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50화 (50/174)

#50

생명력을 다해 가는 철거촌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아주 예쁜 벚나무였다. 이게 어쩌다가 여기에 있냐는 듯 만개한 벚꽃을 보며 계단을 오르던 권태정이 제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은 이겸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피어서 다행이에요. 아직 안 피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세 그루밖에 없는데 나무가 워낙 커서 하늘을 다 덮네. 아, 진짜 좋다. 아무도 없어서 더.”

권태정은 나무 아래, 이제는 아무도 오르지 않을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겸도 꽃가지 그늘이 지는 계단 위, 권태정의 옆으로 가만히 앉았다. 꽃이 흔들리며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어 꼭 세상에 둘만 남게 된 것만 같았다.

“여기 꽃은 매년 보러 왔어?”

“일부러 보러 온 건 아니고…. 세탁소 가거나 할 때 잠깐 보고 그랬어요.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온 김에 숨 좀 돌리고 가라고 하셨거든요.”

권태정은 저를 경계하다가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 싶으니 술술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내던 세탁소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낯선 저한테도 그런데 아마 같은 동네에 사는 이겸에게는 더더욱 말을 걸고, 또 살갑게 대했을 것이었다.

“꽃 좋아해?”

“네…. 예쁘잖아요.”

천진하게 웃으며 예쁘다고 말하는 이겸을 가만히 보던 권태정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뭐라도 입에 물지 않으면 꽃 아래, 그러니까 야외에서 음탕하고 난잡한 짓을 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권태정은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이겸을 향한 부드럽고 좋은 감정들이 가득 찬 마음 안으로 매캐함이 퍼지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나도 예쁜 거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안 믿어. 내가 꽃 보는 거 좋아한다고 하면 거짓말인 줄 알더라.”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이겸이 꽃가지가 흔들리는 사이로 파고드는 빛이 머문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색의 꽃과 까만 권태정의 슈트, 연약한 꽃잎이 떨어진 권태정의 단단한 어깨.

얼핏 보면 잘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권태정과 꽃은 아주 잘 어울렸다. 적어도 자꾸만 달콤한 감정이 넘치는 이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억울해. 난 진짜 예쁜 것만 좋아하는데. 그래서 내가 너도 좋아하잖아.”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이겸이 저를 보고 웃는 권태정과 눈을 맞췄다. 근사한 얼굴 위에 머문 웃음이 꽃잎처럼 떨어져 이겸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러니까 이겸이 너라도 알아줘. 내가 예쁜 거 좋아한다는 거.”

진지한 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난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이겸은 몸을 뒤로 기울여 다음 칸 계단에 팔을 받친 채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는 권태정을 눈에 담다가 고개를 바로 해 숙였다. 바람에 흔들려 발밑에 떨어져 있는 연한 색의 꽃잎만 봐도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선물.”

불쑥 눈앞으로 작은 꽃가지가 다가왔다. 가지 끝에는 벚꽃이 활짝 핀 채 매달려 있었다. 이겸은 권태정이 내미는 꽃가지를 받아 괜히 그 꽃잎의 수를 세었다.

“…….”

제가 내민 꽃가지를 받아 달착지근한 시선을 주는 이겸을 바라보던 권태정이 다시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다가 반도 채 타지 않은 담배를 바닥으로 버리고 짓이겼다. 온통 다정하고 예쁜 것들만 모여 있는 곳을 더는 훼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든 이유였다.

“올해가 마지막이겠네. 여기도.”

“…아….”

마지막이라는 말에 마음이 철렁한 이겸이 꽃가지를 매만졌다. 권태정의 말대로 여기 와서 이렇게 꽃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봄과는 멀어지고 여름과 더 가까워진 6월이 오면 이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

늘 꽃을 보러 왔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앉아 오랫동안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인데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 마지막을 권태정과 함께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내년에도 같이 보고 싶다는 작지만 아주 큰 바람을 이룰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매번 봐도 계단 아래에서 잠깐 보고 갔었어요. 이렇게 앉아서… 오랫동안 본 건 처음이에요.”

“…….”

“…처음인데 이게 마지막이라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해요.”

이겸의 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여 그 얼굴을 본 권태정이 침음했다. 분홍색 남방을 걸치고 꽃나무 아래 있어서 그런지 볼 때마다 너무 예뻐 할 말은 자꾸만 잊고, 만지고 싶다는 충동만 들끓었다.

“사라지는 거에 너무 큰 의미 두지 마.”

“…….”

“너만 힘들어. 그리고 사라지면 또 생기더라. 여기는 사라져도 또 다른 좋은 데가 생길 거야. 내가 찾아볼게.”

“…….”

“내년에 꽃 피기 전까지.”

꼭 내년에도 같이 꽃을 보러 갈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제가 생각한 게 맞는지 묻고 싶었지만, 혹시 권태정도 그 ‘사라지는 것’중 하나일까 봐 묻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6월이 오기까지는 이제 두 달, 여기가 무너지기까지는 겨우 두 달하고 보름이 남아 있었다. 이겸은 백 일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며 괜히 권태정이 준 꽃가지만 만지작댔다. 지금 제가 뭐에 이렇게 속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다시 꽃을 볼 수가 없다는 거? 아니면…. 철거를 하고 나면 권태정과 만나는 것도 끝이라는 거?

