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열 소년-42화 (42/174)

#42

“조심 안 하면 너 깡패랑 결혼한다?”

“…….”

장난스럽게 웃은 권태정이 이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트렸다.

“나도 억제제 늘 먹고 있으니까 너도 내가 먹는 걸로 잘 먹으면 별문제 없을 거야.”

“…그럼… 실장님 계속… 만나도 되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닿아오는 말은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권태정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작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 오메가인 거 알아서 내가 이제 안 만날까 봐?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안 봤어야지. 난 너한테 인사 갔을 때부터 알았는데.”

“…그땐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실장님만 아실 정도였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알 정도고, 다시 억제제를 먹어야 할 정도니까…. 저 때문에 실장님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뭐가 불편한데?”

“……제가 페로몬 조절 못 하기라도 하면….”

이겸의 말에 소리 내어 웃은 권태정이 신호에 걸려 서며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려 걱정이 가득한 이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페로몬 조절 못 하게 한 게 나야.”

“…네?”

“네 향 더 맡고 싶어서 여태까지 건드린 게 나라고.”

“…….”

“조절 못 하면 나야 고맙지. 네 향 진짜 좋거든. 복숭아 향 같기도 하고, 요거트 향 같기도 하고.”

저에게서 나는 페로몬 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향이 좋다는 말에 이겸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 들었어요. 제 페로몬 향이 어떤 향인지….”

“간단히 말하면 고개 처박고 핥고 싶은 향이야. 그러다 콱 씹어 먹고 싶은 그런.”

“…….”

“비 올 때 맡으니까 씨발, 머리 돌더라.”

권태정의 입에서 비 오던 날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에 이겸의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감정이 짙어지고 몸에 열이 오르자 새콤하고 달착지근한 복숭아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권태정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침음했다.

“그날.”

“…….”

“실수 아니야.”

“…….”

“후회도 안 해.”

“…….”

“좋았어.”

말 하나하나가 이겸의 귓속을 타고 들어가 마음으로 뚝뚝 떨어졌다. 말이 조금도 아프지 않고 너무나 부드럽고 다정해서 이겸의 마음을 더욱 말랑하게 만들었다. 실수였다고 해도, 충동이었다고 해도 이겸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제가 오메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더더욱 쉽게 충동을 느꼈을 것이었다. 원래 알파와 오메가는 페로몬으로 쉽게 충동을 느낀다는 것 정도는 이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권태정은 조금도 이겸의 마음이 찔릴 수 있는 뾰족한 말을 하지 않았다. 실수, 후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뾰족한 말을 부드럽게 만들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 주었다.

실수 아니야, 후회도 안 해. 좋았어. 이겸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울 일도 전혀 아니고,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아 우는 것도 싫은데 자꾸만 속눈썹이 축축해졌다.

낮에 통화하며 들은 권태정의 목소리가 어쩐지 쌀쌀맞게 들리고, 또 키스하고 난 다음 며칠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고, 얼굴도 보이지 않아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충동으로 인한 실수를 마주하고 나자 저 같은 것과 닿은 게 불쾌한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었고,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겸은 며칠 내내 작은 방 안에서 가만히 그런 뾰족한 모양의 생각들을 하며 숨을 쉬다가 그래도 다정했던 손길과 눈빛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었다.

“난 그런데 넌 놀랐을 것 같아.”

“…….”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렇게 밀어붙이면 안 되는 건데. 씨발, 나이 처먹고 어린애한테.”

이겸이 떠올리는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와서 축축하고, 흙냄새와 비의 내음 사이로 그보다 좋은 권태정의 향이 나는 그런 날이었다. 맞닿은 입술이 뜨겁고, 권태정이 가득 찬 입 안도 참 뜨거워서 눈앞이 빙빙 돌고, 자꾸만 매달리고 싶었던 기억뿐이라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기분… 안 나빴어요….”

“…….”

“조금… 처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싫었던 건… 아니에요.”

싫었다면 저를 데려다주고 다시 입술을 겹치던 권태정을 밀어냈을 것이었다. 싫다는 말이라도 나왔을 텐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순간에 싫다는 생각이 맺힌 적은 없었다.

“그럼 좋았어?”

“…해 본 적이 없어서… 좋았던 건지 제가 잘… 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랑 한 거 혼자 생각 했어, 안 했어.”

“……했어요.”

“자위도 했어?”

이런 상황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 나오는 것에 놀란 이겸이 얼굴까지 빨개진 채 권태정을 바라보았다. 권태정은 여상한 얼굴로 뭐 못할 말을 했냐는 듯 이겸을 흘끗 바라보았다.

