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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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겸은 카페에 가기 전 에이티엠에 들러 구대범에게 백만 원을 입금했다. 월급이 들어와 입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돈을 더 빌리는 것도 아니고 갚는 건데 제가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다 권태정 덕분에 생긴 용기였다.
이체가 완료되었다는 문구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대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에이티엠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요즘 돈을 꼬박꼬박 과하게 넣네? 일 열심히 하나 봐.
“…네.”
-뭐 그래. 나야 돈 빨리 갚아 주면 좋은 거니까. 그래. 요즘도 권태정이랑은 만나고?
“…철거촌에서 일하시니까 만날 수밖에 없죠.”
수화기 너머에서 구대범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조금도 웃지 않은 채 괜히 바닥만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그렇지. 거기서 일했지, 참. 야, 이겸아. 세상 존나 웃기지? 난다 긴다 하는 오메가가 들이대도 쳐다도 안 보던 애야, 걔가. 그러던 놈이 고작 철거촌 베타한테 꽂혀서, 씨팔.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누굴 병신으로 알아? 권태정이 돌았다고 그냥 철거촌 주민을 그렇게 싸고돈다고? 걔 그런 애 아니야. 연이겸 재주도 좋지. 역시 사람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죽기 직전에 또 하늘이 죽지는 말라고 권태정을 다 물어다 주는 걸 보면.
구대범의 말을 듣고 있으면 꼭 제가 돈 많은 우성알파를 이용해 빚을 갚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겸은 입술만 꾹꾹 깨물며 구대범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네가 권태정이랑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리고 얼굴 반반할 때 열심히 몸 팔아서 빼먹을 수 있을 만큼 빼먹어. 지금은 걔가 네 얼굴에 혹해서 싸고돌아도 그게 언제까지 갈까? 태정이가 너랑 결혼을 하겠어, 뭐 같이 살기를 하겠어.
“…….”
-팔 수 있을 때 팔아서 빚이나 갚아. 그게 네 인생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
-돈 꼬박꼬박 지금처럼 넣어. 조만간 들를 테니까 항상 커피 내릴 준비하고.
정말 하고 싶은 말만 멋대로 하고 끊어진 전화에 이겸은 뜨거워진 휴대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채무자 주제에 채권자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늘 받기는 하지만, 구대범과 통화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정말 최악이었다.
전보다는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구대범은 웃고 저는 웃지 못하고. 돈 이야기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권태정의 이야기가 섞이는 순간 어렵사리 꺼낸 용기와 자존심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 같아 속상했다.
“…….”
빚이 많아서, 열심히 일을 해도 줄어드는 티가 나지 않아서 종종 속상해지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세상에 빚보다 무서운 건 없는 줄 알았는데 권태정이 제일 무서워져 버렸다.
‘지금은 걔가 네 얼굴에 혹해서 싸고돌아도 그게 언제까지 갈까?’
물론 구대범의 말에 권태정이 보여 준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권태정이 보여 주고, 저에게 전해 준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애초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정해진 관계였으니 저런 말에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
이미 그 3개월은 깨졌고, 철거까지는 겨우 2개월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겸은 그 2개월 앞에 ‘겨우’라는 말을 붙여 생각하는 제가 우스웠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하루하루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아쉬워 속상했다. 이런 것에 속상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괜히 바닥을 보고 선 채 마음을 고르던 이겸이 작은 한숨과 함께 골목을 나섰다. 한숨을 쉬고 계속 우울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원하지 않아도 남은 2개월여의 시간은 흘러갈 거고, 권태정과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때 저는 어떤 마음일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전하며 조금 섭섭하고, 또 조금은 아쉬운 그런 정도면 참 좋을 텐데.
“…….”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덤덤하지 못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달 후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동자로 열기가 몰렸다. 이겸은 카페 쪽으로 걸으며 눈물이 너무나 쉽게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내딛는 걸음마다 떨어지는 노을빛이 예뻤다. 그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이겸은 남은 두 달여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얼른 해가 져서 얼른 권태정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겸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또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래도 오늘은 권태정의 얼굴을 볼 때까지는 내내 속상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 * *
가족과 식사를 마친 권태정은 권유정, 권기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길이 막히지 않아 조금 일찍 도착해 차를 세우고 여느 때처럼 카페에 들어가려던 권태정은 이겸이 창가 자리에 앉아 두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릿속으로 뭔가 불안함이 번졌다.
