 하는데 지금 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겸은 여전히 앞만 보고 있는 권태정을 보며 애가 타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한테나 하는 말 아니야?”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저 그런 말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학교 다닐 때 누구 좋아했던 적 있을 거 아냐.”
이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고백 같은 것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걸 받아 주거나 같이 좋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막막했고, 억제제 부작용으로 정상이 아니게 된 몸이 걱정돼 조금도 마음이 기운 적이 없었다.
“그럼 다시 그 말에 의미 둔다?”
제 팔을 간절히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겸을 흘끗 본 권태정이 더 가까이 오란 듯 손짓했다. 그에 몸이 닿도록 가까이 앉은 이겸이 더 오라는 손짓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올라와서 앉아.”
말로만 하면 또 부끄러워 못한다고 몸을 뺄 것 같아 이겸의 팔을 잡아당겨 몸까지 안아 아예 제 다리 위로 올려 앉힌 권태정이 빨개진 목덜미와 뺨을 보며 웃음 지었다.
“왜 울려고 그래. 여기 앉는 거 싫어?”
“…화 풀리신 것 같아서요….”
“나 화났던 거 아닌데. 좀…. 서운했던 거지. 서운했는데 뭐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좋아하는 마음이 강요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네 말대로 그런 상황에는 없던 마음도 순간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거고…. 뭐 그땐 둘 다 정신없이 좋기만 했으니까.”
“…….”
“그냥 섹스할 때 한 말에 내가 혼자 너무 의미를 뒀나 보다…. 아, 이겸이가 나 먹고 버린 거구나.”
마지막 말에 놀란 이겸이 조금 멍하니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그 울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한 얼굴을 보며 숨소리처럼 웃은 권태정이 보송보송한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런데 뭐 아니라니 다시 괜찮아졌어.”
“…죄송해요….”
“우리 자기 진짜 우네. 누가 애기 아니랄까 봐.”
미안한 마음과 권태정이 저에게서 고개를 돌리던 순간의 마음 위로 안도가 밀려들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눈물을 참던 이겸은 울지 말라는 듯 다정히 저를 달래는 권태정의 얼굴을 보며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가 너무 서툴러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자꾸 서운하게 만드는 것 같아 속상했다.
“괜찮아. 네가 아니라고 다 말해 줬잖아. 그거면 됐어. 울지 마, 응? 우는 거 보니까 마음 아파.”
마음이 아프다며 가슴 위로 손을 올려 누르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가만히 그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덮었다. 그런 이겸을 보며 싱그럽게 웃은 권태정이 작은 손을 잡아 더 앞으로 확 당겨 몸을 끌어안았다.
몸이 완전히 포개지며 마주 닿는 느낌이 좋았다. 이겸은 가만히 두 팔로 권태정의 목을 마주 안았다. 허리와 등으로 감긴 두 팔이 꽉 몸을 옭아매는 느낌은 묘한 안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겸은 저를 안은 권태정의 어깨에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언젠가는 꼭 저도 권태정이 저에게 주는 이 안정감을 전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 * *
아침 일찍 울리는 진동에 권태정은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이 묻은 눈으로 ‘누나’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난 권태정이 조용히 방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막내 잘 잤어?
“응, 그럼. 누나는?”
-나도 잘 잤지. 일할 게 좀 있어서 회사 나왔어.
“아, 우리 누나 부지런한 거 알아줘야 돼.”
8시도 안 된 시간에 준비를 다 하고 회사에 나갔다는 누나의 말에 감탄한 권태정이 소파에 털썩 앉아 뒤로 고개를 젖혀 기댔다.
-부지런하다기보다는 성격이 이상한 거지. 해야 할 일 남아 있으면 잠도 못 자잖아. 내가 나를 괴롭히는 성격. 아무튼 오늘 너무 바쁠 것 같아서 잊기 전에 네가 물어본 거 말해 주려고.
“아, 방송국?”
-응.
이겸을 집으로 데리고 온 뒤 권태정은 이겸의 휴대폰에서 방송국 사람들 번호를 모두 차단했다. 어차피 방송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한 마당에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도 데리고 나오고, 카페도 그만두게 하고, 번호까지 차단을 했으니 이제 방송국에서 이겸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도 없었다.
그렇게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곳을 막은 지 이 주 정도가 지난 지금, 방송국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 거기 친구가 있다는 누나에게 상황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거기 완전히 비상이래. 그 친구 없으면 방송에 임팩트가 없으니 어떻게든 섭외를 하려고 하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난리인가 봐.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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