“했구나.”

“아, 안 했어요.”

“에이.”

“…저, 정말이에요. 하, 할아버지도 계시고….”

“아, 할아버지 계셔서 하고 싶은데 못 했구나.”

너무 뻔뻔한 권태정의 말투에 이겸은 오메가인 걸 들켰을 때보다 더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반박을 해야 믿어 줄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난 혼자라 했는데.”

“…뭘요?”

“우리 지금 자위 얘기하고 있었는데.”

“…….”

당황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다시 자위라는 말을 들은 이겸이 아예 창 쪽으로 몸을 돌려 어두운 바깥만 바라보았다. 얼굴이 화끈대고 심장이 막 빠르게 뛰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꼭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매일 네 생각하면서 했어.”

“…….”

“씻다가도 하고, 자려다가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이, 이상한 말씀하지 마세요….”

“진짠데.”

그게 진짜든 아니든 말을 듣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권태정이 말하는 장면들이 펼쳐져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권태정의 집에 가 봐서 아는 욕실과 침실, 침대의 모양과 크기도 전부 이겸의 머릿속을 흩트렸다. 저와 함께 누워 있었던 그 침대에서…. 거기서 권태정이….

할아버지와 늘 함께 지내고, 또 내내 일을 하느라 지치고 바빠 자위 같은 것은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억제제 부작용으로 발정기라고도 불리는 히트 사이클이 오지도 않고, 집에 오면 늘 씻고 쓰러져 자기 바빴기에 딱히 욕구 해소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생각하며 자위했다는 권태정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몹시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말해 봐. 할아버지 없이 혼자 있었다면 했을 것 같아, 안 했을 것 같아?”

그날 비에 흠뻑 젖은 채 차가운 욕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열기를 식히려 애써야만 했었다. 권태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를 향해 기울어져 입술이 맞물리던 그 순간이 맺히기만 해도 속옷이 젖었다.

이겸은 아랫배가 울렁이다가 성기로까지 열기가 번지는 느낌에 조금 울기까지 했었다. 만약 집에 혼자였다면…. 권태정을 생각하며 성기를 만졌을 것 같았다. 그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대답 안 할 거예요….”

“안 했을 거라고는 안 하네. 됐어, 뭐. 굳이 안 들어도 다 알아.”

장난기가 묻은 말투에 이겸은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빨리 차에서 내려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은 권태정이 없는 곳으로 가서 마음껏 부끄러워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넌 왜 묻는 거에 항상 대답을 안 해?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도 내가 물은 거 대답 기어이 안 하고 그냥 갔네.”

“…어떤 거요?”

“컨테이너에 왜 왔는지 대답 안 했잖아. 대답해, 지금이라도.”

“아….”

“간병인이 나 봤다고 얘기했지?”

“…네…. 그래서… 정말 오셨는지 그것만 보려고 간 건데….”

“그걸 왜 보는데. 왔다면 그냥 왔구나 하면 되지. 비가 그렇게 오는데 굳이 나와서 다 젖어 가면서까지 그걸 왜 확인해.”

창 쪽으로 돌아갔던 몸은 어느새 다시 앞을 보고 있었다. 이겸은 제 몸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며 권태정의 말을 곱씹었다.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굳이 그 빗속을 지나 거기 권태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러 갈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유가 없다는 걸 그때의 저도 알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도 컨테이너 근처에 가서도,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고 열지 못할 때도 저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가 여기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한참이나 바보처럼 머뭇댈 수밖에 없었다.

“…안 오신다고 하셨는데…. 오셨다는 말을 들으니까 정말인지 보고 싶었어요. 왜 오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화나신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화? 내가 화가 왜 나.”

“…비가 많이 오니까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을 때…. 화나신 것 같아서요. 제가 너무 주제넘게 군 것 같기도 하고….”

“주제넘었던 건 아니고 좀 서운했던 건 맞아.”

이겸의 시선이 나릿하게 움직였다. 화가 난 게 아니고 서운했다는 말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평생 서운함을 느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라 더 그랬다.

“제가… 안 오셔도 된다고 해서요?”

“응.”

“그건 실장님께서 비 오는 날 나가는 거 안 좋아한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그런 거예요….”

“알아. 아는데 그래도 내가 너한테 필요하길 바랐나 봐. 네가 와 달라고 했으면 기분이 좋았을까.”

권태정은 핸들을 부드럽게 돌려 어느새 익숙해진 다람동 입구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오면서 제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대로 말을 뱉고는 있는데 참 두서없고, 한심하고, 저질스러웠다. 뭐 그게 저니까 어쩔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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