“…….”
이겸이 밖을 봐도 보이지 않는 쪽으로 선 권태정은 이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의 얼굴을 살폈다. 누군지는 몰라도 단순히 손님으로 와서 이겸에게 뭔가를 묻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온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칠 때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 나가는 두 사람을 따라 문까지 나간 이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권태정은 혹시 저를 알아봐서 문제가 될까 싶어 두 사람이 완전히 카페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 실장님.”
카운터에서 에스프레소 기계를 청소하며 마감 준비를 하던 이겸이 권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싱긋 웃음으로 인사하며 다가간 권태정이 주문을 하듯 카운터에 몸을 숙이고 팔을 괸 채 이겸을 바라보았다.
“방금 얘기한 사람들 누구야?”
“아…. 방송국에서 나오신 분들이에요. 철거촌 관련 후속 프로그램 때문에 전화 하셨었는데 제가 안 받아서 혹시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 직접 와 보셨대요.”
“아, 그래?”
“네. 전화 온 걸 본 기억이 없어서 언제 하셨는지 여쭤봤더니…. 그때… 하셨더라구요.”
“그때?”
“…히트 사이클 때….”
목소리가 작아지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손님이 마침 다 나가고 카페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본 다음 이겸에게 소곤댔다.
“아, 내 자지 물고 있을 때.”
“…그, 그런 말씀은 좀….”
얼굴이 달아오른 채 얼른 주변을 본 이겸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아무도 없어도 제가 들어 버린 이상 부끄러운 것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다르게 말할까? 음, 빨리 박아 달라고 조를 때? 아니면 자는 내 자지 몰래 빨 때? 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거야. 우리 자기가 내 자지 빨 때 얼마나 예쁜지.”
정말 놀란 이겸이 얼른 다가와 권태정의 입을 제 손으로 꾹 막았다. 그 손바닥에 쪽,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권태정이 이겸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고 비볐다. 결국, 이겸은 그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그래서 방송 할 거야?”
“원래는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 일로 알려지는 게 좋은 일도 아니고, 또 사채업자 아저씨도 방송 나가면 가만 안 둔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시니까 할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말씀 들어 보니까 조금 고민이 되기는 해요.”
“뭐라 하는데?”
할 생각이 없다가 출연에 고민이 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겸의 말에 작게 탄식한 권태정이 미간을 좁혔다.
“차라리 얼굴이 더 알려지면… 사채업자가 허튼 짓을 못할 거라고 하시는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또 모금이나 개인 후원처럼 도와주는 분들이 생겨서 빚 갚는 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아….”
권태정은 갑자기 정신이 확 드는 느낌에 이겸을 향해 구부리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제가 철거촌에 와서 해야 할 일이 뭐였는지 이제야 제대로 기억이 났다. 연이겸의 방송 출연을 막고, 최대한 조용히 철거촌을 나가게 해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철거가 진행되게 하는 것.
“그래서 나가기로 결정한 거야?”
“그건 아니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이겸의 방송 출연을 막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안도한 권태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겸이 출연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했다고 해도 저는 그 출연을 무력으로라도 막을 것이었다.
그 후속 방송은 절대 제작이 되면 안 되니까. 이겸이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은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만, 그래도 제가 이겸에게 ‘덜’ 나쁜 놈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 같이 생각해 보자. 저기 묶인 거 쓰레기는 버리고 오면 되는 거지? 내가 버리고 올게.”
“고맙습니다….”
꼬박꼬박 고마우면 고맙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인사하는 이겸이 귀여워 웃은 권태정이 정리가 끝나 묶인 커다란 쓰레기 봉지 두 개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쓰레기 버리는 곳에 대충 놓고 습관적으로 담배를 하나 입에 문 권태정은 불을 붙이려다가 그냥 태우지 않은 담배를 빼내 대충 바닥으로 버렸다. 담배 따위로 풀릴 답답함이 아니었다.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만나 시간당 십만 원을 준다고까지 하며 시간을 보낸 그때의 마음은 기억도 잘 나지가 않았다. 그게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고 한 달도 채 되기 전의 일인데 지금과는 너무나 마음이 달라 그런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접근했지만, 어느 순간 이겸을 만나는 이유는 사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코끝을 간지럽히다가 온몸을 사로잡는 페로몬 향부터 눈을 뗄 수 없는 예쁜 웃음까지 그 모든 것은 이제 권태정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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