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48화 (48/174)

#48

“더 자자, 그냥.”

반쯤 품을 벗어난 이겸을 다시 눕혀 단단히 끌어안은 권태정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벗어나려고 바르작대던 이겸은 도저히 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몸에서 힘을 뺐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안겨서 자 보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아 신기했다.

“…실장님, 진짜 주무세요?”

이겸은 진짜 다시 잠이 든 권태정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다가 빨개진 얼굴을 내려 그냥 권태정의 품에 살짝 파묻었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잠시라도 숨어 있고 싶었다.

“…….”

조용한 곳에서 규칙적으로 흐르는 권태정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겸의 눈도 서서히 다시 감겼다.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은 이겸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저를 꽉 끌어안은 단단한 팔에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안정을 느낀 채.

권태정은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제 품에서 자고 있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보송보송한 얼굴이 아직도 애기 같았다. 권태정은 한참이나 이겸의 깨끗하고 예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솜털이 보이는 뺨을 건드리기도 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흔들기도 했다.

결국, 이겸은 뺨에 닿는 간지러운 느낌에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저를 보고 있는 권태정을 보며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권태정도 그걸 막지 않았다.

“아…. 차에서 잔 건 또 처음이네.”

차가 워낙 좋아 뒷좌석이 넓고, 자리도 푹신하다지만, 그래도 차는 차였다. 집에서 잔 것만큼 편할 수는 없었다. 권태정은 뻐근한 목과 어깨를 느릿하게 풀었다. 아무리 차가 크다고 해도 190cm에 육박하는 권태정이 자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불편했지, 미안. 집에 보내려고 했는데 잠들어 버렸어.”

“…전 별로 안 불편했는데 실장님은 불편하셨을 것 같아요.”

“몸 구기고 자서 그런가. 좀 뻐근하긴 하네. 이래서 술 마시면 안 돼. 아니, 마셔도 얌전히 집에나 가서 처자야지.”

권태정의 말에 이겸은 조금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도 되나 싶어 망설여졌다. 저에게 닿는 이겸의 시선을 본 권태정이 싱긋 웃으며 고개까지 기울여 가까이에서 눈을 맞췄다.

“그래도 여기 온 거 후회 안 해.”

“…….”

“좋았어, 난.”

“…….”

“넌?”

“…기억나세요?”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권태정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은 얼굴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나랑 전화하다가 네가 차로 왔고, 또 키스도 했고…. 아, 같이 자지도 비볐잖아.”

이겸은 안도와 충격을 동시에 받았다. 안도는 권태정이 전부 기억한다는 것이고 충격은 권태정의 노골적이고 전혀 정제되지 않은 단어의 선택 때문이었다.

“아, 좀 자다가 깨서 네가 싼 것도 닦고, 바지도 입혀 줬어. 잘했지.”

“…정말요? 전 기억이 안 나는데….”

“너 잘 때 했어. 닦아 줘도 모르더라.”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사이에 권태정이 제 성기를 보고, 또 사정한 것을 닦았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겸은 연이어 찾아온 충격에 멍하니 반쯤 정신을 놓고 눈만 깜빡였다.

“그런데 기억나는지는 왜 물어봤어? 왜, 내가 할 거 다 해 놓고 기억 못 할까 봐 걱정했어?”

“…걱정한 건 아니고….”

“응, 걱정은 아니고.”

자고 일어나서 낮아진 권태정의 목소리가 차 안으로 울렸다. 권태정이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만지며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오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 왔다.

“……그래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서…. 혼자만 기억하기에는 큰일이잖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큰일이라 말하는 이겸을 본 권태정이 웃으며 아침에도 보송보송한 뺨을 살살 매만졌다.

“어떻게 잊어. 이렇게 예쁜걸.”

“…….”

“잊으면 씨발, 그게 사람 새끼야?”

손끝으로 목소리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겸은 부끄러워져 시선을 내리깐 채 가만히 권태정의 손길을 한참이나 느꼈다. 조물조물 제 뺨을 밀가루 반죽 만지는 것처럼 만지는 게 간지럽기도 하고, 또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제 너도 대답해 줘. 어제 좋았어?”

“…….”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집요하게 되묻는 권태정의 목소리가 뺨과 귓가 그리고 그가 내내 닿았던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이겸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겨우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좋았으면 됐어.”

소리 내서 말하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이겸은 다행히 더 파고들지 않는 권태정을 보며 괜히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아침이라 그런지 권태정의 페로몬 향이 평소보다 더 짙게 느껴져 자꾸만 저절로 시선이 갔다.

“난 집에 좀 갔다 와야겠다. 가서 씻고, 옷도 좀 갈아입고.”

“…네….”

“아, 억제제도 먹어야지.”

억제제 이야기에 눈만 끔벅이는 이겸을 보고 웃은 권태정이 다시 상체를 확 기울여 이겸의 얼굴 가까이로 제 목덜미를 들이댔다.

“어때? 억제제 안 먹어서 향 더 짙어?”

