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55화 (55/174)

#55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질문에 뭐 그렇게 예쁘게 대답해.”

권태정이 말하는 예쁘게 대답한다는 게 뭔지 모르는 이겸은 안전벨트만 만지작대며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하긴 넌 자지도 예쁘더라. 자지 보고 예쁘다고 생각해 본 건 또 처음이네. 다른 사람 거 본 적도 없지만. 전에 차에서 바지 입힐 때 보기는 했는데 그땐 어두워서 잘 안 보였거든. 근데 어제 빨 때 보니까 뭔 자지가 그렇게….”

지금 제가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이겸은 하얗게 질렸다가 확 달아오른 얼굴을 숙일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푹 아래로 숙였다. 성기가 예쁘다는 말부터 바지를 입힐 때, 빨 때 봤다는 말까지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말이 없었다.

“왜 그래. 칭찬이야.”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진짜 예뻐서 그래. 넌 거기서도 복숭아 향 나더라.”

조금 더 발갛게 달아오른 이겸이 신호에 차를 세우고 저를 보는 권태정의 입을 다시 손바닥으로 꾹 눌러 막았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이 웃는 모양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곧 쪽, 쪽 뽀뽀하는 소리가 차 안으로 울렸다.

이겸은 제 손목을 쥐고 입 맞추는 권태정을 보며 녹았다가 겨우 모양을 유지하고 굳은 마음이 다시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속으로 생각할까?”

“…….”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일단은 저에게 들리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 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겸의 손바닥에 입 맞추고 손가락을 겹쳐 쥐었다. 그리고 그 손은 목적지까지 풀리지 않았다.

권태정이 데려간 곳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었다. 이겸은 권태정이 뒷좌석에 있는 하얀 박스를 들고 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얼른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오늘 날이 너무 좋은데, 이렇게 좋은 날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권태정은 저를 보자마자 상냥히 인사하고 안내하는 사장을 따라 이겸과 함께 걸음 했다. 전에 누나에게 소개받은 곳인데 내부가 각각 다 나뉘어 방으로 되어 있고, 철저히 예약제로만 운영을 해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고 편안히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유명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 분위기도 좋고, 음식 맛까지 좋아 편안히 식사하고 싶을 때면 종종 들르곤 했다.

“오늘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오늘 도미랑 갈비가 특히 좋아요.”

“음, 그럼 하나씩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디저트 사 온 게 있는데 식사 마치고 여기서 먹어도 될까요?”

“그럼요. 혹시 케이크면 냉장 보관했다가 식사 마치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그럼 저야 너무 좋죠.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립니다.”

권태정과 그 가족을 너무나 잘 아는 사장은 권태정이 내미는 하얀 박스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방을 나섰다.

이겸은 방을 나서며 저에게도 인사하는 사장에게 꾸벅 같이 인사하고 앉아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권태정에게 물었다.

“…케이크 사 오신 거예요?”

“아, 응. 아까 병원 가는데 거기 전에 갔던 그 레스토랑 있는 호텔이 보이더라고. 거기 복숭아 무스 좋아했잖아. 들러서 사 왔어.”

“아….”

권태정과 함께 갔던 레스토랑에서 다른 것들은 너무 낯설고 어려운 맛인데 디저트는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났다.

“매일 먹어도 안 질릴 맛이라고 했었잖아. 홀 케이크로 샀으니까 이따 마음껏 먹어. 앞으로도 계속 사 줄게. 질리지 않고 맛있게 먹을 만큼만.”

제가 했던 말을 권태정이 기억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리고 그걸로 넘어가지 않고 직접 호텔에 들러 이걸 사 왔다는 것도 너무나 설레고 두근거렸다. 권태정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겸이 살며 본 사람 중에 가장 다정하고, 또 가장 기대고 싶은 어른이었다.

“기억하실 줄 몰랐어요….”

“내가 또 기억하고 싶은 건 잘하거든. 그래서 네가 한 말은 다 기억해.”

이겸은 그동안 의지하고 싶은 어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아주 오래전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유일한 가족으로 서로 의지하고 살았던 할아버지를 이겸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저보다 약자가 되어 버린 할아버지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학교 선생님도, 또 재개발이 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던 어른들도 모두 겉으로만 친절한 척을 할 뿐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난색을 표했다. 얼굴에 대놓고 드러나는 피곤하고 귀찮다는 표정에 이겸은 매번 상처를 받았다.

권태정은 그런 이겸이 처음 만난 어른이었다. 제가 어려울 때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저보다 앞장서서 들여다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고, 바보같이 울기나 하는 저에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그런 온기였다.

기껏 생각해서 사 준 비싼 음식들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게 불쾌했을 텐데 그중에 제가 잘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샀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을 콕콕 찔렀다. 어쩐지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 찡했다. 하지만 바보처럼 울고 싶지 않아 이겸은 눈물을 꾹 참았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저도…….”

권태정은 턱을 괴고 시선을 이겸에게 고정한 채 다음에 이어질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잘할게요…. 잘하고 싶어요.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할 거예요. 그러니까 실장님도 꼭 제가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아, 든든하다. 뭐든 다 해 준다는 사람도 있고. 전에도 이런 말 한 적 있었지. 뭐든 다 한다고. 그날 말한 거에 오늘 말한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가 네가 해 줄 일 생기면 바로 말할게. 알지, 나 하고 싶은 말 바로바로 다 하는 거. 아까 차에서도….”

