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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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회사 일을 처리하고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이 이겸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두 달만. 딱 두 달만 조용히 버티면, 이겸이 저와만 시간을 보내면 그다음은 걱정할 게 없었다. 두 달, 딱 그 두 달만 무사히 버티면.
“실장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권태정이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겸과 눈을 맞췄다.
“어, 왜 나왔어?”
“…너무 오래 안 들어오셔서요.”
제가 제법 긴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권태정은 웃으며 저를 데리러온 이겸에게 다가갔다.
“담배 피울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피웠어. 잘했지.”
어깨에 팔을 둘러 안는 권태정에게 폭 안긴 이겸이 품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냄새를 맡아 보았다. 정말 담배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안 나지?”
“…네.”
“잘했다고 해 줘. 이참에 끊을까?”
잘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겸은 잠시 망설였다. 저보다 훨씬 어른인 권태정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게 버릇없이 느껴지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겸은 말 대신 얼른 칭찬해 달라며 고개를 숙인 권태정의 입술에 먼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가득한 손길로 권태정의 머리칼을 살짝 두 번 쓰다듬었다. 하고 보니 이게 잘했다는 말보다 더 버릇없어 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아…. 죄송해요.”
“죄송하면 더 만져 줘.”
쓰다듬기 좋게 아예 상체를 숙인 권태정이 조심조심 몇 번 더 닿는 손길에 웃었다. 고작 머리 몇 번 쓰다듬고 홍조를 띤 얼굴을 보니 조금 더 깊게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하면 안 되겠지?”
“뭘요?”
“섹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이겸이 얼른 권태정의 입을 두 손으로 막고 고개를 저었다. 권태정은 얼른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고개를 기울여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혀가 손가락 사이를 핥는 것에 놀란 이겸이 빨개진 채 두 손을 거두어 몸 뒤로 숨겼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또 하려다가 말면서 달싹이는 입술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그대로 이겸을 카운터 안쪽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세우고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
“…으응….”
깊지 않게 입술을 마주 물고 혀만 할짝이자 쉽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권태정은 애가 탈 만큼만 빨아 주다가 먼저 입술을 떼고 싱긋 웃었다.
“얼른 집에 가려면 빨리 정리해야지.”
“…하아….”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눈동자가 예뻤다. 이겸이 저와 더 붙어 있고 싶어 한다는 그 자체가 권태정을 흥분하게 했다. 조금 더 놀리고 싶은데 놀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권태정은 저만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이겸을 향해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입술이 닿자마자 다소 거칠게 숨이 뒤섞였다.
제 옷자락만 겨우 붙든 채 벅차고 거친 키스를 퍼부어도 저를 밀어내지 않고, 떨어지려 하지 않는 이겸을 끌어안으며 권태정은 생각했다.
철거촌은 허물어져도 그곳에서 쌓여 버린 이 마음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거라고. 모든 게 무너질 두 달 뒤, 온전한 이 마음을 마주 댄 채 반드시 이겸과 함께 다람동을 나가겠다고.
* * *
권태정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백 비서와 마주했다. 백 비서의 손에는 권태정이 부탁한 휴대폰 로고가 그려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여기 폰.”
“고마워.”
백 비서에게 쇼핑백을 받은 권태정이 씩 웃었다. 백 비서는 그런 권태정의 뒤를 한 번 보고 목소리를 죽였다.
“내일 그 후속 보도 준비하는 피디가 여기 온다고 했대.”
“어떻게 알았어?”
“세탁소 아주머니 만났는데 이사 나가신다고 하니까 그 전에 인터뷰 좀 할 수 있냐고 내일 온다고 한 모양이야.”
“철거 전에 어떻게든 방송하려면 마음이 급하긴 하겠지.”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누구보다 네 얼굴 잘 아는 사람들이야. 연이겸 씨 만나려고 계속 접촉할 텐데 같이 있는 거 알아서 좋을 게 없어.”
대문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권태정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백 비서의 말이 모두 맞았다. 어떻게든 방송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이겸의 옆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방송국 사람들로부터 이겸을 떨어뜨리려면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겸이 데리고 집으로 갈게.”
“데리고?”
“그럼 나 혼자 가? 안 그래도 방송 나갈지 말지 고민 중이래. 전에는 안 한다는 쪽이었는데 그 새끼들이 엄청 구슬리나 봐.”
“큰일이네.”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가야지. 철거 날까지 나랑 잠시도 안 떨어지면 돼.”
“연이겸 씨가 그러려고 하겠어?”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권태정을 보며 백 비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권태정은 싱그럽게 웃으며 비밀을 말하는 사람처럼 손을 하나 들어 입 옆에 대고 소곤댔다.
“내가 나 없이 못살게 만드는 중이거든.”
“…태정아. 너 어쩌려고 그래.”
“뭘 어째. 내가 데리고 살면 되지.”
