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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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언제쯤 말해 주려나. 권태정은 이겸이 쏟아 낼 사랑에 가까운 말들을 떠올리다가 상상만으로도 발기할 것 같아 생각을 급히 멈추었다.
“배고프지? 가기 전에 브런치 먹고 가자. 프렌치토스트랑 에그 베네딕트 맛있는 데 있거든. 아니다, 그냥 좀 이르게 점심을 먹을까. 뭐가 더 좋아?”
“전 뭐든 다 좋아요.”
“그럼 프렌치토스트 먹으러 가자. 저녁을 밥 먹고.”
“네에…. 어? 병원….”
무심코 창밖을 보던 이겸이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바라보았다. 그쪽으로 흘끗 시선을 줬다가 다시 앞을 본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지나고 전에 갔던 호텔만 지나면 집이야. 병원도 이제 더 가까우니까 편히 다닐 수 있을 거야. 아, 어르신은 좀 괜찮아지시는 것 같아? 의사를 며칠 못 봤네.”
“검사를 받으셨는데 안 좋은 곳이 많으신가 봐요. 조금 더 검사를 해 봐야 결과가 나오는 것도 있고…. 연세가 있으셔서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는 상태라고 하셨어요.”
“자주 가서 뵙는 게 좋겠네. 간병인이 있어도 어르신께서 이겸이 너 기다리실 거 아냐.”
“네…. 점심 먹고 집에 가서 짐 놓은 다음에 병원 가 봐도 돼요? 저녁에는 제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요. 너무 늦게 가면 할아버지 주무시는 거 방해만 되고….”
그냥 간다고 해도 될 것을 제 허락을 구하는 이겸을 본 권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아르바이트 그만두면 어때?”
“아르바이트를요?”
“응. 일주일에 세 번이라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할아버지랑 시간 보내면 좋잖아.”
“…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이 아르바이트라도 안 하면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서요.”
빚, 그놈의 빚. 하여튼 구대범이 문제였다. 권태정은 하루빨리 이겸의 빚을 갚고 그 차용증을 제가 가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차용증이 구대범에게 있는 것과 저에게 있는 것은 다른 거니까. 그 차용증을 받아와 이겸의 눈앞에서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걸 보며 이겸은 어떤 얼굴을 할까.
빚이 사라져 기쁠까? 그 빚을 제가 갚았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할까? 여러 감정이 뒤섞이겠지만, 그래도 그 감정 중 가장 큰 것은 기쁨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내가 준 돈으로 몇 달은 커버 되잖아. 그걸로 일단 커버하고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어차피 철거되고 이사 가게 되면 거기서 일 계속하기 힘들 수도 있잖아. 이사 간 곳 가까이에 새로 구하는 게 낫지.”
이겸이 카페까지 그만두면 방송국 사람들은 더 이상 이겸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후속 보도의 중심이 될 연이겸이 그들의 적인 태성그룹의 삼남, 권태정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카페만 그만두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었다. 이겸은 제집에 머물며 편히 병원을 다니면 되고, 저는 방송 걱정 따위 더는 하지 않고 이겸과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힘들게 지냈잖아. 두어 달 쉬면서 어르신이랑도 시간 보내고, 나랑도 놀아 줘.”
두 달만, 딱 두 달만 조용히 지나면 철거가 무사히 진행될 거고 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겸은 그런 제 옆에서 다람동의 모든 시간을 잊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딱 두 달. 완벽한 시간을 맞이하기까지는 겨우 두 달이 남아 있었다.
“…사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일할 사람이 빨리 구해지면 아마 그만둘 수 있을 거예요.”
“응. 착하다.”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말을 잘 듣는 이겸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한 권태정이 손을 내려 잡아 달라는 듯 손가락을 벌렸다. 그 손을 가만히 보던 이겸이 두 손으로 잡아 제 허벅지 위로 내렸다.
“…….”
마음 안에서 쿵 떨어진 심장이 녹아내려 손으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이겸은 마음이 묻은 두 손으로 권태정의 손을 잡은 채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바보 같고, 부끄러운 말을 하게 될 것만 같아서 다정한 말들로 간지러운 입 안을 누르며 입술을 꾹 닫았다. 그렇게 입술 안에서 녹아내린 다정한 말들은 온기가 되어 손끝으로 흘러내렸다.
“늘 느끼는 건데 손이 어쩜 그렇게 따뜻해.”
전부 실장님 때문이에요…. 실장님 때문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평소에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말들을 자꾸 소리 내고 싶어져서 그걸 참느라, 참아 낸 말들이 녹아 실장님과 닿은 곳으로 흘러내려서…. 이겸은 저를 보고 웃는 권태정을 보며 조금 더 꼬옥 그 손을 쥐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정의 말과 떨림이 녹아내려 만든 손의 온기는 내내 조금도 식지 않았다.