“속상해?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다정한 목소리가 따뜻한 공기 중으로 퍼져 귓가와 얼굴에 닿았다. 이겸은 저를 보고 있는 권태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다시 마주하자 권태정이 웃었다. 이겸은 이제 권태정이 웃을 때마다 무너졌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장님, 저는 뭐가 속상한 걸까요? 평생을 살아온 다람동이 무너지는 거? 처음으로 앉아 본 꽃나무 그늘이 이제는 사라진다는 거? 그것도 아니면 여기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실장님과 만나는 일도 없게 될 거라는 거?

전에 이곳에 있던 사람들처럼 차라리 저를 보기만 하면 욕을 하고 협박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역시 깡패는 깡패라고, 그런 사람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얼른 두 달이 훌쩍 지나 다시는, 다시는 안 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지만 저에게 닿는 웃음과 손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머리를 쓰다듬다가 뺨을 매만지는 손길도, 살짝 떨어져 앉아 있던 몸이 어느새 틈도 없이 붙은 것도, 꽃이 드리워져 생긴 그늘보다 설레는 권태정의 그림자도….

“…으응….”

어느새 닿은 입술 안에서 혀가 가볍게 문질렸다. 이겸은 이제 권태정이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혀끝이 닿아 살짝 비벼지기만 해도 몸을 움츠리고, 다리를 오므렸다. 목에서는 너무나 쉽게 간지러운 소리가 울리고, 안 그래도 따뜻한 뺨은 권태정의 손길에 따라, 움직임에 따라 미열이 올랐다.

권태정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새 기다려졌다. 연락만 기다리고 있고, 너무 힘들어 눕기만 하면 기절하듯 잠들었던 전과는 달리 잠들기 전 늘 권태정을 생각했다.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지도 잊고 오로지 눈앞의 다정함만을 좇았다. 이겸은 깡패를 좋아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얼마 전의 권태정을 보면서도 생각했었다.

흔들리고 자꾸 기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때는 그 정도 말로도 기울던 마음이 바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되지 않았다. 제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저의 말보다는 마음을 뒤흔드는 권태정의 말에 더 기울어지고, 그 손길에, 입술에, 끌어안는 두 팔과 짙은 향기에 더 마음이 갔다. 권태정을 보느라 다른 것을 볼 여력이 없었다.

이겸은 맞물려 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지는 것에 눈을 떠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달아올라 열기를 머금은 숨이 마주 닿는 게 좋았다.

권태정이 또 웃었다. 그리고 이겸은 조금 더 무너졌다. 다시 다가오는 얼굴을 보며 눈을 감고 입술을 마주 머금었다. 날이 참 따뜻한데도 혀끝이 문질리고 빨릴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오싹했다.

이겸은 제 혀를 옭아맸다가 풀고 입 안을 헤집는 권태정을 느끼며 용기를 내어 살짝 혀를 움직여 보았다. 그에 권태정의 숨이 거칠어지며 잡아먹을 듯 키스가 급해졌다. 페로몬도 강해져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서 힘이 쭉 빠질 정도였다.

“…으응, 아…. 실, 실장님, 흐읍….”

이겸은 커다란 몸이 저를 밀고 오는 것에 뒤로 기울어지다가 달래는 것처럼 권태정의 뺨을 어설프게 매만졌다.

눈이 뒤집힌 것처럼 굴던 권태정의 움직임이 잦아드는 걸 느낀 이겸은 그래도 못 견디겠다는 듯 떨어지지 못하게 제 머리를 누르고 키스하는 권태정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이겸은 깡패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겸의 절대는 이미 깨졌다.

* * *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 간병인에게 온 전화를 받은 이겸은 사색이 된 채 카페 사장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이겸의 사정을 아는 사장은 자신의 가족을 보냈고, 초조함에 발만 구르며 기다리던 이겸은 사장의 가족이 도착한 것과 동시에 카페를 뛰쳐나가 택시를 탔다. 그리고 간병인이 말해 준 태성병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안 좋으셔서 병원으로 갔으니 집에 가지 말고 병원으로 오라는 말을 들은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돌아가신 것 아니니 너무 놀랄 건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병원에 실려 가실 만큼 안 좋아지셨다는 게 너무 슬퍼서 계속 눈물만 나왔다.

병원에 도착한 이겸은 얼른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간병인을 본 이겸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할아버지는요? 어디 계세요?”

“중환자실에 계셔.”

“중환자실이면… 많이 안 좋으셔서 가신 거죠?”

“일단 아까 처치는 해서 위독하지는 않으신데 연세도 많으시고, 불안정한 부분들이 있어서 하루 이틀은 중환자실에 계시는 게 좋대.”

“…그럼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라는 거 맞죠.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거 아니죠?”

“응, 오늘은 그 고비 넘기셨다고 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중환자실 면회는 내일 아침 8시에 된다니까 오늘은 집에 가서 자고.”

고비를 넘기셨다는 말에 눈물을 닦은 이겸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도 편찮으신데 제가 집에 가서 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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