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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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조현준은 오메가를 함부로 대하는 걸 절대 용서치 않는 권태정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첫눈에 반한 첫사랑 오메가와 긴 연애 끝에 결혼한 재벌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으로 아주 유명한 분이신 것과 동시에 엄청난 애처가셨다.
그래서 우성알파인 세 남매에게 어릴 때부터 늘 오메가를 절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치고 또 가르치셨다는 이야기를 삼 남매에게 여러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오메가를 쉽게 대해 사고를 치는 순간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는 말을 하도 듣고 자란 삼 남매는 전부 우성알파임에도 불구하고 러트를 오메가와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러트가 임박하면 삼 남매가 호르몬 주사를 맞으러 오고, 그 덕분에 이 센터가 빵빵한 후원금과 함께 유지될 수 있었다.
“야, 회장님께 내가 그런 말했다고 절대 말씀드리지 마. 병원 망한다.”
“너 하는 거 봐서.”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아 간 권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쉰 조현준이 턱을 괴고 싱긋 웃는 잘난 낯짝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필요한데?”
“일단 한 3개월 정도 먹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약국에서 파는 거 먹는데 알잖아. 중요할 때 효과 하나도 없는 거.”
“알았어. 아직 어리니까 너무 독하지 않게 줄게.”
“그래도 효과는 있어야 돼, 확실히.”
“응. 보통 알파들한테는 확실히 억제될 거야. 우성한테는 좀 오메가인 티가 나겠지만. 아니면 완전 베타처럼 될 만큼 세게 줘?”
전에 한 번 억제제 부작용으로 베타처럼 오래 지냈다는 걸 아는 권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를 일이니 처음부터 너무 센 걸 먹여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겸의 생활권에서 저 외에 우성알파를 만날 일은 극도로 희박하니 저만 조심하면 될 것이었다. 조심을 못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억제제 부작용이 있었다는데 먹어도 될까?”
“부작용? 어떤 부작용. 뭐 메스꺼움이나 두근거림 그런 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억제가 너무 심하게 돼서 아예 페로몬도 안 나오고, 알파 페로몬도 감지를 못했다고 하더라고. 히트도 없고.”
“와, 그 정도 부작용이면 뭐 이상한 억제제 먹었나 본데?”
처방전을 뽑은 조현준이 권태정에게 내밀기 전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손을 내밀었다.
“너 그런데 이 나쁜 새끼야. 뭐 스무 살?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스무 살짜리 머리채를 잡아서 뭐 꿇리고 싶어?”
“안 꿇렸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곧 꿇릴 거잖아. 대신 억제제까지 처방받아다 주는데 안 봐도 뻔하지.”
“지랄하지 말고 주기나 해.”
상종을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조현준이 군소리 없이 권태정에게 처방전을 건네주었다.
“그래도 이상한 억제제 먹은 걸로만 끝나서 다행이네.”
“무슨 소리야?”
“그런 약 마약 만드는 애들이 만들거든. 효과는 끝내주는데 완전히 페로몬 다 말려 버리는 거지. 그럼 이제 걱정이 되니까 또 알음알음 페로몬 되살릴 수 있는 약들을 찾거든. 그럼 그때 회복할 수 있다고 또 자기들이 만든 약을 파는 거야. 그거 먹으면 페로몬이 확 증폭되는데…. 그때 정신 못 차리는 오메가 데려다 팔고 그런다더라.”
“지랄들을 한다.”
“내 말이.”
어깨를 으쓱한 조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권태정을 올려다보았다. 처방전을 반으로 접은 권태정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 밥이나 한번 먹자. 술 마시든지.”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도 돼?”
“응. 정해서 보내. 예약도 하고.”
“나 내일모레 오프야. 엄청 기대한다, 나?”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권태정이 원장실을 나섰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처방전을 받아 다행이었다. 이 약만 있으면 한동안 이겸이 알파들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 그냥 진짜 집으로 데려다 놓을까. 어르신은 간병인이랑 잘 지내시잖아. 딱 두 달 반만 손주를 빌려 달라 그러면 안 될까.
“…….”
두 달 반. 구체적으로 남은 시간을 떠올리자 마음이 일렁였다. 두 달 반만 조용히 지내면 아무 문제도 없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람동은 원래 계획대로 깨끗하게 밀리고, 저는 원래 제가 있던 태성그룹 실장 자리로 돌아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었다.