눈앞에 있는 권태정의 목덜미를 본 이겸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새벽에 정신없이 몸을 마주할 때 맡았던 깊고 짙은 향이 몸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순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맺혔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권태정의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

분위기를 조금 더 풀어 보려는 짓궂은 장난에 도리어 놀란 것은 권태정이었다. 권태정은 떨리는 두 팔이 제 목을 끌어안는 이겸을 보며 당황해 잠시 눈동자만 굴려 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겸의 스킨십에 순간 텅 빈 머릿속으로 달착지근한 복숭아 향이 파고들었다.

닥치는 대로 아무 곳이나 깨물어 삼켜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삼킨 권태정이 두 팔로 이겸의 작은 몸을 꽉 단단히 마주 안았다.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살살 안을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억제제 그냥 다 버려야겠다. 그럼 맨날 안아 줄 거 아냐.”

귓가로 파고드는 말에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이겸이 얼른 권태정의 목에 두른 팔을 풀어냈지만, 몸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놔, 놔주세요.”

“왜. 먼저 안은 게 누군데.”

“그, 그건….”

페로몬 때문이라고 말하려던 이겸은 결국,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이유가 페로몬 단 하나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달싹대서 귓가를 간지럽히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이겸이 귀여워 웃은 권태정이 그 귓가와 뺨에 연달아 입 맞추며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을 파고들어 가볍게 혀를 섞었다.

“…으음….”

입술이 닿기도 전에 눈을 질끈 감더니 닿는 순간 입술을 포옹 벌리는 게 지나치게 귀여웠다. 권태정은 혀끝을 문질러 줄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는 이겸을 따뜻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보다가 마지막으로 혀를 쪽 소리가 나게 빨며 입술을 떼어 냈다.

“이겸아. 우리 두 달만 연애할까?”

“……네?”

“아니, 넌 깡패는 싫은데 난 좀 괜찮은 것 같고, 난 어린애는 별로인데 넌 좋으니까.”

“…….”

“살면서 이런 기회 또 없을 거 아냐.”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말하는 얼굴이 제법 진지해 머릿속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겸은 큰 몸을 구긴 채 불편하지도 않은지 저에게 딱 달라붙어 말하는 권태정을 보며 눈만 겨우 깜빡였다. 그것이 지금 이겸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의 전부였다.

“왜, 깡패랑 연애하는 게 쪽팔려서 싫어? 그럼 내가 깡패 아니면 할래?”

다시 입술을 겹치는 권태정과 또 한참이나 혀를 섞은 이겸이 헐떡이며 옆에서 나는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발을 놓는 곳에 제 휴대폰이 떨어져 진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겸은 그것을 주워 ‘할아버지’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 아…. 저 아침에, 아침에 나왔어요. 아, 아르바이트는 아니고…. 잠깐 누구를 좀 만나러…. 어제 나간 거 아니고, 아침에요. 네, 아침에….”

계속 아침이라고 강조하는 게 귀여워 소리 죽여 웃은 권태정이 장난스럽게 이겸의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놀라서 권태정을 본 이겸이 통화 중인데 다시 입술을 파고드는 권태정을 머금으며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귀에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입 안에서는 혀가 문질리고, 빠는 소리가 들렸다. 이겸은 다시 권태정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 약한 저지에 옭아맸던 혀를 풀어 준 권태정이 상기된 얼굴로 저를 보는 이겸과 눈을 맞춘 채 싱긋 웃음 지었다.

“…아…. 약 보셨어요? 그거 아파서 먹는 약 아니라… 억제제예요.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그리고 지금 들어갈 거예요. 네…. 네, 얼른 들어갈게요.”

전화를 끊은 이겸은 완전히 통화 종료가 된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저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삼십 분은 걸린다고 하지. 오 분은 너무 정 없다, 자기야.”

몸을 떼고 널찍한 자리로 앉은 권태정이 이겸의 휴대폰과 마찬가지로 차 어디인가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휴대폰을 찾아 대리 운전을 호출했다. 아침이라 운전을 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이겸을 만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왜?”

“…조, 조금 전에 뭐라고….”

“자기 정 없다고.”

이겸은 또 충격을 받은 얼굴로 권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런 부끄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하는지 너무 신기했다. 문득 강지훈의 친구가 저에게 이상한 말을 할 때 왔던 권태정이 저에게 ‘자기야.’라고 했던 게 떠올라 더 부끄러워졌다.

“…저, 저는… 연애… 할 거라고… 대답 안 했는데요….”

“응, 알아. 갑자기 그건 왜?”

“……그런데 왜… 자기라고….”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웃은 권태정이 삼십 분 안에 도착한다는 대리 기사의 문자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대충 옆으로 던졌다.

“그냥 깡패 새끼가 나랑 어지간히 연애하고 싶은가 보다 하고 넘겨.”

“…….”

“오 분 지났어, 자기야.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천연덕스럽게 말한 권태정이 이겸의 말랑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 말에 놀란 이겸이 얼른 휴대폰을 챙기고 권태정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먼저 가 볼게요.”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정말 바로 앞인데…. 피곤하시잖아요. 저 갈게요.”

“이따 다시 올 때 전화할게.”

“…네.”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살짝 고개 숙여 다시 인사한 이겸이 뒤돌아 멀어졌다.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골목으로 쏙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권태정이 거의 무너지듯 뒤로 몸을 푹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겸은 갔고, 아직 대리 기사가 오기까지는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제대로 느끼지 못하던 피로가 온몸을 뒤덮으며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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