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49화 (49/174)

#49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 이겸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으로 옷을 벗었다. 새벽에 집을 나가서 권태정과 있다가 차에서 같이 잤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할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

벗은 옷들을 뭉쳐 빨래통에 넣으려던 이겸은 뭔가를 느끼고 그것들을 다시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실장님 냄새….

제 옷에서 권태정의 향기가 났다. 너무 좋아서 내내 맡고 싶은 그 페로몬 향이. 차에서 밤새 같이 붙어 있는 동안 잔뜩 묻은 모양이었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티셔츠에 완전히 코와 입술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옷에 밴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

미쳤나 봐, 정말. 이겸은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놀라 얼른 들고 있던 옷들을 빨래통에 넣었다.

약하게 흥분이 묻은 몸을 애써 무시한 이겸은 씻는 내내 권태정을 생각했다.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의 모든 것이 떠올랐다. 차 안에 앉아 저를 보고 웃던 그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추던 웃음이, 뒤섞이던 숨과… 저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움직일 때의 그 느낌과 여유 하나 없는 그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겸은 수압이 약해 물이 쫄쫄 나오는 샤워기를 늘어뜨린 채 바닥으로 쪼그려 앉아 두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자꾸 권태정을 생각하며 흥분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겸에게는 무척 벅찬 일이었다.

단순히 부끄럽다는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고, 솔직히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더 문제는 그런데도 권태정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치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겠는 지금, 이 순간에도 권태정을 떠올리고 있는 제가 너무나 이상했다.

이겸은 바깥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훌쩍이며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부디 수챗구멍으로 빨려들어 가는 물줄기처럼 저의 이 부끄러운 열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씻고 나온 이겸은 간병인이 사 온 카스텔라를 우유와 함께 먹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부실해 보이는 점심이지만, 이겸에게는 꽤 훌륭한 점심 식사였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간병인에게 말한 이겸은 할아버지가 틀어 둔 드라마 소리를 들으며 충전해 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

제가 집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대리 기사가 왔을 거고, 집까지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여기에 오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이었다.

차에서 그 큰 몸을 구기고 자느라 몹시 힘들었을 테니 조금 쉬고 올 수도 있었다. 이겸은 겨우 한 시간이 지난 지금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내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겸 학생은 여기 철거하면 어디로 갈 거야?”

“네? 아….”

드라마를 보다가 잠이 드신 할아버지에게 이불을 덮고, TV 전원을 끈 간병인이 이겸에게 소리 죽여 물었다. 이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여기 나가면 갈 데가 아무 데도 없거든요. 저만 나가면 싼 고시원이라도 들어가서 살 텐데…. 혼자가 아니라 이런 집이라도 구해야 하는데 아직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아까 오다가 보니까 어떤 집도 나가는 모양이더라고. 그거 보니 학생은 6월에 어디로 갈지 궁금해서.”

요 며칠 설렘과 떨림 같은 감정들만 맺히던 마음 안으로 현실적인 걱정이 내려앉았다. 늘 떠올리던 걱정이고, 너무나 익숙한 것인데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물들어 버린 새로운 감정들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겸은 요즘 제가 얼마나 현실을 외면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감정에만 충실하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철거되기 전에 달동네들 가 보려구요.”

“힘들어서 어떡해. 내가 뭐라도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같이 가 봐도 되고.”

“…감사합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이겸이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려 얼른 화면을 확인했다. ‘실장님’이라는 글자에 내려앉은 걱정 위로 쿵쿵 심장이 또 요란히 뛰기 시작했다. 이겸은 대충 남방 하나를 손에 들고 바깥으로 서둘러 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나 지금 출발하려고 나왔어.

“벌써요?”

-어, 나 다시 들어갈까? 너무 빨리 나온 거야?

“그게 아니라…. 피곤하실 것 같아서요. 좀 쉬다가 오실 줄 알았거든요.”

-아까 집에 갈 때는 좀 피곤했는데 와서 씻고, 커피 마시고 나니까 멀쩡해졌어.

권태정의 목소리는 이겸에게 분명한 위로가 되었다. 제 미래를 걱정해 주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우울해진 마음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지금 권태정이 저에게 오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겸은 위로를 받았다.

참 모순적인 일이었다. 권태정은 가족도 아니고,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주민도 아니고, 굳이 나누자면 여전히 반대편에 있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요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철거촌 관리 용역과 웃고, 밥을 먹고… 키스를 하고, 그보다 더한 것을 하다가 이제는 걸려 온 전화에 위로까지 받는다는 게 너무나 낯설고 어색하지만… 좋았다.

-어, 이겸아.