* * *
아르바이트를 가서 카페 사장에게 전화를 건 이겸은 할아버지의 입원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하며 아무래도 카페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사장은 어느 정도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그러라고 답을 해 주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구해질 때까지는 동생이 가게를 보면 되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에 이겸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통화를 마친 이겸은 카페 한쪽에 앉아 뭔가 서류를 보고 있는 권태정에게 다가갔다. 집에 혼자 있기 싫다며 제가 출근할 때 같이 온 권태정은 벌써 커피와 티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실장님, 방금 사장님이랑 통화했는데요. 아르바이트생 구할 때까지는 동생분께서 가게 봐 주시면 된다고 하셔서…. 오늘까지만 일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잘됐네. 저번에도 느꼈는데 사장이 은근 센스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너같이 예쁜 애를 뽑았겠지만. 이겸이 너 오고 매출 엄청 늘었을걸.”
“…왜요?”
“네 얼굴 보러 손님 엄청 왔을 거 아냐.”
권태정의 말을 농담이라 생각한 이겸이 아니라며 웃고는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온 것을 꺼내 권태정의 잔 옆으로 놓았다. 권태정은 제 잔 옆에 놓인 마들렌을 바라보았다.
“…제가 좋아하는 건데 드셔 보세요. 오늘이 마지막으로 일하는 날이기도 하고, 또…. 감사해서 뭔가 드리고 싶은데 지금 드릴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투명한 비닐 안에 들어 있는 마들렌을 집어 든 권태정이 포장을 열어 달착지근한 코팅이 된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겸이 준 것이라 그런지 상당히 맛있게 느껴졌다.
“맛있다. 고마워.”
이겸이 보는 앞에서 남은 반도 입에 넣고 전부 먹은 권태정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겸은 부끄러워 몸이 배배 꼬이는 것을 느끼며 겨우 고개만 끄덕이곤 얼른 카운터로 도망쳤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게 분명한 뒷모습에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모든 게 제 생각대로 너무나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성질을 못 죽여 아주 가끔 조금씩 삐끗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 알아서 따르는 행운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적도 없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적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늘 제가 있는 쪽으로 세상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느끼며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가 원하는 쪽으로 또 세상이, 상황이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이겸의 마음까지도.
이제 남은 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가 만든 기회를, 그 기회의 등을 미는 행운을 거머쥐는 것뿐이었다.
* * *
욕실이 살던 집보다도 큰 곳에 하루 만에 적응을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겸은 너무 큰 집이 낯설어 권태정을 따라다녔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 권태정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됐다.
권태정이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면 그 근처에 가서 있게 되고, 소파로 가면 또 거기로 가서 옆에 앉게 됐다. 씻으러 들어갈 때는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소파에서 기다리며 제집에 걸린 TV보다 몇 배는 큰 화면의 TV에 시선을 맞췄다.
시끌시끌한 소리와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요란하게 나오는데도 이겸의 시선은 욕실 쪽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권태정에게 다가갔다. 그런 이겸을 본 권태정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나 기다렸어?”
“…네.”
“아까부터 나만 졸졸 따라다니네. 강아지야? 응?”
귀엽다는 듯 놀린 권태정이 거실 TV를 끄고 이겸을 방으로 데려갔다. 여기로 데리고 올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뭔가 조금 위축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권태정은 이겸을 침대 위에 올려 앉히고, 저도 그 옆으로 올랐다.
“아깐 짐만 풀고 다시 나가느라 얘기 못 했는데…. 편하게 있어도 돼. 아니, 있어. 더 편했으면 해서 같이 온 거니까.”
“…네.”
“불편해?”
“불편한 건 아니에요. 너무 좋아요. 좋은데…. 제가 살던 집보다 갑자기 확 커지고 좋아지니까 아직 적응이 안 됐나 봐요.”
“내일 되면 또 달라질 거야. 전에 잠깐 들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지내는 건 오늘이 첫날이잖아. 첫날이라 그래.”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미소 지었다. 권태정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질 때마다 꼭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물론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렇게 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권태정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정함이 저에게까지 스며드는 기분이 좋아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잠은 여기서… 자는 거예요?”
“응. 원래도 우리 같이 잤잖아.”
“그건 그렇지만….”
“뭐 집이 좁아서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런 말 할 거 아니지? 좁아서 같이 잔 것치곤 너무 붙어 잤는데, 우리.”
권태정의 말이 전부 맞아 이겸은 할 말을 잃었다. 집이 좁았다고 해도 떨어져서 잘 수 있는 정도는 됐다. 저와 할아버지도 충분히 떨어져서 그동안 잤었으니까.
하지만 권태정과 있는 동안에는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그의 팔을 베고, 눈을 맞추다가 잠이 들었었다. 방이 좁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따로 자고 싶어? 나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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