끝? 끝이라는 말에 시동을 거는 것도 잊고 잠시 운전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권태정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깊게 기댔다. 저를 보고 웃던 이겸의 얼굴을 떠올리니 명치가 답답해졌다. 끝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럼 넌 뭘 하고 싶은데? 끝이 아니면 시작을 하고 싶은 거야? 시작한다면 연이겸이랑 뭘 시작하고 싶은 건데? 하나의 질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으로 다른 질문까지 줄줄이 펼쳐졌다. 핸들을 반복적으로 탁탁 두드리던 권태정은 지끈대는 머리에 고개를 젓고 시동을 걸었다.
아무래도 답을 찾으려면 이겸에게 가야 할 것 같았다.
* * *
햇빛이 잘 드는 테라스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권태정이 하얀 약통을 꺼내 테이블에 놓고 이겸의 앞으로 쭉 밀었다. 아이스 초코를 조금씩 마시며 빨대를 물고 있던 이겸이 제 앞에 놓인 약통을 집어 들었다.
“억제제.”
“아…. 감사합니다.”
“아침에 두 알씩 먹으면 돼. 웬만한 알파 차단은 될 거야.”
억제를 돕는 약 성분이 적힌 라벨을 보던 이겸이 슬쩍 커피를 마시는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이걸 주려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을 걸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또 죄송하기도 했다.
“아까부터 왜 몰래 봐? 대놓고 봐도 되는데.”
음료 잔을 옆으로 밀고 이겸을 향해 상체를 기울여 고개를 쭉 뺀 권태정이 생글댔다. 가까워진 얼굴에 놀란 이겸이 또 시선을 피한 채 차가운 음료 잔만 만지작댔다.
“뽀뽀한 거 때문에 그래?”
“…그, 그건….”
“뽀뽀하고 튀어서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튀, 튄 게 아니라 집에… 그냥 빨리 들어간 거예요.”
“키스도 했는데 뭐 뽀뽀 하나로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 뽀뽀 하나로 다리에 힘이 풀려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는 말은 쏙 뺀 권태정이 놀리듯 묻는 말에 이겸은 애꿎은 빨대 끝만 입술로 오물거렸다.
“…실장님은 안 그러실 수도 있지만….”
“…….”
“저는… 그래요….”
권태정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키스를 했다고 해서 뽀뽀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겸에게는 똑같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겸은 저에게 닿는 권태정의 시선에 또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잔을 잡고 있어 차가워진 손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지금도 깡패는 싫어?”
“…어떤 의미로요?”
“음, 의미라.”
뒤로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권태정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제야 저를 바라보는 이겸에게 시선을 흘끗 주었다.
“연애 상대로?”
“…연애요?”
“응. 날 며칠 더 겪어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나 궁금해서. 어때. 이제 나 좀 잡아서 편하게 살 생각 생겼어?”
확실히 권태정이라는 사람을 더 겪어 보니 처음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었다. 거친 면보다 다정한 면이 더 많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또 만나는 게 부담스럽고, 또 두렵기까지 했던 전과 달리 요즘은 같이 있는 게 싫지 않고,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또…….
‘키스할래?’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들을 잔뜩 했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의 느낌과 두근거림이 사라지지 않아 권태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얼굴과 몸 여기저기가 화끈댈 정도였다. 분명히 이대로라면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전 그래도…. 깡패는 안 좋아할 거예요.”
그래도 깡패는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일을 하고, 늘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안 그래도 걱정할 게 많은 매일에 또 다른 걱정과 불행을 스스로 만들어 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겸은 바라만 봐도 두근대기 시작한 권태정을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 같은 것은… 혼자 얼마든지 누를 수 있을 테니까.
“이상하다. 어제 키스할 땐 좋아 보였는데.”
혹시 화가 났나 싶어 권태정의 얼굴을 살핀 이겸이 마음과 목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앞으로 나랑 키스 안 할 거야?”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난 하고 싶은데.”
“…….”
“좋아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턱을 괸 채 그냥 아주 간단한 일인 것처럼 말한 권태정이 일렁이는 이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겸의 마음은 저 눈만 보면 다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런 건 좋아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되잖아. 어차피 우리한테 시간은 정해져 있고, 좋든 싫든 계속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그딴 고민 때문에 어색하게 봐서 좋을 게 뭐야?”
“…….”
“이제 3개월도 안 남았어. 한… 두 달 반 정도 남았는데 그냥 편하게 보내자.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벌리며 관계 정립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태정은 계속해서 이겸을 당기고 있었다. 이겸은 그런 권태정에게 속수무책으로 계속해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 일 끝나는 날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
“…….”
“나랑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지.”
“…….”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너도 그냥 편하게 있어. 절대 나 좋아하지 말고.”
씩 웃은 권태정이 음료와 함께 주문했던 마카롱을 이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많고 많은 디저트 중에 먹고 싶은 걸 고르라니까 한참을 보다가 이겸이 가리킨 것이었다.
“그때까진 나도 내가 해 주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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