“…네?”

-꽃 피었다.

“…….”

-철거촌, 집, 철거촌, 카페, 또 철거촌, 집. 이렇게만 다니다 보니까 꽃 필 때 된 것도 몰랐네.

다정한 목소리. 이겸은 어느새 차가운 기운이 모두 사라진 따뜻한 낮의 공기와 마주했다. 꽃이 핀 것을 저에게 말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같이 보러 갈까?

같이 보러 가자고 하는 사람도. 일이나 돈, 집 이야기가 아닌 일로 저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도 모두, 모두 처음이었다. 이겸은 또 괜히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네. 좋아요.”

마음에 뭉친 걱정 위를 또다시 권태정이 뒤덮었다. 권태정의 다정함은 약해진 이겸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이겸은 마음을 뒤흔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괜히 발로 까끌까끌한 모래를 문질렀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

빨리 권태정이 보고 싶었다.

이겸은 결국, 권태정이 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렸다. 대문 앞에 있다가 골목 어귀로 나가 조용한 철거촌에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날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태정의 차가 가까이 왔을 때 이겸은 몹시 들뜨는 마음을 애써 짓눌렀다.

“나 기다린 거야?”

혹시 권태정이 왜 나와 있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던 이겸은 기다린 거냐고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권태정은 종종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의 질문을 하고는 했다.

“아…”

“헤어진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그새 내가 보고 싶었어?”

“…그, 그런 정도는 아니에요.”

이겸의 말에 웃은 권태정이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훌쩍 위로 솟는 존재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이겸이 아침과 달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서운해라. 난 그런 정도로 보고 싶어서 빨리 온 건데.”

싱긋 웃은 권태정이 이겸의 살짝 달아오른 뺨을 톡 건드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걸치고 있는 약간 가라앉은 톤의 분홍 체크 남방이 하얀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렸다.

“꽃 보러 간다고 골라 입은 거야?”

“네?”

권태정의 말에 고개를 숙여 분홍색 남방을 본 이겸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전화 와서… 그냥 보이는 거 아무거나 가지고 나온 거예요. 꽃 이야기하기 전에…”

“뭐야, 그럼 그때부터 쭉 여기서 기다린 거야?”

“…….”

“나 되게 보고 싶었나 보다.”

기분 좋다는 듯 웃는 권태정을 본 이겸이 변명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를 따라 작게 웃었다. 그때부터 여기서 쭉 기다린 게 맞아 사실 뭐라고 할 말이 없기도 하고, 굳이 그걸 숨겨야 한다는 생각도 이제는 들지 않았다.

“아, 꽃 보러 어디로 가는 게 좋지. 사람 존나 많을 텐데. 평일이라 좀 덜 하려나. 그런 걸 보러 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그런 건 진우가 잘 아는데 걔 지금 기절해 있을 거라.”

저보다 훨씬 많이 취해 조현준과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대던 백 비서를 떠올린 권태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도 연락 한 통이 없는 걸 보면 완전히 뻗어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검색 좀 해 보자. 좀 조용하고… 그런 데 없나.”

차에 기대어 서서 휴대폰을 보는 권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겸이 뭔가 생각난 듯 권태정의 슈트 옷자락을 살살 당겼다.

“저… 여기도… 있기는 한데….”

“여기? 뭐가?”

“…세탁소집 옆에 계단이 있어요. 거기 벚꽃 피는 나무가 있는데 아마 올해도 피었을 거예요. 작년에도 지나가다가 꽃 핀 거 봤었거든요.”

“그래? 여기 그런 게 있다고? 가 보자.”

“그런데 많이 있지는 않아요. 큰 나무 두세 그루?”

많이 있지는 않다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혹시 제가 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이. 권태정은 이겸의 손목을 잡고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 손가락을 걸어 흔들었다.

“그거면 충분해. 같이 볼 수 있기만 하면 되지. 얼른 가 보자. 보고 싶어.”

손등이 덮일 만큼 길게 늘어진 소매 아래로 권태정의 손가락이 느껴지는 것에 머뭇대던 이겸은 살짝 그 손가락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세 걸음 정도 옮겼을 때 권태정의 큰 손이 제 손을 완전히 덮는 느낌이 났다.

두근댐을 눌러도 눌리지 않는 마음으로 이겸은 세탁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 동네는 봄이 찾아왔는데도 여전히 한겨울처럼 황폐해 보였다.

“여기에요.”

세탁소 옆 골목으로 들어가자 위로 오르는 계단과 함께 흐드러지게 꽃이 핀 벚나무가 보였다. 권태정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꽃나무를 놀랍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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