“뭐?”
“내가 데리고 살 거라고, 평생. 난 마음먹었어.”
쉽게 이런 말을 내뱉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백 비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붙어 다니면서 이겸을 대하고, 말하는 태도가 조금 바뀐 데다가 같이 이 좁은 집에서 지내면서도 별 불평불만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생 데리고 살 거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을 줄은 몰랐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연이겸 씨랑 연애한다는 거야?”
“아직은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아닌데 데리고 산다는 말이 나와?”
“진우야.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냥 좀 믿어 봐. 내가 언제 너 실망시킨 적 있어?”
“…….”
“아, 좀 있긴 하네. 아무튼 이번엔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겸이 보면 잘해 줘. 걱정에서 나오는 잔소리는 나한테만 하고. 내가 다 알아들으니까.”
부탁 같은 말이지만, 사실 명령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백 비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되는 일을 잘 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권태정은 어린애가 아니고, 또 자기 앞길을 망칠 짓을 무턱대고 벌일 만큼 대책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봐 온 권태정의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모두 괜찮았던 행보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뭐 더 필요한 건 없고?”
“응. 당장은 없어. 아, 난 어떻게든 이겸이 데리고 집으로 갈 테니까 넌 내일 방송국 사람들 감시 좀 해 줘.”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내일은 이 근처에도 오지 마. 방송국 사람들한테 얼굴 보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권태정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보는 백 비서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에 한숨을 쉰 백 비서가 간다고 인사하곤 돌아섰다.
대문을 닫은 권태정은 바로 방으로 들어와 아직 자고 있는 이겸의 옆으로 앉아 좁아터진 방을 대충 훑어보았다. 이런 곳에 지금 제가 머물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원래라면 하루, 아니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았을 텐데 이겸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물론 지내다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여기를 떠날 때가 된 것 같았다.
“…….”
아, 뭐라고 말을 해야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날 따라나설까. 권태정은 정말 얌전히 잠이 든 이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깨어 있을 때도 어린 티가 폴폴 나는데 자고 있을 때는 더 그랬다. 권태정은 제 손길에 움찔대더니 눈을 뜨는 이겸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잘 잤어?”
“네….”
잠이 묻은 눈을 떠 권태정을 바라보던 이겸이 다시 눈을 감았다. 바로 깨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있는 게 귀여워 계속해 머리를 쓰다듬자 손길이 좋은지 이겸이 미소 지었다.
“선물 있는데.”
“선물이요?”
조금 전보다 또렷해진 정신으로 눈을 뜬 이겸이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권태정은 그 앞으로 조금 전 백 비서에게 받아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폰 그냥 내가 먼저 샀어. 뭐 내가 산 건 아니고 비서님이 사다 주신 거긴 하지만.”
이겸은 앞에 놓인 쇼핑백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휴대폰 모양이 프린팅 된 네모난 박스가 들어 있었다.
“꺼내 봐. 네 거야.”
다시 한번 권태정의 허락을 맡은 후에야 이겸은 더욱 조심스러운 손길로 휴대폰 박스를 꺼냈다. 그리고 깨지기 쉬운 것을 만지는 사람처럼 열어 안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걸 제가… 써도 돼요?”
“그럼. 원래 예쁜 애는 좋고 예쁜 것만 쓰는 거야.”
자다가 일어났는데도 보송보송하고 깨끗하게 예쁜 이겸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아 흔든 권태정이 다시 저를 보는 시선에 참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 맞췄다. 입술이 닿을 때 두 눈이 질끈 감기는 게 귀엽고 예뻤다.
“맘에 들어?”
“…네. 너무 좋아 보여요. 화면도 크고….”
휴대폰을 집어 든 이겸이 이리저리 보다가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불이 켜지며 휴대폰 브랜드 로고가 화면에 뜨는 것도 계속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 이겸은 세팅을 하라고 뜨는 화면에 언어와 위치 같은 것을 설정하고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다른 사람이 쓰는 걸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좋은 걸 써 보는 건 처음이라….”
“응, 맞아. 잘했어. 나머지는 내가 해 줄게.”
권태정에게 휴대폰을 준 이겸이 옆으로 꼬물꼬물 다가가 앉아 능숙하게 세팅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휴대폰 화면을 봤는데 나중에는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 권태정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집중해서 보는 얼굴이 설레서 저도 모르게 닿은 시선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막 눈을 못 떼겠어?”
휴대폰을 보다가 흘끗 이겸을 본 권태정이 싱그럽게 웃음 지었다. 그제야 권태정의 얼굴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겸이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 봐도 돼.”
“…….”
“볼 만큼 봤어?”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인 이겸이 부끄러워 권태정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나름 숨는다고 숨은 이겸을 다시 흘끗 본 권태정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겸이 귀여워서 진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애교를 부리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닌데도 그 행동 하나하나에 본인도 모르는 애교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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