“그, 그것까지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다급히 말을 막는 이겸을 보며 웃겨 죽겠다는 듯 식탁에 엎드려 웃은 권태정이 몸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 끝이 빨개진 사랑스러움을 잔뜩 눈에 담으며.

식사는 몹시 훌륭했다. 이겸은 갈비 정식과 권태정이 덜어 준 부드러운 도미 살에 아주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자 복숭아 무스와 식당에서 준비해 준 따뜻한 차가 식탁 위로 놓였다.

“잘라 줄게.”

권태정은 같이 나온 칼로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잘 잘라 큰 한 조각을 앞접시에 덜어 이겸의 앞으로 놓았다. 그리고 제가 안 먹으면 신경이 쓰일 것 같아 작게 잘라 제 앞에 놓인 접시에도 대충 놓았다.

“잘 먹겠습니다아….”

기분이 좋은지 말꼬리가 살짝 늘어지는 게 귀여워 빤히 보던 권태정이 복숭아 무스를 한 입 먹고 웃는 이겸을 온 눈동자에 담았다. 제가 먹은 것도 아닌데 입 안으로 복숭아 맛이 가득 번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겸의 웃음이 그랬다. 누가 봐도 저와 같은 감상을 느낄 정도로 달착지근하고 예뻤다.

“너무너무 맛있어요…. 다시 먹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잘 먹어서 좋네. 많이 먹어.”

“네, 실장님도 드세요.”

“응.”

이겸이 신경 쓰지 않고 잘 먹을 수 있도록 무스를 한 입 먹은 권태정이 확 퍼지는 복숭아 크림 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겸과 정말 잘 어울리는 디저트였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호텔을 보자마자 이걸 떠올리고 홀린 듯 들어가 사 온 저를 오늘은 아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아, 이거 먹고 백화점 갈 건데 뭐 좋아하는 스타일 있어? 옷 살 때 이건 본다, 뭐 그런 거.”

“음…. 가격이랑 색이랑… 크기?”

이겸이 말하는 것 중 그나마 스타일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색뿐이었다. 뭐 크기도 굳이 말하자면 할 수 있겠지만, 벙벙한 옷이 잘 어울려 일부러 큰 옷을 산다거나 타이트한 옷이 패셔너블해 일부러 고른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지는 않아 일단 빼기로 했다.

“색은 어떻게 골라?”

“무난한 색이요. 흰색이나…. 회색이나. 까만색은 저한테 잘 안 어울린다고 해서 잘 안 사요. 너무 분위기가 어두워 보인다고도 하고….”

“꽃 보러 갔을 때 입은 건 어쩌다 사게 된 거야? 흰색, 회색도 아닌데.”

“아…. 그건 같은 남방이 하나 더 있거든요. 그거 살 때 한 장 더 고르라고 하셔서 고르는데 옷가게 주인아주머니께서 봄이니까 좀 화사하게 입어도 좋을 것 같다고 골라 주신 거예요.”

도대체 그 옷 가게가 어딘지, 또 누가 이겸에게 분홍색 체크 남방을 골라 준 건지 알고 싶었다. 그 정도 미적 감각이라면 태성모직에 스카우트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권태정은 연한 분홍색 남방을 입고 꽃잎이 흩날리던 꽃나무 아래 앉은 이겸을 정신없이 떠올렸다. 아마 평생 그 장면은 잊지 못할 것이었다.

“거기 옷 가게 어디야?”

“…한국대역 지하상가에 있는 덴데…. 왜요?”

“덕분에 내가 너 예쁜 거 봤잖아. 옷 하나 잘 골라 주면 인생 필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알려 주고 싶은데.”

진지한 권태정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이겸이 복숭아 무스를 한 입 먹으며 웃었다. 소리도 없이 사르르 퍼지는 웃음을 가만히 보던 권태정이 포크를 쥔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증인지 이제 이겸이 포크만 움직여도 귀여워 보였다.

“어제는 말씀 못 드렸는데 저 옷 안 사 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오래 입은 옷이고…. 돈도 많이 주셔서 다음에 혼자 사도 돼요.”

“내가 막 옷 사 주는 게 부담스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막 저 새끼는 왜 저러나. 진짜 안 저랬으면 좋겠다. 왜 자꾸 돈 쓴다고 하지, 존나 집요하고 돈지랄이나 하는 새끼. 뭐 이런 생각 들어?”

막힘없이 부정적인 쪽으로 말을 줄줄 쏟아 내는 권태정을 멍하니 보던 이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옷은 백화점 옷도 아닌데… 백화점에서 사 주신다고 하셔서…. 그게 죄송해서요.”

“그럼 됐어. 그냥 받아. 백화점 가는 건 내가 거기가 편해서 다니는 거야. 그리고 난 돈으로 일 해결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니까 죄송할 거 전혀 없어.”

“네….”

돈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편의를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그래서 권태정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돈으로 살 수 있는 편의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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